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꼭대기에 매달린 가을 햇살에 노인의 힘겨운 표정이 비친다. 들깨 단을 가득 싣고 중천의 태양아래 작은 길을 따라 리어카를 끌고 가는 어르신. 아마도 어르신은 이른 아침부터 이 일을 시작하신 듯 굵게 주름진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하다.난 밀물과 썰물 같은 그 주름살에 담긴 세월을 따라가 본다. 고달픈 인생의 삶의 역정이 머무른 그곳에 어르신의 지난 인생이 스치듯 지나간다.들깨 단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싶지만, 어르신에게는 벅차기만 한 듯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낮이 지나고 다시 깜깜한 밤.
신작로 옆 한 무리의 코스모스가 씽씽 거리며 달리는 차들의 바람에 흔들립니다. 버스, 승용차, 용달의 주인들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또한 엉덩이를 바짝 올려 세운 채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달리고 있는 사이클 선수들도 지나갑니다. 그들의 검게 탄 장딴지는 영암 월출산의 큰 바위만큼 단단해 보입니다.코스모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길가에 앉아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하늘거립니다.그러한 코스모스의 흔들림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겨 봅니다. 그 순간 나는 코스모스가 되어 있고, 지나온 세월이 스치듯 흘러갑니다.
집 마당 모퉁이에 오래된 고목 감나무를 보니 분명 가을입니다. 감잎에 조금씩 홍조가 들고, 가지에 단단히 매달리지 못한 감은 가을비를 못 견디고 툭하고 떨어져 곤죽이 되었습니다.굳이 감나무가 아니더라도 낮과 밤의 일교차로 가을은 이미 제 곁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이렇게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클 때면 작게 매달린 풋고추를 따기 시작합니다.아침일과는 풋고추를 따는 일 부터 시작 됩니다. 노안이 와서일까? 잎 사이에 숨어 매달린 풋고추를 찾기 위해 저는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가며 눈을 흘겨가며 샅샅이 찾아봅니다. 그리고 한참을 뒤적거
공자께서는 “나무는 시기를 맞춰서 베고, 짐승 하나를 죽이는 것도 시기를 가려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때’ 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지금쯤 내 집 정원의 뜰은 내게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망울망울 겨자씨보다 작은 씨들이 여물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월동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잡초들의 씨가 매달려 있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멍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멍하게 보낸 시간이 향기롭게 느껴졌다. 불필요한 잡초는 눈에 보여 잘 뽑아내면서도 오랫동안 찌들어 떡이 되도록 아집으로 남은 이무거운 것들은 나는 왜
주변에 뒹구는 쓸모없는 고무 통 2개. 이 통은 해마다 나에게는 충실한 수행 도구이다. 3월말 토마토 모종을 4개 정도를 고무 통에 한 개에 두 포기씩 나누어 심고, 그중 건강한 것은 남기고, 한 개는 뽑아낸다. 이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재배법이다.그리고 토마토가 붉은 자태를 뽐내는 8월이 오기까지 토마토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린다. 올해는 모기가 비교적 적게 출몰했지만, 여름이면 나는 모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유별스럽게 물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당의 잡초를 뽑을 때도 주위에 모기향 3개를 피워놓고 작업을 해야 한다.
