무덤의 맨 앞[입구]에는 풍수지리 그림[‘간지도’, ‘방위표’, ‘능역도’, ‘위치도’]가 놓여 있었고, 맨 끝[임금의 발 밑]에는 우주 그림[방격규구신수문경]이 놓여 있다.

이러한 배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금 무덤은 당대 백제문화의 총체적인 지식과 국력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덤의 배치는 한나라 때에 덧널 형식에서 방 형식으로 바뀌면서 제기된 과제였다.

황효분[2003]은《한묘적 고고학 연구》[우리나라에는 2006년《한대의 무덤과 그 제사의 기원》이란 이름으로 번역 출간됨》에서 방 형식으로 바뀐 것은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전의 닫힌 형식과 달리 열린 형식을 취한 것이 바로 제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껴묻거리[부장품]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예악기, 생활필수품, 위신의장용구 등이 은주 시대에 유행했으나 진묘벽사품, 공헌제사품, 명기 등이 전국시대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한대에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특히 일상생활에 소요되는 그릇, 도구, 건축시설 등을 모방한 장례 때 일시적으로 만든 모형유물[명기]이 이러한 제사공간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았다.

지하 무덤방 내에서 정문, 지게문 및 부뚜막, 우물, 화장실의 설비, 혹은 일정한 방위에 따라 특정한 장소에 도[목]제 창고·부뚜막·우물·화장실을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사람의 사후생활을 위하여 제공하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한인들의 천지사상과 음양풍수신앙의 관념에 의거하였다는 견해이다. 도제 창고는 종묘 제사와 관련되고 부뚜막은 조왕[부엌]신앙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우물은 하늘과 통한다[통천관지]는 믿음에서 화장실은 독으로써 독을 막아낸다는 벽사진흉이라고 보았다. 이들 네 가지는 당대 5 제사와 대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한대의 무덤과 그 제사의 기원》2006:346쪽].

말하자면 아무렇게나 명기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와 관련된 공간에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령 임금 무덤의 풍수지리 그림[간지도]과 우주 그림[방격규구신수문경]의 배치도 이러한 차원에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된다. 이를 증명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풍수지리 그림은 본래 보고서[1973]에서 ‘방위표’로 되어 있다. 이후 ‘능역도’[이병도], ‘위치도’[성주탁], ‘간지도’[성주탁과 정구복]로 불렸다.

이 그림의 비밀은

1) 왜 ‘서쪽의 간지가 빠져 있느냐?’[이 부분은 무덤 입구로 향하여 놓여 있었다.],

2) ‘유지’[정서쪽으로 ‘거상’(정지산 대벽 건물)한 곳]과 ‘신지’[서남쪽으로 임금 무덤이 있는 곳]의 의미가 무엇인가?로 요약된다.

‘유지’는 ‘왕궁으로부터 정방위인 서쪽 땅’으로 설명되고 있다.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던 곳인데, 가매장의 장소[정지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지’도 역시 왕궁으로부터 사이 방위인 서남쪽 땅이 되는 셈이다.
당시 풍수지리상의 방위는 24쪽이었다. 24방위란 8천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무기’를 제외]과 12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그리고 사이 방위인 4유[손곤건간]를 합하여 만든 것이다.

4유는 8괘 가운데 정방위인 진[동], 이[남], 태[서], 감[북]을 제외한 방위로 동남[손], 서남[곤], 서북[건], 동북[간]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 24방위에는 아직 4유의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보고서에도 이 점에 대하여 ‘소위 후천팔괘도 사용의 하한선’이라고 주목한 바 있다.

▲ 전통적인 풍수리지 지남철 (윤도)

이 글에서 풍수지리 그림[간지도]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유지’와 ‘신지’라는 방위가 풍수 사상의 소산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유지’는 ‘이로운 방향’이고 ‘신지’는 ‘그 길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이다.

중국 감숙성 고대에서 위진[220~420] 때 풍수지리 그림[경소평· 손아소의 합장 무덤에서 발굴]이 나왔는데, 무령 임금 무덤의 ‘간지도’과 거의 일치한다[위정《육조묘장적 고고학연구》2011:358~359].

