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15분은 무령 임금 무덤이 처음 열리던 순간이었다. 무령 임금이 세상과 새로이 소통하는 공감 그 자체였다. 따라서 2011년 7월 8일은 발굴 40주년 기념일이 되는 셈이다.

이에 특급뉴스에서는 공주대학교 구중회 교수(풍속문화학)에게 요청, 집필하고 있는《 (가제) 백제 무령 임금 무덤의 풍속문화》의 원고가운데 일부를 세 차례에 걸쳐 미리 선보인다.

글을 싣는 순서는 ▲ 제1회 수저와 신발은 반함의례의 흔적 - 머리와 발받침을 연계하여 ▲ 제2회 ‘검’이 ‘칼’[환두대도]이 된 사연 ▲ 제3회 28개월 장례와 [유]송나라 제도 순이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무령 임금 무덤에서 출토된, 젓가락이 없이 단독으로 쓰인 수저[동시, 동제시]와 9개의 큰 못이 박힌 신발[금동은제이, 식이], 그리고 임금과 그 아내의 머리를 받쳤던 받침[두침, 유침]과 발을 고정했던 받침[족좌, 연궤] 등을 통하여 당시의 임종 과정의 일부를 밝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수저·신발·머리와 발받침 등은 각각 독립된 채 고고학적 유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무덤 안의 유물들은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가 하나로 묶인 세계이다. 그동안 진행된 고고학이나 역사학 입장에서 이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풍속문화학[이 용어는 집필자가 만든 것이다. 기존의 ‘민속학’에다 ‘궁중학’을 포괄한 내용이다. 민속학은 ‘일본을 통한 외래 지식 방법’이고 궁중학은 ‘역사상의 전승되는 지식 방법’이다.]의 입장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무령왕릉:발굴조사보고서》에서 제시한 학술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수저는 3개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다른 두 개의 모습과 다르고 또한 젓가락이 없는 외짝이다. 왜 젓가락이 없이 수저만 나왔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임금과 그 아내의 신발은 그 크기로 보나 형상으로 보나 ‘실용품이 아니고 장례용’의 ‘특수품’이거나 ‘의[례]품’이다[보고서 23쪽, 31쪽]. 그러면 장례용 특수품이나 의례품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을 살피고자 한다.

동시에 ‘두침’이나 ‘족좌’로 이름 붙여진 머리와 발받침이 큰못 박힌 신발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밝혀보고자 한다.

 

[그림 1 설명] 오른쪽 숟가락이 왼쪽의 것과 다르고 젓가락이 없다.

 이 글을 쓴 직접적인 동기는 왜 젓가락이 없이 수저만 있느냐 하는 궁금증이었다.

두 개의 숟가락은 젓가락이 2쌍이 있어서 서로 짝이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수저만 하나 있고 젓가락이 없는 것은 필경 무슨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란 가설이다. 여기에 착안하게 된 것이 ‘반함 의례’이다.

사람이 죽으면, 반함 의례가 있기 마련이다. 죽은 이의 입에 쌀이나 동전 등을 입에 넣어주는 의례이다. 쌀을 세 차례 입에 넣으면서 ‘100석이오’, ‘1·000석이오’, ‘10,000석이오’ 라고 말한다.

동전을 넣을 때에는 ‘석’[가마니] 대신에 ‘냥’을 같은 방식으로 한다. 풍속문화학에서는 죽은 이가 저 세상에 가서 먹을 쌀이나 사용할 돈을 넣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무속에서 무당들이 옷을 보내주는 것[태우는 행위]도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림 2 설명] 반함의례의 그림. 17세기 직전의 의례 모습.
이러한 가정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서 즉 《삼국유사》《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증보문헌비고》등 중요 역사와 풍속문화 책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역사서《사기》를 비롯한《양서》《송서》《전·한한서》《전·후당서》《당육전》《당회요》《통전》《예기》을 비롯한 5경 등을 모두 뒤졌다.

그러다가 드디어《예기》제22편 ‘상대기’에서 해당 ‘뿔 숟가락’으로 번역되는 ‘각사角柶’를 찾아냈다. 여기서 ‘사’는 ‘숟가락’이나 ‘윷’[척사를 상기하기 바란다]이라는 사전적 의미이다.