저 멀리보이는 산언덕에 초록 빛 사이로 분홍 솜사탕 같은 벚나무 한그루가 눈에 보인다.아마도 그것은 새의 배설물을 통해 발아(發芽)됐을 것이다. 날씨도 더운데, 파리와 모기가 고장 난 방충망을 알아채고는 나의 심기를 건드린다. 참다못해 고장 난 방충망을 고치기로 하고, 집일을 도와주시는 분을 모셔왔다.몇 해 전 그분께 진달래나무를 부탁드렸더니 고맙게도 진달래나무와 화살촉나무를 캐다 주셔서 십여 년을 키웠더니 지금 그 나무는 나에게 큰 기쁨이 되고 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아저씨는 화살촉 나무를 보며 “참~ 묘 해유. 나무를 옮겨 심
가끔씩 찾아뵙던 스님의 선물인 봄 차(茶)가 무심한 듯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문고리에 달랑달랑 매달려있었습니다.그 선물의 향기는 마당을 가득 채우는 듯 했습니다. 추운 겨울 깊은 산골에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듯 푸근한 느낌이었습니다.어깨끈이 달린 벙어리장갑도 보였습니다. 왠지 어딘가를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파도처럼 퍼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큰 힘으로 다가와 내 마음을 이끌었습니다.배낭에 평소 아끼던 찻잔과 스님이 주신 우롱차를 잘 챙겼습니다. 그 차의 첫 번째 향은 단종 임금께 받치고 싶었습니다.영월의 청령포. 단종
우리의 모든 기억은 과거에 한정된다. 그런데 그‘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그 과거를 가슴에 달고 있다.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어떨까? 지난 시간, 지난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때 과거는 현재의 삶에 큰 도움을 주는 밑거름이 된다.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행동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오늘 나의 행동들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간다.그러니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시기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연장선에 있다.그러나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5월말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하지를 알려주는 감자꽃이 한창이다. 또한 여린 연둣빛 감꽃이 살포시 잎 사이로 얼굴을 내보이며 꽃들의 언어인 향기로 손을 들어 흔든다.십여 년 전 나는 여름휴가 겸 묵언수행을 계획했다. 마침 알고 지내던 공주대 교육학과 최교수님께서 조용한 암자를 소개해주셨고, 나는 일주일간 내소사에 있는 ‘지장암’이라는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이른 새벽, 예불대신 비구니 주지스님께서는 오카리나를 부셨다. 전나무숲 향과 오카리나 협주곡은 다시 생각해봐도 커다란 울림이었다.지장암은 큰 절이 아니었기에 비구니스님 세분과 공
해마다 석가탄신일(음력 4월8일)이면 나는 언제나 특별한 날로 정해 산사를 찾는다. 난 카톨릭신자이지만, 그날만은 왠지 스님의 설법도 듣고 싶고, 산사의 정취에 흠뻑 빠지고 싶기도 해서 그런가 보다.그리고 절의 나무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먹는 맛난 쑥 절편, 간장 미역국, 비빔밥은 생각만으로도 이미 뭔가 편안하다. 마치 잠깐이라도 속세를 떠나 비워지는 느낌이다.하지만 올해에는 다문화가족 문화예술 교육이 주말에 잡혀있어 그 맛난 떡과 비빔밥을 먹지 못한 2019년이 되어버렸다.지난 14일 시간을 내어 가끔 찾아뵙는 스님께 전화를 드려
4월 22일 백제기악에 대한 공주학연구원에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고 심우성 선생님의 부친이셨던 심이석 선생님께서 만드신 탈과 함께 이해준 교수님, 최선교수님 외에 많은 관심이 있는 분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가슴이 뛰었다.오래전에 있었던 진정한 백제인이란 누구일까에 대한 토론이었다. 연구자들은 기록적으로 너무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그 자리에 있던 나는 그러는 와중에도 발바닥에서부터 온기가 심장을 향해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집으로 향한 후에도 온종일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교동초등학교를 다
꽃샘바람이 난리다. 나는 똘기(?)가 있어 이런 날 엉덩이가 들썩거려 가만히 있기가 어렵다. 강가에 사는 나는 바람에 익숙하다지만, 봄바람은 그런 듬직함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뜨끈한 선짓국이 나를 부른다. 이럴 때는 공주산성시장을 찾는다. 시장 안에는 20여년 넘게 선짓국을 파는 식당이 있다. 나는 가끔 그곳에 들러 쫑쫑 썬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땀을 내며 먹는다.어릴 적 모친께서는 양동이에 가득담은 붉은 핏덩어리가 섞인 무언가를 가지고 오셔서 대파와 무청을 넣어 가마솥 가득 끓여 하숙생과 가족들에게 푸짐하게 내어주셨다.그래서일까?