이 풍수지리 그림은 나무에 검은 색깔로 그린 모습이였다. 중앙에 ‘기무’의 간지가 있고 동남서북으로 돌아가면서 간단한 글귀가 있다.

동쪽에는 ‘묘이도/진묘문’이, 남쪽에는 ‘오편시/미징이’이, 서쪽에는 ‘유이도’가, 북쪽에는 ‘자편시/축징이’가 각각 한자로 쓰여 있다. 서북쪽[간방위]에 ‘묘문’이 있다.

▲ 백제의 간지도와 중국의 풍수지리도

이런 구조를 어떻게 풀이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유이도’는 ‘유[서쪽]가 이로운 길’로 ‘오편시/미징이’는 ‘오[정오]의 시간을 이용할 때, 미[남쪽이되 서쪽과 닿아 있는 사이 방위]에 이로운 징조가 있다’로 풀이해 본다.

같은 방식으로 ‘묘이도/진묘문’도 ‘묘[동쪽]가 이로운 길’인데 진[동쪽이되 남쪽에 닿아 있는 사이 방위]에 문을 내라는 것이다.

‘자편시/축징이’도 ‘자시[23:00~01:00]를 이용할 때 축[북쪽이되 동쪽과 닿아 있는 사이 방위]이 이로운 징조가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 ‘사남’[방격]과 ‘수라반’[규구]

한 나라 때의 풍수지리 도구인 사남은 네모꼴의 소반 모습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처럼 둥근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북송[960~1127] 때부터로 알려진다.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수라반으로 물 위에 바늘을 띄워놓고 보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감숙성 고대의 부부 합장 무덤의 풍수지리 그림의 설명은 무령 임금 무덤의 그것과 직접적인 연결이 된다.

‘유지’라는 서쪽이 ‘이로운 방향’이므로 정지산에 모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지산 유적은 소위 ‘대벽건물’[평면 방형의 도랑을 파서 기초로 하고 기둥을 세운 후 그 사이에 흙을 발라서 벽으로 만든 건물 형식]인 빈궁 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임금과 그 비[아내]가 28개월 동안 시신으로 모셨던 곳이다.

문제는 ‘신지’[서남쪽]이다. 중국의 경우 ‘술지’[서북쪽]에 무덤의 문이 있는데, 무령 임금 무덤은 반대편인 ‘신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부분이다. 중국의 경우 중앙이 ‘무기’인데 백제의 경우 반대로 ‘기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무덤의 문의 입구는 결국 같은 셈이다.

둘다 ‘무’ 쪽에 무덤 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치를 하지 않으면, 무령 임금 무덤의 문은 금강이 될 것이다. 활용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풍수지리 그림 선상에 빠져 있는, 신⦁경⦁유⦁신 ⦁술 등은 서쪽 방위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정방위인 유지인 것이다. 궁전에 있는 곳에서 유지와 신지를 잡은 것이 아니라 유지와 신지를 맞춘 것이다.

사실 정지산 빈전 유적지에서 정방위인 묘지로 연결하면 금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림에 빠져 있는 부분이 서쪽 계열인데, 무령 임금 무덤의 입구[남쪽]를 향하여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풍수지리 그림상의 방위와 실제 무덤 상의 방위가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참고로 궁중의 위치는 정지산 유적지인 서쪽[유지]에서 동쪽[묘지]으로 일직선을 그은 뒤 유지에서 15도 각도인 신지와 그 일직선과 맞는 곳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유지와 신지는 궁중의 서쪽이라는 상징적인 방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사용하던 지남침이 오늘날 봉침 즉 해 그림자로 자오선[얼영자오]을 재는 방식이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정확도는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구리거울[동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 구성 요소부터 알아두기로 한다. 우선 원래 기능인 앞의 면[경면]이 있다.

그러나 구리거울의 문화적 중요성은 앞면보다 뒷면의 꾸밈새에 있다. 뒷면 한가운데에 인꼭지[뉴]가 있고 인꼭지를 중심으로 하는 자리[뉴좌]가 만들어진다.