사람 특히 임금이 죽으면 신하가 윗니와 아랫니를 버티는 ‘각사’를 쓴다는 것이다. 반함의례를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죽으면 시체를 상[안상]에 옮기고 염금[이불]으로 덮고 죽을 때 입었던 옷을 벗긴다. 소신[신하를 낮춰 부름]이 이[치]를 버티는 데 각사[뿔수적]를 쓰고 발을 묶는 데 연궤[발받침]를 쓴다. 임금, 대부, 선비가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예기》제22편 ‘상대기’에서 뽑아온 것이다. 진도가 여기까지 나아가니 일사천리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중국 역대의 상장 풍속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책의 하나가 이여삼李如森[길림대학 고적연구소 교수][2003]의 《한대상장예속》[심양출판사]이다. 장례 풍속은 초혼[혼을 부르는 의식, 혼을 부르기 위하여 지붕에 올라가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며 옷을 흔든다.]→ 목욕[죽은 이를 목욕시키고 손발톱을 자르고 머리를 감긴다.]→반함[죽은 이의 다음 세상을 위하여 쌀과 동전 등을 넣어준다] 등의 순서가 있다. 오늘날 장례 풍속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반함이란 구슬[주], 옥, 조개[화폐], 쌀[미] 등을 죽은 이의 입속에 넣어주는 것을 말한다.

이여삼 교수는《전국책》《한서》《후한서》《예기》《춘수》《의례》《주례》등의 적지 않은 책에서 ‘반함의례’에 관한 부분을 찾아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후한서》‘효숭언황후기’이다. 황제의 아내가 죽자 반함에 써야 할 도구를 마련했다는 부분이다.

그림이 그려진 가래나무[梓]의 신명 기구, 옥으로 만든 상자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수철·이광희·신성필[2007]이 ‘무령왕릉 목관재 및 칠기의 수종과 칠 기법 연구’[《무령왕릉:출토유물 분석보고서(Ⅲ)》에서 ‘가래나무속’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령 임금 무덤에서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수종’이며 ‘관재보다는 일부 목재품’으로 보고 있다. ‘효숭언황후기’와 연관시켜 생각할 때 반함 의례 등과 관련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죽은 이의 시신이 굳기 전의 반함의례는 오늘날 장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즉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각각 묶어서 영구를 모시기 쉽게 하는 장례 행위인 것이다.

참고로 관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는 ‘시尸’[시신, 시체]이고 관에 들어간 상태는 ‘구柩’[영구]이다[빈전은 아직 무덤에 모시기 이전에 장례 현장. 일반 서민은 ‘빈소’가 된다].

사당에 들어가지 않고 혼전에 있는 상태는 ‘우虞’[‘우주’]이고 사당[조상의 신주를 모신 곳]에 들어간 상태는 ‘신神’[신주]이 된다.

‘우’의 상태 혹은 그 이전 단계에서 ‘신’이 되지 못하면 ‘귀鬼’로 구천을 떠돌게 된다. 굿이나 설경을 읽는 것은 이들 귀를 신으로 천도하기 위한 것이다. 귀는 불행이나 질병의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굿이나 설경과 관련된 문화는 궁극적으로 효도 사상과 연결되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까지 살핀 것을 정리하면, 젓가락을 동반하지 않은 수저는 반함의식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큰 못이 9개 달린 장례용 신발도 역시 같은 용도라는 것이다.

같이 넣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다리받침이다.《무령왕릉:학술조사보고서》에서 ‘족좌’로 이름을 붙인 이래로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그런데《예기》제22편 ‘상대기’에서는 연궤[발받침]이다. 풀이를 보면, ‘길쭉한 것인데 겨우 두 발을 올려놓을 만한 걸상’이다.

죽은 이의 발에 신발을 신기려고 신하로 하여금 이를 붙들어 매어 발을 휘어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림 3 설명] 큰 못이 박힌 신발과 세부의 모습

 무령 임금이 죽은 후 큰 못이 9개나 달린 신발은 발이 휘어지지 않도록 필요했던 것이다. 내부에 3중포심이 붙어 있고 신발 바닥에 따로 얇은 나무 껍데기를 깔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각 판은 2장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 판의 재질은 은이며 바깥쪽의 판은 금동이다. 이러한 장치는 사후의 영생을 위하여 발이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시키려는 데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예기》의 방식은 사람[임금, 대부, 선비]이 죽으면, 숨진 후부터 시체를 입관할 때까지 여덟 번을 옮긴다. 1) 임종하면 창 아래 옮기고, 2) 목욕하는 상에 옮기고 3) 함상[입에 옥 따위를 물리는 침상]에 옮기고 4) 습상 에 옮기고 5) 소렴 때 옮기고 6) 당에 모실 때 옮기고 7) 대렴 때 옮기고 8) 시체를 관에 넣을 때 옮긴다. 여기서 세 번째 함상에 옮겨 행하는 반함의례인 것이다.

