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8일은 무령 임금이 세상에 새로이 등장한 날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3회까지, 그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내용을 연재한 바 있다. 그런데 전문가를 중심으로 반응이 좋아서 이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 편집자 주

무령 임금 내외의 무덤에서 총 5쌍[임금 것 1쌍과 비[아내]의 것 4쌍]의 귀걸이가 발견되었다. 이 글은 소위 임금의 ‘하트’형 귀걸이와 그 비[아내]의 ‘탄환’형 귀걸이에 대한 비밀을 풀어내는 데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금의 ‘하트’형의 실체는 여성의 성기를, 그 비[아내]의 ‘포환’형의 실체는 남성의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음란하다고 할 정도의 성 상징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고 결국 다산과 안산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귀걸이는 그 이전의 표기로 ‘귀거리’[석주선 《한국복식사》1971 : 328 ~ 343]와 ‘귀고리’[김영숙《한국복식문화사전》1998 : 80]가 있다. 1999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귀걸이’와 ‘귀고리’가 모두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고고학에서 귀걸이도 다른 유물과 마찬가지로 형태를 기준으로 나눈다. 보통 귀에 직접 달수 있는, 맨 위의 부분[주환, 유환], 중간을 꾸민 부분[중간식], 가장 아래에 매달리는 드리개[수식] 등으로 나눈다.

맨 위 부분을 중심 고리[주환]와 노는 고리[유환]로 나누기도 하고 굵은 것을 태환식, 가는 것을 소환식이라고 한다. 중간 꾸민 부분은 투각구체[투각한 구슬 형태], 반구체[반원 형태], 입방체[네모 형태], 구체[구슬 형태] 등으로, 맨 아래 드리개의 부분은 심엽형[‘하트’형의 잎 모양], 추형[종 모양], 산치자형, 구체형[구슬 모양] 등으로 나눈다[《고고학사전》2001:132~133].

드리개의 경우 입체형, 평면형, 이 두 가지의 혼합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평면형은 귀걸이 끝에 달린 장식의 모양에 따라 심엽형[하트모양의 잎 모양], 검릉형[얇은 곡선 모양], 유엽형[버들가지 잎 모양] 등으로 나누고, 입체형은 구형[구슬모양], 포탄형, 치자 열매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또 복엽[나뭇잎 여러 개의 나뭇잎 모양]이 있는데 천마총이 그 사례의 하나이다.

1973년《무령왕릉발굴조사보고서》에는 임금의 귀걸이는 ‘금모곡옥 및 심엽형수식 부이식’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금으로 만든 모자를 쓴 굽은 옥 및 심엽형의 꾸미개를 부친 귀걸이’라는 뜻이었다. 귀걸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재료나 형태 등을 소개하다보니 주종이 바뀐 인상을 준다.

임금의 비[아내]의 귀걸이는 ‘금제이식’ 즉 금으로 만든 귀걸이로 비교적 간편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식’[귀 꾸미개]도 역시 일반 사람들은 공감이 쉽지 않다.

2008년에 출간된《무령왕릉 기초자료집》도 여전히 ‘금제심엽형이식’[임금]과 ‘금제수식부이식’[비]이란 용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다가 2006년 권오영 교수의 무령임금에 관을 책을 내면서 ‘귀걸이’로 정리되었다. 전문가용에서 일반인용으로 바뀐 것이다.

귀걸이는 귀에 거는 꾸미개로 귀를 뚫어 꿰는 문화와 귓바퀴에 거는 문화를 생각할 수 있다. 귀걸이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귀걸이는 복식학, 고고학, 그리고 화장문화학 등에서 다루어왔다. 복식학은 꾸미개의 일부로, 고고학은 유물로, 그리고 화장문화학은 미용학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와 함께’라고 한다면, 귀걸이는 고대 종교 문화와 관련이 있음직하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학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상여[유거]에 관한 제도를 논의하면서 귀걸이가 등장한다. 이 제도는 세종실록 2년 9월 16일(신사)에 설명되어 있다. 그 가운데 방상씨와 관련된 부분에서 귀걸이가 등장한다.