짹?짹?짹--짹. 참새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달라진 밖의 변화를 느끼게 해줍니다. 겨울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펴는듯한 참새의 울음소리는 지구의 큰 숨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에구나 싶어 가까이 내려다보니 제가 그만 싹을 밟아 버렸군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벌써 나오셨는지 몰랐어요.”작약이 봄소식을 전하려 땅을 뚫고 안주인을 보고 있었지만, 무딘 이 사람의 눈에는 땅만 보였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줄 아는 그런 눈 말입니다.다만 잠깐 둘러볼 생각으로 슬리퍼를 신고 서성였던 터라 나
오늘은 따듯한 붉은 흙 부뚜막의 이야기를 올려볼까 합니다. 추운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봄 냄새가 솔솔 풍겨올 때 저의 선친은 아카시아 나무를 하러 가셨지요.우수(雨水)가 지나 산 너머 세제골에서 땔감으로 베어온 아카시아 나무 속살에는 불규칙한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 아카시아나무를 아궁이에 땔 때면 푸짐한 소리를 내었습니다.지금쯤이면 아카시아 나무는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 한줄기 물을 가지로 끌어 올리느라 한참인 때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물줄기가 촉촉하기까지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는 아궁이에서 푸짐하게 소리를 냈던 것이었
보름, 그것도 정월대보름은 또 하나의 뜨거운 달을 품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매번 15일 주기로 보름달이 찾아오는 줄은 익히 알지만, 똑 같은 달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설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정월대보름의 기운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하늘과 땅. 서로의 양과 음의 맞아 생명을 허락하듯, 태초의 생명을 예견하듯 그렇게 달빛은 말을 합니다.이때부터 부는 바람은 허파를 자극해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겨울잠을 푹 잤던 붉은 간의 움직임도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월대보름달의 기운 때문이 아닌가합니
겨울을 나기위해 뽁뽁이를 붙이고, 여기저기 바람구멍을 찾아 막으며, 겨울 채비를 꼼꼼히 했습니다.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오고, 무척 춥다는 예보에 경기까지 많이 안 좋다는 뉴스가 나오니 콧노래를 부를 분위기는 아닌 듯합니다.늘 제일 춥고, 제일 어렵고, 몇 십 년 만에 오는 어려움을 전례행사처럼 되풀이하는 이런 공허한 말들이 이 겨울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그래도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는 이런 상황들을 어찌 표현했을지, 어찌 이겨냈을 지를 생각해보며 몸의 온도를 조절해보려 합니다.어려웠던 시절. 이때쯤
묵은해는 가고 서슬 퍼런, 기가 가득한 숫자 2019년이 확 들어옵니다. 가슴에 서각을 하듯 다짐과 각오를 다져보지만, 이 각오가 얼마동안이나 나를 다그칠지…. 먼 산 바라보며 숨 한번 고릅니다.“올해도 멋지게 살자, 그러기위해 뚜벅 뚜벅 걸어보자”고 외치며 오늘도 긴 호흡을 끌어올려 조심스레 토해내봅니다. 천천히, 조금씩, 하얀 입김을 길게 내쉬며.짚을 태우던 그때의 향을 느껴봅니다. 불을 붙일 줄 몰라도 짚을 잘 타도록 해주었던 아궁이는 이 추운 겨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따뜻한 경험이었습니다.추위에 떨었던 어려웠던 시절의
동지가 지나고 나면 밤의 색은 온통 칠흑과 같다. 산 아래 논두렁 저만치에 있는 오두막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불그레한 불빛은 고혹적이다.이런 겨울밤에 눈이 내리면 세상은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나의 가슴은 온통 하얀 추억들이 그득하게 자리 잡고 있다.하얀 눈꽃이 하늘거리며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추억도 그 눈을 타고 내려온다. 참으로 그리운 추억들. 그 추억들은 불이 되어 나를 유혹한다. 나는 그 추억 속에 있고, 그 추억은 그 불빛 아래서 춤을 춘다.커다란 무쇠 솥에는 물고구마가 익어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징글벨’ 등 캐롤 소리에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장독 위에는 하얀 눈이 쌓여 왠지 푸근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 산타할아버지가 빨간 양말 한 켤레 정도는 주고가실 듯합니다.하얀 눈처럼 하늘거리며 내리는 그리움 속으로 빠져봅니다. 저녁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향교 앞 동네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열 댓 명이 족히 넘는 아이들이 모여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 “희자야, 은주야, 일환아, 희지야, 만순아…밥 먹어라”당시에는 캐롤송보다 더 많이 들었던 이 소리는 교동 향교 산 아래 울려 퍼지곤
평범한 일상에서의 하루를 시작합니다. 매일 시작되는 아침은 창문사이로 깊게 들어와 줄 것 같은 햇살의 고마움이 문득 느껴지는 순간입니다.그 아침은 매번 느낄 수 없는 찰나와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기에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다짐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내일도, 또 모래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앞만 보고 살아왔지만, 실은 오늘 이 아침은 신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날입니다.11월의 깊은 아침을 마주한 지금의 행복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저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저에게는 기적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