그 다음 구역이 생기는데 안 구역[내구], 가운데 구역[중구], 바깥 구역[외구]이라고 한다. 가장 바깥 끝부분인 가장자리[변연]이라고 한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가운데의 인꼭지 부분, 내외의 구역 부분, 가장자리 부분 등 3 요소로 구성된다. 이들 부분에 글자[명문]나 그림[신수 등]이 들어가는 띠[대]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방격규구신수문경’은 네모진 격식[방격]과 원형[규구]에다 신이한 짐승[신수]의 무늬[문]를 새긴 거울[경]이다.

임금의 발치에서 나무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역시 거울 뒷면을 위로 하여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는 ‘방격규구경’ 대신에 ‘박국경’이라고도 한다.

▲ 백제[왼편]와 중국[오른쪽]의 구리거울

보고서[1973]에는 방격과 무늬[1인물과 4신수 등] 그리고 글씨가 새겨진 띠[명문대] 부분을 내구로, 톱날 무늬[거치문]과 물결 무늬[복선파문]의 띠[대] 부분을 외구로, 무늬가 없는 바깥 부분[소문]을 ‘외주’ 즉 가장자리로 보았다.

소위 내구의 TLV형, 네모안의 12간지와 그 사이의 12개 젖[유], 그리고 네모 밖 1신인-4신-조수와 그 사이의 8개 젖[원좌유] 등이 구성되어 있다.

보고서에는 후한대의 유행한 구리거울의 유형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구리거울에 인물 도상이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로 알려졌다[정군 편《중국장식예술》2001:86~96].

인물과 함께 짐승이 등장한 구리거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하남 낙양 금촌에서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 거울의 도상은 말 탄 사람이 한 손에 말고삐를 한 손에 검을 들고 정면으로 사나운 호랑이를 찌르는 모습이다.

또 다른 보기는 1975년에 호북성 운몽수호지 9호분 진秦 나라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역시 한 손에 방패와 한 손에 검을 들고 표범과 겨루는 그림이다.

방격규구신수문경은 거의 옷을 벗고 삼각형의 아래옷만 입은 사냥꾼이 2갈래창을 들고 달려드는 3 짐승을 사냥하는 도상이다. 따라서 이 도상은 ‘후한대’라기보다는 ‘춘추전국대’의 유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겨진 글자[명문]는 한 나라에서 유행하던 ‘상방경’[국가 기관에서 만든 거울]으로 신선 사상을 담은 것[‘상방작경진대호 상유선인부지노 갈음옥천기식자 수〇금석혜’]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명문은 ‘수〇[여]금석혜’ 대신에 ‘부유천하유4해’이다. 방격규구신수문경의 명문은 7언-7언-7언-5언의 형식인데, 맨 끝의 5언 처리는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다.

무령 임금이 활동하던 중국의 남북조에 유행하던 거울의 명문은 ‘하늘이 해와 달에 맡기어 4 바다를 비추니 곧바로 빛이 밝다’ 유와 같은 것이었다.

보고서에서 방격규구신수문경은 후한대의 무늬를 본떴지만, 전한 무늬와 백제 형식의 개별적인 새로운 무늬를 넣었다고 생각된다.

한당[한과 당 나라]의 기물은 형식이 자연스러웠다. 대개 그 법이 먼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둥근 것[환]은 하늘을 모델로 삼고, 네모진 것[방]은 땅의 모델로 삼은 것이다. 6[동남서북과 위아래]이란 여러 물건의 형태를 낳는 이유이고 8방위란 그 자리를 정하는 이유이다. 좌우상하에는 4령[청룡, 주작, 백호, 현무]이 있고 경도와 위도에는 5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있어서 하루를 갖추고 12 지지로 일 년을 갖춘다. 12개월로 하늘을 한 바퀴 도는 것은 28수[별]가 있고 서로 위치를 정하여 돌아가는 것은 3신8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삼재도회》거울에 관한 총론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삼재도회》권3 기용 권1, 1,090~1,091].