방상씨 수레가 4인데, 그 제도는 보통 수레와 같으나, 조금 작다. 수레 위에는 조그만 걸상을 놓고, 방상씨 4 사람이 황금빛 4 눈에 귀걸이[이환]를 걸고,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검은 옷과 붉은 치마에 창을 잡고, 방패를 들고 그 위에 선다.

방상씨는 발인[죽은이가 무덤을 향하여 가는 절차]에서 맨 먼저 앞장서서 가는 신앙문화의 하나이다. 고대부터 역신[질병과 불행을 일으키는 신]을 쫒기 위해 4 눈[서민은 2 눈] 가진 가면을 쓰고 검은 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있다.

방상씨는 귀신을 쫓아내고 신성한 장소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예방 의학’으로 정신적 방역 행위가 될 것이다. 방상씨의 4눈에 귀걸이가 걸었다는 것은 역신을 쫓아내는 예방 치료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상여의 맨 앞에 위치한 방상

 

 

 

 

 

귀걸이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몸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기능보다는 신앙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귀걸이는 기능적인 면에서 1) 몸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기능, 2) 몸을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보호하는 기능, 3) 신분을 드러내는 기능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조선시대[1392~1910] 귀걸이는 보통 은[독을 검출하는 수단으로 은수저를 사용한다]으로 고리를 만든 후, 금파 · 파란 등으로 장식한 천도[하늘복숭아]를 단 것도 같은 이유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귀걸이 유형을 보이면, 크고 둥근 고리 끝에 천도를 매달은 형태, C형의 고리에 천도와 막대기[봉술]을 함께 단 형태, 술실을 머리 딴 것 같이 엮어 귀에 걸만큼 길이를 고정시키고 밑은 그대로 탐스럽게 풀어놓은 형태 등이 있다.

귀걸이 술은 대개 정장을 했을 때 어깨 위로 댕기같이 늘어뜨려서 화려한 꾸미개 역할을 했다. 구한말[대한제국 1897~1909년]까지 혼례식 때에 신부가 화려한 머리장식을 하고 혼례복 위로 귀걸이 술을 내려뜨렸다고 한다.

이러한 귀걸이의 기능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최근에 60살도 넘는 여자 노인이 귀를 뚫으면 몸이 낫는다고 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귀걸이문화는 점점 화려해지고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평균수명이 짧았던 전통적인 사회에서 남녀 어린이들이 착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저간의 이야기가 이규경[1788~?]의《오주연문장전산고》에 소개되어 있다. 세종 연간[裪 재위 1418~1450]에 오면 사대부 어린이들이 금·은으로 만든 귀걸이를 하므로 국가에서 금지령을 내리고 있다[세종실록 원년1419 정월 6일(신해) 조, 11년1429 2월 조].

그러다가 선조 5년[1572. 9. 28]에 결국 국가에서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하는 풍조를 금지하게 된다. 선조[昖 재위 1567~1608]는 비망기로 전교하여 몸과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물려받았으므로 손상해서 아니 된다는 효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온 나라에 알려라. 서울은 이 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승전을 받들라.

이후 남자 아이가 귀걸이 하는 풍속은 없어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귀걸이가 ‘오랑캐 풍속’이라는 인식이다. 중국 사람들이 남자 아이의 귀걸이를 비웃으니 달지 말라는 것이다.

하여튼 선사시대 귀걸이가 짐승의 이빨이나 뿔 또는 기괴한 돌 등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정신적 예방을 바탕에 둔 문화라고 할 것이다.

참고로 귀걸이는 1쌍으로 양 쪽에 착용하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13세기 말엽~15세기 말엽]와 바로크Baroque[16세기~18세기] 유럽Europe의 경우에는 한 쪽인 경우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남녀 공용이었으나 고대 이집트Egypt, 그리스Greece[라틴 Graecia], 로마Rome 등에서는 여자들만 착용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임금의 귀걸이[국보 제156호]는 머리 부분[동쪽]에서 1쌍이 출토되었다. 귀에 거는 중심 고리[주환]에서 두 갈래 장식이 늘어진 형태이다.

