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15분은 무령 임금 무덤이 처음 열리던 순간이었다. 무령 임금이 세상과 새로이 소통하는 공감 그 자체였다. 따라서 2011년 7월 8일은 발굴 40주년 기념일이 되는 셈이다.

이에 특급뉴스에서는 공주대학교 구중회 교수(풍속문화학)에게 요청, 집필하고 있는《 (가제) 백제 무령 임금 무덤의 풍속문화》의 원고가운데 일부를 세 차례에 걸쳐 미리 선보인다.

글을 싣는 순서는 ▲ 제1회 수저와 신발은 반함의례의 흔적 - 머리와 발받침을 연계하여 ▲ 제2회 ‘검’이 ‘칼’[환두대도]이 된 사연 ▲ 제3회 28개월 장례와 [유]송나라 제도 순이다./ 편집자 주 

무령임금 무덤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는 당대의 이름이 ‘검패劍佩’[고려 충렬왕 이후는 ‘패검’]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검패’는 역사가 오래된 백제·고구려·신라·가야 등이 과다한 경쟁적 관계로 역사가 짧은 남·북조의 나라들을 끌어들이고자 하였고, 그 반대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군사 동맹이었다. 남·북조의 나라들은 외국[번국]의 세력에게 ‘군사적 봉호’를 내렸다. 그 때 표상의 하나가 검패였다.

‘환두대도’와 ‘검패’는 같은 유물이지만, 각각 고고학과 역사학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입장에서 ‘검’과 ‘칼[도]’를 살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결론부터 내리면, ‘검’과 ‘칼[도]’은 구분할 어떠한 역사학적 근거가 없다. 그런데 20세기 전반부에 들어서면서 고고학에서 그 구분을 하고 나섰다.

‘고건축’ 전문가인 일본인 학자가 발굴한, 우리나라 유물 조사보고서에서 ‘대도’, ‘도’, ‘도자’ 등 용어를 사용하여 유물을 정리한 것이 결과적으로 검과 칼의 구분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고고학적 환경을 정리하고 역사학적 전개 과정을 밝혀 융·복합 시대의 학문 방향에 참여하고자 한다.

고고학적 환경

-‘무기’라는 단일 품목으로

하나의 단어가 학술적인 용어로 성립되려면, 적어도 형태form, 기능function, 의미meaning 등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칼 즉 ‘대도’, ‘도’, ‘도자’ 등의 용어는 학술어로 적절하지 않다. 이들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2001]《고고학사전》은 ‘고리자루칼’로 ‘環頭刀’란 항목을 설정하고 있다.

그 설명에 따르면, 그 구분 기준은 ‘칼의 크기’와 ‘손잡이 머리 부분의 형태’였다. ‘칼의 크기’에 따라 ‘큰칼’[대도 60cm 이상], ‘작은칼’[소도 60cm~30cm], ‘손칼’[도자 30cm 미만] 등으로 나누고, ‘손잡이 머리 부분의 형태’에 따라 ‘민고리자루칼’[소환두도], ‘3잎고리자루칼’[3엽고리자루칼], ‘세고리자루칼’[3환두도], ‘용봉고리자루칼’[용봉환두도], ‘귀신고리자루칼’[귀환두도] 등으로 나눈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전의 정의는 ‘형태’라는 조건에 맞춘 것이다. ‘기능’이나 ‘의미’를 고려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것이다.

그 결정판이 일본 경도대학 인문과학 연구소[1976년]《한대의 문물》의 견해이다.

이 책자는 경도대학 임이나부林 已奈夫를 반장으로 반원으로 10여개 대학과 연구소와 협회가 모여서 엮은 것이다. 1970년부터 5년간의 작업 끝에 결실을 본 것이다. 한 나라의 문물을 정리한 것으로 서계 즉 책류를 제외하면 10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맨 끝의 항목이 ‘무기와 정기[깃발]’이다. 여기에서 칼[도]과 검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심적인 전거가 한 나라[전한 B.C 206~A.D 5 후한 25~220] 유희劉熙의《석명》‘석병’ 즉 군사에 관한 풀이이다.

[《석명》‘석병’에서 칼은 네 종류가 나온다. ‘단도’ 즉 짧은 칼, ‘패도’ 즉 차는 칼, ‘전도’ 즉 종이를 오리거나 나뭇가지를 자르는 칼, ‘서도’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칼, ‘봉도’ 즉 가위 칼 등이 그것이다. 무령 임금의 것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칼은 ‘환’ 즉 고리, ‘봉’ 즉 자루, ‘삭’ 즉 칼날, ‘병’ 즉 칼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검은 ‘심’ 즉 칼자루와 칼날 부분을 나누어주는 테에 ‘비’ 즉 쇠뇌가 있고 ‘봉’ 즉 칼날 끝이 있다는 것이다.

