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처럼, 무령 임금 내외의 머리맡에서 각각 2매의 머리관[관식] 꾸밈새와 그 비[아내]의 머리맡에서 바리때[청동제발]이 껴묻거리[부장품, 장신구]로 출토되었다.

그런데 임금의 머리관 꾸밈새[관식]에는 ‘영락[범 keyūra]’이 127개나 달려 있는데 그 비[아내]의 것에는 1개도 없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왜 비[아내]의 머리맡에만 바리때가 있는가? 이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을 성급하게 말한다면, 영락과 바리때는 재가승으로 수계를 받아 우바새[임금]과 우바니[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임금 내외의 머리관[관식]들은 아직 완전한 형태의 모습를 알지 못한다. 다만 머리관 꾸밈새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래서 채택한 단어가 ‘관’이 아니고 ‘관식’[관의 꾸밈새]이다. 최근에 권오영[2005]이 머리관의 꾸밈새를 ‘솟을장식’[입식]이라는 용어로 쓴 것은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임금 내외의 머리관 꾸밈새. 왼편[임금] 오른편[비]

임금 내외의 머리관을 연구한 논문은 김원룡, 윤세영, 이송란 등이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논문들은 김원룡이 1971~73년에 작성한 보고서와 일본에서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머리관 전체의 구성은 국내외 서적에 기록된 ‘오라관’[검은 비단 관]에 근거하고 있다. 이 오라관이 제기된 시기는 고이 임금[재위 234~286] 때인 261년이다. 관복의 제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임금의 머리관은 오라관이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총론에는 찬성할 수 있으나 각론에 가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라관이 임금의 ‘일상적인 의관’이 아니고 ‘특수한 의관’이라면 사정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 그림들은 청나라 때 간행된《삼재도회》에서 가져온 것이다. 위의 왼쪽이 면[면류관], 오른쪽이 관[통천관]이고 아래의 왼족이 두건[烏사절상건], 오른편이 고깔[피변]이다. 쓰임이 각각 다르다.

윤세영은 임금 내외의 각각 머리관 꾸밈새들이 서로 차이[임금;높이: 1.5cm, 너비:0.4cm, 비; 높이:0.2cm, 너비:0.2cm]를 드러내 ‘최고통치자로서의 실용관식’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죽은 임금의 장송을 위한 [머리]관’[윤세영 《고분출토부장품연구》1988:183~222, 《백제무령왕릉》1991:205~215]이라는 것이다.

윤세영의 이 의견은 김원룡이 ‘특수 의식용 아니면 죽은 이를 위한 장관[죽은 이가 쓰는 머리관]’[김원룡 《한국고고학개론》1991:231]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었다.

이 글은 김원룡과 윤세영 두 분의 ‘특수한 의례용’론에 동의하면서 그 내용을 밝혀보려고 한다.

임금의 머리관 꾸밈새를 보는 견해는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식물성의 연꽃 모양이라는 설[김원룡 보고서 1973:18~20]과 광물성의 불꽃[화염]이라는 설[윤세영 《백제무령왕릉》1991: 205~215]이 그것이다.

그런데 임금과 그 비[아내]의 머리관[관식]의 구성은 서로 다르다. 임금의 머리관은 좌우 대칭을 이루지 못하지만, 그 비[아내]의 그것은 좌우가 서로 대칭을 이룬다.

윤세영은 불꽃 무늬[화염문]가 불상 배광[등 뒤에 나타나는, 신체 모양의 빛]의 주연[주위의 선]이라는 생각이다.

고구려 불상의 배광과 연계하여 형태상[영강 7년(418) 명문 금동미륵불, 계미명 금동3존불, 경4년명문 금동3존불, 갑오년 명문 금동석가여래3존불]과 조형기법상[진파리 제7호분 금동용봉문 관형식 불꽃 무늬, 평양 청암동 금동투각 불꽃 무늬]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원룡의 생각을 따라가면, 임금 머리관의 새김무늬는 그리스미술에 나오는 팔메트palmette[야자과의 일종으로 북아메리카 남부 원산]에서 출발한 인동당초문이며 중앙에 꽃송이와 꽃봉오리 같은 부분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잎줄기를 배치하였다.

꽃이라고 생각되는 중앙부는 3가지 가운데 중앙 가지는 가지 양측에 갈구리가 몇 개씩 달려 있고 위 부분에는 꽃잎이 8개인 꽃 모양을 하고 그 위에 다시 3개의 꽃술 같은 것이 올라간다.