한 갈래는 금판을 접은 빈 원통형 대롱이 3장의 ‘하트형’ 드리개[수하식]에 박혀 있는 모양이다. 다른 갈래는 씨 없는 산치자 열매와 같은 모습을 하고 끝 부분은 모자 쓴 푸른 굽은 옥[곡옥]이 달려 있다.

임금의 비[아내] 귀걸이[국보 제157호]는 4쌍이 발견되었다. 머리 부근에서 발견된 것이 2쌍이고 발받침 부근에서 팔찌와 함께 2쌍이 발견되었다. 머리 부근에서 발견된 귀걸이도 역시 두 갈래로 구성되었다.

한 갈래는 ‘하트’ 형이 꾸미개로 마디 모양을 이루다가 맨 끝에는 ‘탈환’형으로 마무리하였다. 다른 갈래는 씨 없는 산치자 열매 마디로 모양을 이루다가 맨 끝에 씨가 박힌 산치자 열매로 마무리하였다.

발치 쪽의 귀걸이는 가는 중심 고리에 금실로 감아 고정시키고 다시 금실로 작은 원형의 달개로 드리개를 한 소박한 형태이다. 권오영 교수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임금의 비[아내]가 어릴 때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끝부분에서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귀걸이: 왼편은 임금의 비[아내] 오른쪽은 임금

 

 

 

 

 

 

 

 

임금과 그 비[아내]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하트형과 탄환형의 귀걸이이다. 그런데 이들 귀걸이의 원리는 철저하게 음양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임금’의 귀걸이는 하트형으로 표현된 ‘여성 성기’를 달고 임금 비[아내]의 탄환형으로 표현된 ‘남성 성기’를 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금 귀걸이의 ‘남성’[아직 빈 금막대 형상]은 ‘여성’에 삽입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특히 ‘여성’의 모습이 작은 이파리를 좌우로 덮어서 여성의 외음부를 형상화했다고 생각된다. 형상화된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말로 하기가 쑥스러울 정도이다. 

 

하트형은 여성의 성기와 탄환형은 남자의 성기

 

 

 


 

 

 

 

이러한 백제 사람들의 다산 풍속은 목간에서도 확인된다[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2007].
임금 비[아내]의 귀걸이는 맨 끝에 형상화한 ‘남성’이 많은 숫자의 여성 외음부[좌우를 덮은 하트형]에 싸여 있다.

마치 부부간에 수많은 ‘사랑’[성교]을 나눔으로써 자손을 둔다는 ‘애정 행위’에 대한 형상화로 이해된다. 중간 꾸밈[중간식]이 모두 작은 ‘하트형’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많은 숫자의 하트에 싸인 ‘남성’
부부간 많은 횟수[작은 하트 숫자만큼]의 ‘사랑’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산치자 열매’로 표현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임금 부부의 귀걸이는 중간 꾸밈새 부분을 모두 씨 없는 산치자 열매로 맨 끝 부분을 씨가 맺힌, 완결된 열매로 마무리하고 있다.

임금의 것은 5 매듭으로 씨 없는, 미숙한 열매를 표현한 뒤 맨 끝을 굽은 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임금 비[아내]의 것은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다.

귀걸이는 첫 매듭에 씨 없는 열매로 옥을 감싼 것과 옥이 없는 것이 있다. 여기서 감추어진 옥은 임금 귀걸이의 굽은 옥과 관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목관 배치가 임금이 동쪽이고 그 비[아내]가 서쪽인 점을 감안한다면, 옥이 감추어진 귀걸이는 임금 비의 것이어야 한다. 