칼과 검의 구분은 손잡이 부분의 ‘비’ 즉 쇠뇌[두 팔을 껴안듯이 붙어 있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법이 잘 드러난 것이 삽화도이다.


 

 

 

 

 

 

 

 

일본 학자의 검과 칼의 구분

칼은 평양에서 발굴된 ‘환도’를, 검은 소흥리저紹興漓渚의 것을 보기로 들었다.

여기서 ‘환도’는 무령 임금 무덤의 ‘환두대도’와 같은 종류이다. 여기서 제기된 것이 ‘양날이냐’[검] ‘외날이냐’[칼]와 손잡이에 ‘쇠뇌’가 ‘있느냐’[검], ‘없느냐’[칼]이다.

이러한 구분법은 칼과 검이 ‘무기’라는 점에 착안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칼과 검은 병기용이기도 하지만 의례용[노부와 의장 등]과 신앙[불교나 천도교의 검경] 및 예술용[검무] 등을 고려하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과 칼을 구분법을 논의하기에 앞서 ‘환도’와 ‘환두대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두대도’는 한자로 ‘環頭大刀’이고 ‘환도’는 ‘環刀’이다. 언뜻 보면 비슷한 용어로 생각하지 쉽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다.

《국조오례의서례》권4 군례 병기도설에 의하면, ‘검’은 ‘사람이 차고 다니는 병기’이다. 2 종류인데, 하나는 ‘운검’ 즉 ‘구름 검’이고 다른 하나는 ‘패검’ 즉 ‘차는 검’이다.

‘구름 검’의 주머니는 고기 가죽으로 싸고 붉은 칠을 하며 흰 은으로 꾸몄고 붉은 실로 땋은 끈을 드리우며 얇은 가죽 끈으로 차도록 한다고 하였다.

다른 하나의 ‘차는 검’은 사투리로 ‘환도’ 즉 ‘휘어진 칼’이다. 검정 칠을 하고 누른 색 구리로 꾸미고 역시 붉은 실로 땋은 드리우고 사슴 가죽으로 찬다고 하였다.

《국조오례의 서례》는 ‘구름 검’과 ‘차는 검’ 즉 ‘환도’는 제도적으로는 같다고 보았다. ‘환두[대]도’가 ‘고리자루를 가진 칼’[《고고학사전》]이라면 ‘환도’는 ‘휘어진 칼’이다.

일본인 학자들이 ‘환도’를 ‘환두[대]도’로 오해한 것이다. 역사학에 등장하는 칼이나 검은 ‘형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meaning[‘신분’]이나 기능function인 것이었다.

무령 임금 무덤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는 발굴 20년 후에 얻은 이름이다. 1973년 발간된《무령왕릉 학술조사보고서》의 이름은《단룡환두도》[여기 환은 ‘鐶’]로 하나의 용이 새겨진 고리머리 칼이었다.

‘환두대도’[여기 환은 ‘環’]는 1991년 충청남도와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백제무령왕릉》에서였다.

부장 유물 1에서 금속제 장신구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7번째 ‘환두대도와 장식도자’로, 당시 부여박물관의 신광섭申光燮이 집필을 맡았다.

‘丹頭’라는 단서 조항을 붙인 것이 특이하다. 이후 이 용어는 변동 없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2008년에는 ‘금동제’[《무령왕릉 기초자료집》]라는 접두어가 붙었고, 작년[2010]에는 ‘고리자루칼’[《국립공주박물관》]이란《고고학사전》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환두대도’는 그대로였다.

그러면 어떻게 ‘환두대도’라는 용어가 성립되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1915~1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조선고적도보》에는 ‘도’[칼] 및 ‘대도’[큰칼]과 ‘검’은 나누어진다.

《조선고적도보》1~2책은 1915년 3월1일에 3책은 다음 해 1916년 3월 31일에 발간되었다.

1책은 낙랑시대 및 대방군시대 그리고 고구려 시대[국내성]를, 2책은 고구려 시대의 평양 장안현을, 3책은 마한시대, 백제시대, 임나시대, 옥저(?) 시대, 예(?) 시대, 고신라 시대, 3국 시대 불상 등을 조사한 보고서였다.