이러한 도상은 연꽃[연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꽃의 도상은 머리받침[두침]의 작은 그림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형식은 무령 임금의 머리관이 재래형식에 인동과 연화라는 불교색채의 무늬를 넣은 ‘새로운 형식[신식]’이라는 결론이다.

그런데 김원룡은 7~8년이 지난 1980년에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임금 머리관에 나타나는 인동문은 중국 6조 때 처음 등장하고 임금 비[아내]의 머리관도 역시 6조의 ‘연화좌 위의 화병’에 나타난 도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착안한 ‘신안 제품’이라는 것이다[개정판 《한국 고미술의 이해》1999:199~200].

김원룡의 이러한 견해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그러나 ‘영락’이 중국 북조의 하나이며 선비족의 정권인 북위[386~534]와 북제[550~577]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면, 결코 그리 녹녹한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고고학의 성과로 영락은 삼국시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심엽형, 원형, X자형 등의 장식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 남조의 영향이라기보다 북조의 그것이고 그 성격이 선비족 불교와 닿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글쓴이는 임금 것[왼편]은 ‘화3렬’, 비 것[오른편]은 ‘불3렬’로 보고자 한다.

그 뿐이 아니다. 글쓴이는 이미 ‘무령임금 무덤의 비밀-1’[《특급뉴스》2011.7.8 기사]에서 유교와 도교가 관련된 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수저[동제시], 큰 못 박힌 신발[식이], 머리받침[두침], 머리받침[족좌, 연궤] 등이 반함의례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전거는《예기》《의례》《주례》등에 나타나는 상례에 보이는 것들이다.

무령 임금과 그 비[아내] 머리관 도상도 마찬가지로 이들 유교와 도교가 서로 관련된 곳에 확인이 된다. 소위 ‘화삼렬’과 ‘불삼렬’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불삼렬’이란 불꽃 무늬가 세 줄로 그려진 것을, ‘불삼렬’이란 두 몸이 서로 등지고 있는 그림 석 줄로 그려진 것을 말한다[이것은 시체를 넣는 목관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당대의 상례 문화이다].

‘화삼렬’은 무령 임금 머리관 꾸밈새와 ‘불삼렬’은 임금 비[아내]의 그것과 서로 대응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시체를 넣는 관]을 장식하는 것은 임금은 용유[흰 천에 용을 그린 휘장], 삼지[‘지’는 대나무를 엮어서 용을 만들고 푸른 천으로 옷을 입혀서 유거 위 황의 끝에 걸어 놓음], 진용[길이 1장이 넘는 청색·황색 비단에다 꿩을 그려서 지 밑에 깃발처럼 걸어 놓음], 보황[‘황’은 유거의 위를 덮는 것.

그 가장자리에 백색과 흑색의 도끼 무늬가 있으므로 보황이라고 함]이 있다. 보황에는 화삼렬, 불삼렬이 있다.

흰 비단 지붕[이것은 궁실을 상징]에 위황[‘위’는 휘장이고 ‘황’은 유거의 위를 덮는 상개]을 덮으며 비단 끈이 여섯이다.

제[배꼽의 의미. 황의 한복판에 원형으로 장식된 부분]에는 오채[5색 비단], 오패[5 무늬]를 장식한다. 보삽[‘삽’은 나무로 부채 모양를 만든 것으로 ‘삽’은 도끼를 그린 것]이 2, 불삽[‘불’ 즉 弓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것]이 2, 화삽[구름 무늬를 그린 것]이 2인데 모두 구슬을 단다.

이것은《예기》권 22 상대기에서 뽑아온 것[이민수 미상:511]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관[시체를 넣은 관]을 ‘궁실’로 상징하는 문화이다[이 내용은 목관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무령 임금 내외의 머리관[관식] 도상은 단순한 형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 내지는 철학[‘궁궐’, ‘임금의 보살화’ 등]을 내포하는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 무령 임금 내외의 머리관 도상은 중국 남조의 종교문화와 영향뿐만 아니라 북조는 물론 멀리 한나라의 문화를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말하자면 무령 임금 당대의 문화는 우리나라 자연적 인문적 환경에서 자라난 문화가 불교와 유교와 도교 등 외래문화로 더욱 풍부해지고 융성해졌다는 의미이다.