왼쪽[비]은 산치자 열매로, 오른쪽[임금]은 굽은옥으로 마무리

씨 없는 산치자 열매에 둘러싸인 굽은 옥[임금]은 결국 씨 없는 열매를 거쳐서 씨가 맺힌, 완벽한 생산이 이루어진 열매[비]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위험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산’이란 하나의 어려움을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열매 가운데 ‘산치자(’산에 절로 나는 치자나무의 열매. 출혈을 그치고 그 열을 풀며 오줌을 잘 누게 하는 데 씀)를 선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산치자 열매는 한의학에서 ‘해열’, ‘지혈’, ‘이뇨’ 따위에 약재로 쓴다. 이는 출산의 과정에서 꼭 거쳐 넘어가야 할 통과의례이었던 것이다.

무령 임금 당대[501~523]에 치자는 아직 널리 알려진 약제가 아닌 특수 처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산치자 열매의 의학적 효능이 알려지면서, 후대에는 향약제로 채취하는 월령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에는 저절로 자라는 산치자를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길러서 채취하는 일반 약제인 치자가 된 것이다. 유효통, 노중례[?~1452], 박윤덕 등[1428]《향약채취월령》음력 9월조가 그 증거이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초의 이두 향명은 ‘지지’라고 표기되었고, 허준[1546~1615][1613 25권25책]《동의보감》이나 강명길[1799]《제중신편》에도 ‘지지’로 기록되었다. 유희[1773~1837][1820?]《물명류고》에 ‘지자’로 하다가 황필수[? 1권]《방약합편》과《선한약물학》에서 비로소 ‘치자’라 불렀다.

《단방신편》에는 ‘치’라고 하였다. 목단, 선피, 치자, 지자, 월도, 산치자, 지자, 소치자, 황치자 등 다른 이름이 많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활용도 널리 알려졌다는 반증이 된다. 치자는 꼭두서니과Rubiaceae에 속하는 치자나무Gardenia jasminoides Ellis의 열매를 약으로 사용한다.

약효는 청열이습[열을 깨끗하게 하여 습에 이로움], 사화해독[화기를 내려 독을 풂], 양혈산어[피를 맑게 하여 어혈을 풂] 등[《중국본초도감》꼭두서니과 치자 조]의 작용이 있어서, 소갈[갈증], 소변의 불편, 황달, 열병 등으로 인한 허번불면[헛된 번뇌로 잠을 못 이룸], 열독창양[열이 높은 독과 종기] 등에 효과가 있다. 임상 실험에서는 급성황달형간염, 타박상, 국부출혈 등에 신속한 효능이 인정되었다. 산치자는 말하자면 출산에서 안산을 위한 비결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이 임금 내외의 귀걸이는 그 출산과 안산을 기원하는 과정을 형상화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의자손수대경’이나 남녀 ‘동자상’에서 보듯이 임금 내외의 자녀 출산과 건강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합천 옥전 M11호분 출토품 귀걸이[길이 7.7cm]는 중간 꾸미개 부분이 어린이 얼굴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도 출산과 안산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발치 쪽의 귀걸이는 머리맡에서 발견된 것과 비교할 때 소박함을 면하지 못한다. 권오영 교수는 크기가 작아 성인이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임금의 비[아내]가 어릴 때 사용하던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 선조[昖 재위 1567~1608] 때까지 남녀 어린이들이 즐겨 귀걸이를 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귀걸이와 팔찌 등은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오랑캐 문화’에 속한다. 선조가 남자 아이가 귀걸이를 하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가 바로 이 이유였다. 달리 말하자면, 서역을 통한 유라시아의 문화라는 뜻이다.

만약 이런 의견을 수용한다면, 귀걸이에 대한 다른 상상도 가능해진다. 고관대작들이 임금 내외의 출산과 안산을 위하여 귀걸이를 바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귀걸이의 크기와 규모 등은 아이와 어른의 ‘실용적 요소’도 있겠으나 신분적 제약에 따른 요소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경제력이 있다고 해서 어느 계층이나 막론하고 금·은 등으로 화려한 귀걸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는 ‘팔찌’라는 다른 항목을 설정하여 살피도록 할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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