이 가운데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동 고분과 경북 경주군 보문리 부부총에서 출토된 것과 전경주군 內田良平이 소장한 것은 ‘대도[큰칼]’와 ‘도[칼]’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 정확한 분류는 고리칼자루 즉 환두대도였다. 따라서 1915~16년에는 ‘환두대도’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그냥 ‘대도’, ‘도’, ‘도자[손칼]’라고 하거나 앞에 ‘부장’이 접두사로 붙어서 ‘부장대도’, ‘부장도’, ‘부자도자’라고 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경주 보문리 부부총의 ‘부장대도’는 ‘검’에 속한다. 적어도 사진에 나타난 바로는 양 날을 가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고적’이 무덤 발굴을 중심으로 ‘고건축 전공자’에게 ‘촉탁’되었다는 점이다.

이 발굴은 1909년[명치 42] 9월부터 약 34개월간 공학박사인 관야전關野貞, 문학사인 곡정제일谷井濟一, 공학사인 율산준일栗山俊一 등이 담당하였다.

고대 무덤을 ‘고건축’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아무래도 전공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촉탁함으로써 빚어진 결과가 아닐지 모르겠다.

‘환두대도’ 혹은 ‘환두도’란 용어가 1936년에 발행된 《조선고적조사보고》에서 나타난다. 도계리 50호분 전축분으로 전·후·측실이 있다. 이 고분에서는 대도, 도, 도자 등이 고루 출토되었는데 모두 철[쇠]제였다.

역사학적 전개

4국[백제·고구려·신라·가야] 시대는 검과 칼이 구분되어 있었다. 칼이 생필품이나 전쟁터의 무기인 반면에 검은 ‘지휘권’ 내지는 ‘출세’의 상징이었다.

‘지휘권’의 보기가《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7] 안장왕[재위 519~530]의 ‘패검’이었다. 안장왕은 고구려 22대 임금이다. 이름이 흥안興安이요 문자명왕[492~518]의 장자로 519년에 즉위하였다.

이때는 무령왕 19년이었고 양[소씨] 무제 임금 18년이고 북위[선비족 탁발씨] 효명 임금 2년이었다. 양의 무제는 520년 2월에 고구려 안장왕에게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 제군사 고구려왕’으로 양 나라 방식의 군사 동맹을 맺고자, 사자[강주(법)성江注(法)盛]에게 ‘의관’과 ‘검패’를 전하려 했다.

그런데 그 사자가, 북위 병사에게 해상에서 붙잡혀 서울인 낙양에 압송되었다. 그리고 북위의 효문제는 안장왕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등급을 높여서 군사 동맹을 맺었다. 중국의 남·북조 나라들이 우리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 경쟁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위와 양의 이러한 우리나라와의 군사 동맹 경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양 나라 직공도가 외국 사신들의 ‘사진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이를 실감이 날 것이다.

사실 중국 남·북조 특히 남조의 나라들은 ‘제 발등의 불끄기’도 바빠서 명멸하는 정권들이었다[유씨의 송이 59년, 소씨의 남제가 23년, 소씨의 양이 55년, 후량이 32년, 진이 31년 23년에서 59년 동안 유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교하면, 우리나라 4국은 이미 500~600년을 지탱해온 안전한 상태의 국가였다.]

하여튼 양 나라는 무령 임금이 즉위하자 ‘정동대장군’을, 521년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직책으로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교 문서와 같은 ‘의관’과 ‘검패’가 전달된 것이다.

검이 ‘출세’로 표현된 것은《삼국사기》[권47 열전 제7] 설계두薛罽頭[신라 사람]가 ‘중국에 가서 고관직에 올라 검패를 갖추고 천자의 곁에 출입하고 싶다’에서 확인된다.

칼에 대한 기록은 주로 ‘무기’나 ‘수사법’으로 등장한다. ‘刀’의 표현은 사람과 동물을 죽인 기록이다. 고구려의 두로杜魯가 모본慕本 임금을, 유유紐由[고구려 사람]이 위 나라 장수를, 김현[신라 사람]이 호랑이를 그 사례이다.

그리고는 ‘목숨을 칼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든지, ‘간을 칼로 에는 듯하다’든지, ‘칼로 허벅지 살을 베었다’든지와 같이 수사법이나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경우이다.