임금이 죽은 뒤 목욕시키는 과정의 일부를 따라가 본다. 목욕 시킬 때 와반 즉 질그릇 상을 쓰고 수건[치건]으로 닦고 담당하는 신하는 손톱과 수염을 깎는다.

머리털을 씻은 더러운 물은 구덩이에 버린다. 그리고 큰 상[대부는 오랑캐 상]을 설치하고 얼음을 담아 놓는다[선비는 질그릇 상을 놓으나, 얼음이 없다].

침상을 마련할 때 자리가 있으면 얼음의 냉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자리를 걷어치우고 평상의 살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리를 치우더라도 베개는 그대로 남겨둔다. 그리고 입에 물건을 물릴 때에도, 옷을 껴입힐 때도, 시체를 당에 옮길 때에도 각각 침상이 하나씩 있다. 이때에도 그 상에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임금, 대부, 선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글 역시《예기》‘상대기’에서 뽑아 옮긴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이 ‘베개’이다. 무령 임금의 무덤의 머리받침 소위 두침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젓가락이 없이 단독적인 수저, 큰 못 박힌 신발, 머리와 다리의 받침이 모두 반함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반함 의식은 내세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므로 기원이 담겨 있다.

무령 임금과 그 아내의 내세의 기원과 후계 임금[성왕]의 내세에 대한 기원은 같을 것이다. 임금 아내의 머리받침[두침]은 윗부분에 나무로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이 있고 아래에 육각형의 거북등무늬가 구획되어 있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흰색, 붉은 색, 검은색의 물감으로 하늘을 나는 천인과 새, 물고기 용, 연꽃, 인동, 네 잎의 꽃 등이 그려져 있다.

철막대에는 금제 능형[마름모양]장식[꾸밈]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공주국립박물관》안내서[2004:44]에서의 설명이다. ‘마름 풀잎 모습으로 꾸민 대나무’를 꽂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발굴 30주년 기념[《백제 사마왕》]으로 2001년의 ‘철기’에서 ‘대나무’로 나아간 것이다.

하여튼 머리의 ‘좌우 봉황 두 마리’와 발의 ‘좌우 대나무’는 도교와 관련이 있다.

이 새가 봉황이라면 ‘鳳’은 수컷을, ‘凰’은 암컷을 뜻한다. 행서체인 ‘甲’과 ‘乙’가 암수를 나타낸 것이라면, ‘갑’은 동쪽 임금의 위치처럼 수컷 봉이 놓이고, ‘을’은 서쪽 그 아내의 위치처럼 암컷 황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원래는 암수의 구분이 없이 ‘봉’만 사용했으나 뒤에 ‘황’이 만들어진 것이라 알려진다. 형태상으로 암수의 구별이 어렵다면, 아직 ‘황’과 결합되지 않은 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림 4 설명] ‘봉황’과 ‘대나무’

 보통 봉황이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의 징후가 되거나 군주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처음 봉황이 나타난 것은 중국 전설상의 황제가 죽기 전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임금의 아내는 남편인 무령임금이나 후손이 위대한 임금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설문해자》에 설명된 봉황은 가슴이 기러기, 후반부가 수사슴, 목이 뱀, 꼬리가 물고기, 이마가 새, 깃이 원앙새, 무늬가 용, 등이 거북, 얼굴이 제비, 부리가 수탉과 같이 생겼다고 되어 있다.

도교의 설화에 의하면 봉황은 대나무에서 놀기를 좋아한다. 참고로 공주시의 땅 이름에서 봉황동과 반죽동이 서로 경계를 이루는 것은 이러한 도교 설화와 무관하지 않다.

신선이 사는 봉래산에는 붉은 대가 있다고 한다. 그 열매의 크기는 큰 구슬만 하고 봉황과 난[새]이 날아와 놀며 신선들이 즐기고, 바람이 불면 종과 풍경 소리를 낸다.

이 붉은 대는 도교와 신비로운 존재들과 어우러져 있는 존재이다. 또 도가에서는 죽순을 햇볕의 태(햇볕이 배어 있는 곳)라고 여겨 대명[크게 밝음]이라 부른다.

이 인용문은 송준호 교수[1992]가《한국문화 상징사전》에서 ‘대’를 소개한 부분이다. 임금 아내에게 나타난 봉황과 대나무는 도교의 신선 사상과 맥락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 삼국 즉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장례용 신발[식리]가 골고루 출토된다는 것은 반함의례가 널리 유행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일본까지도 유행했던 장례풍속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가야지역에서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은 어느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이 장례 도구인지 탐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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