▲ 《삼재도회》‘감총설’ 부분

거울을 만드는 방법은 옛날부터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천원지방’이란 말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동양의 우주관을 이른 말이다.

따라서 ‘방격’이 땅을, ‘규구’가 하늘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와 방법으로 생각하면 구리거울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주의 처음 형성 모습을 신화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위와 아래 등의 6가지 요소는 우주의 전체적인 공간이다.

거기에 물건의 모습이 놓이는데 이들은 결국 8 방위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하도의 4 정방위[정동, 정남, 정서, 정북]와 낙서의 4 간방위[동남, 남서, 서북, 북동]를 합한 것이다.

이를 기호화한 것이 팔괘인데 두 부류가 있다. 소위 선천 8괘와 후천 8괘가 그것인데 주로 후자를 말하게 된다. 진[정동, 3, ☳], 손[동남, 4, ☴], 이[정남, 9, ☲], 곤[남서, 2, ☷], 태[정서, 7, ☱], 건[서북, 6, ☰], 감[정북, 1, ☵], 간[북서, 8, ☶] 등으로 태양이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한다.

그러면 정방위인 4령은 정동이 청룡, 정남이 주작, 정서가 백호, 정북이 현무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들 4령과 함께 5 별들 즉 목성[세성, 동방], 화성[형혹성, 남방], 금성[태백성, 서방], 수성과 토성[진성] 등이 운행하게 된다.

방위로 볼 때 목·화·금성은 동·남·서방으로 배치되고 수성과 토성은 북방에 배치된다. 즉 낮과 밤의 모습인 것이다.

이들이 서로 조합하여 1년 12달을 만들어낸다. 12지지 사이에 각각 젖꼭지 모습이 하나씩 끼어 있다. 젖은 어머니의 표상이다.

낱개의 젖꼭지는 사람들을 키우는 길목이다. 기른다는 것은 새와 짐승, 풀과 나무들까지 다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의례로 친다면 상서로운 징조인 것이다.

이 글은《중수선화박고도》[송 나라의 왕보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삼재도회》[이상 두 글은 내용이 같다]에 거울 총론의 일부이다. 12개의 젖꼭지는 12달 동안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 만물을 모두 키운다는 의미인 것이다.

‘젖은 종과 같다[유여종]’는 의미는 불교에서 종소리로 세상 만물을 구제한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종에도 예외 없이 젖꼭지가 꾸밈새로 들어가 있다. 불교적 이미지를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이치로 따라가면 네모 밖에 있는 큰 8개의 젖꼭지는 하늘에서 사람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을 키운다는 의미가 된다. 이 도상에서 1 인물과 4 령[청룡, 주작, 백호, 현무]은 28수[별]와 대응시키고 있다.

청룡은 동방의 7수[각·항·저·방·심·미·기]를, 주작은 남방의 7수[정·귀·유·성·장·익·진]를, 백호는 서방의 7수[규·누·위·묘·필·자·삼]를, 현무는 북방의 7수[두·우·여·허·위·실·벽]를 각각 관장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도상은 도교의 신선 사상과 유교의 통치자 이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임금은 ‘수렵’이라는 통치행위를 한다.

고대 임금의 수렵행위는 수렵된 짐승을 ‘희생’[제사와 관련된 의례]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지역 순방을 통하여 지방관들과의 관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반나체에다가 맨발이기도 한 인물은 통치자의 예술적 표현인 것이다[보고서에서는 이 인물상을 실제로 사실로 상정하여 상투까지를 넣어 남만족과 동이족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앞에서 예시한 대로 4 신이한 짐승[신수]도 역시 예술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금의 통치는 곧 백성들과 만물들을 ‘젖’[유]으로 기르는 행위인데, 4령과 28수가 함께 운행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 ‘간지도’가 풍수지리에 대한 길흉을 적은 것이라면 ‘방격규구신수문경’은 임금의 통치 행위를 우주의 운행과 결부시켜 도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무령 임금 무덤의 맨 처음과 마지막은 모두 백제 사람과 나라의 길한 모습을 미리 제시하여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나라 무덤의 배치를 수용하였지만 백제에 알맞은 세계를 지향한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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