한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부분이 있다. 우선 연개소문이 ‘몸에 칼 5 자루를 찼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이에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제[마음대로 함]하여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 칼을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서 좌우의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 기록은《삼국사기》권49 열전 9 개소문조에서 뽑아온 것이다. 여기서 칼을 분명히 권력의 상징인 ‘지휘권’과 관련된 것이다. 검의 기능을 가진 것이다. 칼과 검의 분별이 사라지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용도는《삼국유사》권2 기이 제2 ‘처용랑과 망해사’ 조이다. 임금[헌강 임금 재위 875~886]은 북악 산신이 보여준 ‘옥도령玉刀鈴’[이병도의 번역인데 원문을 보면 ‘玉刀鈐’이다]이라는 부분이다. 무속에서 칼춤[검무]을 추는데 그 유래가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용례는 ‘도’를 신표로 사용한 보장왕[고구려 재위 642~668]때의 기록이다. ‘도’의 초창기의 기능은 화폐였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검과 칼의 역사는 고려 충렬임금에 와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원 나라의 영향을 받아 ‘환도’[여기서 환도는 ‘휘어진 칼’을 말한다.]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충렬 임금 3년[1277] 원 나라에서 유홍劉弘, 홀노忽奴[환철장 즉 대장장이]이 파견되었다. 임금이 이장무李藏茂에게 명령하여 그들과 함께 충주로 가서 환도 1,000 개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국가에서는 홀노가 만들어 가진 환도[왕족들과 권무관]를 회수한다는 기록이 다음해에 보인다. 1280년에는 교위 정지연鄭之演을 원나라로 보내 환도 3백 78자루를 바친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 서긍의《선화봉사고려도경》 제13권 병기에는 ‘패검’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한데, 백금[은]과 오서[검은 무소뿔]에 사이사이 어긋나게 해사어피[바다상어 가죽]를 섞어 칼집을 만들었다. 곁에 환뉴[칼집 둘레에 고리를 달아 매는 것]를 만들어 색 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ㆍ상옥체[상옥으로 꾸민 칼등]ㆍ봉필[칼의 장식, 즉 위의 장식은 봉, 아래 장식은 파이다) 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남은 제도이다. 문위 교위와 중검랑기가 모두 찼다.

패검의 구조가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것은 문위 교위와 중검랑기가 찼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서긍이 패검을 찬 신분을 지적한 듯하다. 하여튼 서긍이 기록한 검의 구조는《국조오례의 서례》 [권4군례] ‘병기도설’과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 《국조오례의 서례》 권4 군례 병기도설 2b

 

 

 

 

 

 

《국조오례의 서례》 권4 군례 병기도설 2b

이 그림은《국조오례의 서례》군례 병기도설의 부분이다. 고려 시대의 오례에 속하는 길례와 군례 등에는 ‘난도’ 즉 제사에 쓰는 희생[소, 양, 돼지 등]을 잡는 칼이 등장하는 데 역시 조선 시대에 그대로 계승된다.

▲ 《국조오례의 서례》 권1 길례 ‘제기도설’ 50b

 

 

 

 

 

 

 

《국조오례의 서례》 권1 길례 ‘제기도설’ 50b

난도는 종묘[나라의 조상을 모신 사당]에 쓰는 옛날 칼이다. 흥미로운 것은 난도가 음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난도를 씀은 그 방울소리를 듣고 궁과 상이 조화된 뒤에 고기를 벤다는 것이다.

난도는 종묘에서 고기를 베는 칼이다. 환[고리]에 화[음]가 있고 봉[칼끝]에는 난[방울]이 있다. 난이 봉성에 있으며 소리가 궁상3에 맞고 화가 환성[고리 소리]에 있으면 소리가 각치우에 맞는다.

이상은 위에 표에 보이는 설명이다. 이 난도는 환도처럼 고려 시대부터 전승된 것이다.
《국조오례의 서례》의 길례 ‘노부’에는 ‘은장도’와 속악[‘정대업’]에는 검이 등장하기도 한다.


 

 

 

 

  

《국조오례의 서례》 권2                     《국조오례의 서례》 권1
가례 노부도설 22a                                  길례 속부악기도설 102b

은장도는 길례 노부로 등장한다. 나무로 만드는데 칼집에 조각을 하고 은을 입혔고, 붉고 푸른 채색을 사이에 칠하였다.

고려 시대의 반검도 역시 목검인데 서로 비교가 된다. 속악의 정대업에 등장하는 검은 첫 번째 줄에 서되 6명씩 2줄로 12개의 검이 등장한다.

검과 칼에 대한 결정판은 정조가 명하여 지은《무예도보통지》이다. 권1은 총론, 권2에는 쌍수도, 예도, 왜검, 권3에는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이 있다. 이들은 형태에 의거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능과 사용자의 신분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책 이외에도 《동국병감》,《병학지남》, 박종경[1765~1817]《융원필비》등 적지 않은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이기로 한다.

장자의 ‘설검’[외날]과 도홍경의 ‘도검’[전ㆍ해서체 명문]

사실 검에 관한 기록은 한 나라의 유희劉熙《속명》‘속병’보다 앞서서《장자》제30 ‘설검’ 즉 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장자[약 369~약 290, B.C]는 검을 ‘봉’즉 칼날 끝, ‘악’ 즉 칼날, ‘추’ 즉 칼등어리, ‘심’ 즉 칼자루의 테, ‘협’ 즉 칼자루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검은 ‘양날’이 아니고 ‘외날’인 셈이다.

장자는 천자, 제후, 일반 백성 등의 검이 있다고 설명한다. 가령 ‘천자의 검’은 주변의 나라를 검의 구성 요소로 비유하는 사용한다. 검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천자의 검은 연계[856~222, B.C]와 석성을 칼날 끝으로 삼고 제[386~221, B.C] 나라와 대산을 칼날로 삼고 서북의 진晉[1106~376, B.C] 나라와 위衛1030~209, B.C] 나라를 칼의 등마루로 삼고 주[1030~256, B.C] 나라와 송나라를 칼자루의 테로 삼고 한[408~230, B.C] 나라와 위魏[403~225, B.C] 나라를 칼자루로 삼습니다.

검의 구성 요소를 갖고 나라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다음에 검의 역할을 갖고 설명하고 있다.

사방 오랑캐로 그 둘레를 안고 춘하추동 사시의 추이로 그것을 감싸며 발해로 주위를 둘러치며 상산을 띠로 삼아 칼을 허리에 찹니다.

오행으로 통제하며 형벌과 은덕으로 휘두르는 법을 논하며 음양으로 칼을 칼집에서 뽑으며 봄, 여름에는 칼을 가지고만 있으며 가을 겨울에는 칼로 내려칩니다.

이 칼은 곧장 앞으로 뻗으면 더 이상 앞이 없는 우주의 끝에까지 이르고 위로 쳐들어 올리면 더 이상 위가 없는 무한의 높이를 가르고, 아래로 내려치면 더 낮은 데가 없는 아래를 치고, 휘두르면 사방 어디고 한정된 방향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뜬구름을 절단하고 아래로는 대지를 묶은 굵은 밧줄을 끊습니다. 이 칼은 한 번 쓰면 제후들의 옳지 못함을 바로 잡고, 온 천하의 만백성이 복종합니다. 이것이 천자의 칼입니다.

제후의 검은 지혜와 용기 있는 사람을 칼날 끝으로 삼고 욕심이 없는 사람을 칼날로 삼고,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칼등으로 삼고, 충의와 성덕이 있는 사람을 칼자루의 테로 삼고 재지가 뛰어난 호걸을 칼자루로 삼는다고 보았다. 그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 백성을 검도 전개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천자

제후

백성

날 끝鋒

북:연나라 중심과 변방

지혜와 용기있는 사람

쑥대머리 구레나룻에 철모와 투구 짧은 전투복 차림. 서로 싸워 죽임

날鍔

동:제나라 

욕심없는 사람

등脊

서북: 晉나라와 衛나라

현명하고 어진 사람

자루테鐔

周 나라와 宋 나라

충의와 성덕이 있는 사람

자루夾

韓나라와 魏나라

지혜가 뛰어난 호걸

청동 시대에는 칼이 거의 없고 검이 주종을 이루는 것과 일치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예기》‘소의’에도 나온다. 검과 칼을 전해주는 방식이 소개되어 있다. 

검을 바치는 데는 궤를 열고 그 뚜껑을 궤의 밑에 겹쳐 끼운 다음 검집과 검을 곁들여서 전갈을 청하는 것이다. 도[칼]를 바칠 때에는 칼날을 반대로 하여 칼자루 끝의 고리[潁]를 잡도록 건네준다.

곡도曲刀를 바치는 데는 손잡이 쪽을 잡도록 건네준다. 무릇 날카로운 칼날이 있는 것을 남에게 줄 때에는 칼날을 정면으로 받는 사람 쪽에 향하지 않게 하는 법이다.

도홍경[456~536]은 양 나라 사람으로 도교, 불교, 유교 삼교일치론자이다. 그는 무제[502~549]의 ‘산중재상’으로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 가운데《고금도검록》이 있다.

‘왕이 황제가 되면 도검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이 저서는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 모두 사라져서 글을 쓴다고 했다.

하우의 아들 계啓은 재위 10년을 누렸다. 경술 8년에 구리 검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3자9치였다. 뒤에 진망산 자락에 묻었다. 검의 위에는 28수 무늬가 있고 등의 면에는 성진이 있고 등에는 산천일월을 기록하였다.

계의 아들 태강太康은 재위가 29년이었다. 신묘 3월 봄 1 동검을 만들었다. 위에는 8방의 면이 있고 길이가 3자2치로 머리가 네모졌다.

시황始皇[259~210 B.C, 재위 37년] 3년에 정사일에 북쪽 땅에서 동검 2개를 캐냈다. ‘定秦’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사李斯[?~208 B.C]가 작은 전서체로 새겼다. 뒤에 아방궁 문설주 아래와 관대 아래에 묻었다. 길이는 3자6치였다.

이런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도홍경은 검을 ‘하늘의 의지’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즉 신의 뜻과 위력을 지닌 상징물로 받아들였다고 할 것이다.

그 상징이 대전 즉 큰 전서체라는 ‘주문’에 있다고 했다.[‘주문’의 ‘주籒’는 원래 주나라 태사 이름이다. 그가 만들었다는 글자체를 ‘대전’ 즉 큰 전서라 한다. 이미 있었던 ‘소전’ 즉 작은 전서체와 상대적으로 쓰인 것이다.]

《고금도검록》첫장

 

 

 

 

 

 

 

도홍경의《고금도검록》을 정리하면, 왕이 황제가 되면 도검을 만들어야 하는데 도와 검에는 전서체와 해서체 등의 명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무리하기

‘환두대도’는 고고학적 용어이다. 역사학적 용어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등 4국시대에는 ‘검패’였고 고려부터 ‘패검’으로 바뀌어 사용했다.

패검의 다른 명칭 즉 사투리가 ‘환도’였다. 환도는 ‘휘어진 칼’이지 ‘환두도’의 고리자루칼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일인 학자가 ‘환도’와 ‘환두도’를 동일시하여 결국 ‘환두대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환두대도’라는 용어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형태로 한정시켜 분류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 나라 윤록允祿 등이 나라의 명을 받고 1755년에 짓고 1766년에 반포한 《황조예기도식》에는 검이 아예 사라진다.

모두 칼로 정리되었다.《경국대전》에서 환도장과 도자장으로 나뉘었거나《국조오례의 서례》에서 칼과 검을 구분한 것과 대조가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칼과 검은 구별이 아니 되지만, 형태로 나눈 방식[고고학]이 아니고 백제 당시의 기능과 신분 등의 방식[역사학]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융복합 학문이 요사이 학계의 흐름이다. 인문계와 이공계 등의 융복합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이제 고고학, 역사학, 풍속문화학 등이 통합되고 한중일의 범주를 벗어나 세계를 대상으로 학문을 정립할 시기가 온 것이다.

‘환두대도’의 도상은 용인데 이름이 애자睚眦이다. 죽이는 것을 좋아하여 칼자루에 있고 삼키기 때문에 혀를 내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의경전’을 인식하자 못하고 ‘공예품’으로 다룬다. 실상 이러한 도상의 해석은 비교적 간단한 답에 속한다. 동양 문화의 범주에서 9룡의 설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애자 이외의 용은 다음과 같다.

1) 초도椒圖는 닫는 것을 좋아하여 문고리 장식에 쓴다.
2) 비희贔屭[贔屓]는 무거운 지기를 좋아하여 비석 귀부에 쓴다.
3) 수우囚牛 음악을 기뻐하여 악기의 머리에 쓴다.
4) 망풍望風은 험한 것을 좋아하여 건축의 각진 위를 다는 데 쓴다.
5) 기하는 물을 기뻐하여 다리 아래나 물 떨어지는 데에 쓴다.
6) 포뢰蒲牢는 울기를 좋아하여 종뉴에 쓴다.
7) 산예狻猊은 연기와 불을 기뻐하여 향로의 다리에 쓴다.
8) 이문螭吻은 바라보기를 좋아하여 지붕에 쓴다.

9룡설은 이와 다른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줄인다. 그러나 옛날의 종과 솥에 새겨진 도철饕餮을 9룡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도철은 고대 문물을 이해하는데 흔한 도상이기 때문이다. 도깨비 도상도 도철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융복합 학문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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