영락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진흥 임금[재위 540~576]의 사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임금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를 받들어, 말년에 이르러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부르며 생애를 마쳤다. 그 비도 그를 본받아 여승이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돌아가니 나라 사람들이 예장으로 모셨다.

이것은《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임금 37년조 기록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기록은《삼국사절요》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임금을 따라 그 비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점과 그 왕자 이름을 ‘금륜’이라 지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의 ‘보살화’를 지향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불교의 커다란 의례인 수계회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령 임금 머리관의 영락은 이미 이야기한 대로 ‘영락경’[보살영락본업경, 보살영락경 등]의 ‘소의경전’을 통하여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임금의 머리관은 127개의 영락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락을 주는 ‘영락갈마’[이는 사미계와 구족계를 관련된 수계회가 있음을 의미한다]가 있을 정도인 것이다.

임금 머리관의 영락은 금과 관련된 품목이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해도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닌데 127개나 된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과와 공덕이 필요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영락은 범어로 keyūra인데 지유나옥을 꿰어서 몸에 다는 것이다[《한국불교대사전 四, 1982:636》]. 인도의 풍속에 귀족의 남녀들이 모두 이것을 만들어 입으며 보살도 이를 단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보살의 수행에 따라 금·은·동·유리·수정 등으로 된 영락을 얻을 수 있고, 이들은 각기 다른 기능과 위력을 지니며 중생을 위해 널리 쓰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금 머리관 영락[왼편]과 영락을 묶은 자리[오른편 점]을 알 수 있다. 영락이 127개이니 따라서 묶은 구멍은 154개가 된다.

‘영락갈마’란 영락과 관련하여 계를 주는 작법[재를 올릴 때 추는 불교의식 춤으로 나비춤·바라춤·법고춤 등이 있다]을 말한다.

수계 즉 계를 준다는 것은 출가 혹은 재가의 수행자에게 부처가 정한 계법을 주는 의식을 말한다. 그런 모임을 수계회라고 한다.

수계회는 가장 큰 불교의식 가운데 하나로, 계에는 소승과 대승의 구별이 있다. 소승의 계율에는 5계, 8계, 10계, 250계 등의 구별이 있고, 대승의 계율에는 10중금계, 48경계, 3취정계 등이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사미계를 일러주는 계사[계율을 이끄는 스승], 계단[수계하거나 설계를 할 때 고대 인도에서 노천에서 하였으므로 따로 단을 세우지 아니한다]에서 계를 받는 이에게 앞으로의 방향을 이끌어줄 갈마사[갈마의 스승), 계를 받는 이를 인도하면서 여러 가지 작법과 규모를 가르쳐주는 교수사 등의 3스승과 구족계를 받을 때 증명하는 7명의 증명사 등 10여 명의 승려[백제 침류왕 때(385) 호승 마라난타가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깨닫게 하였다는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계를 하기 위한 절대적인 승려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계를 받는다. 이를 정리하면, 사미계와 구족계는 3사7증[3사는 계율을 직접 설하는 수계아사리, 계율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교수아사리 그리고 갈마아사리이며, 7증은 수계의식이 원만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증명해주는 법사 7명]을 모시고 위의를 갖추어 설하는 의례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스승이 계를 주는 방식보다는 자기 스스로 부처 앞에 서원vow[기독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에 적용된다.

불교에서는 ‘4홍서원’이 대표적인 것이다. 즉 a 중생 제도하기, b 미혹 끊기, c 경법 배우기, d 완벽한 깨달음 얻기 등]을 세우고 계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소승불교의 수계 의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부분이 갈마사의 역할이다. 계를 받는 이에게 앞으로의 방향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 바로 갈마사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락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에 따라 금·은·동·유리·수정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수행이란 수미계의 경우 5계, 8계, 10계, 250계 등이 있으나 10가지가 가장 많이 적용된다. 사미[남성]와 사미니[여성]가 같은데 그 단계를 ‘근책’[사미의 다른 이름. 비구가 될 희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책려한다는 의미]이라 하는데 이를 ‘근책율의’[사미계]라고 한다.

10가지 계율은 ① 살생을 하지 말라, ② 훔치지 말라, ③ 음행하지 말라,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 술을 마시지 말라, ⑥ 향수나 꽃다발로 바르거나 치장하지 말라, ⑦ 노래와 춤을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 ⑧ 사치스럽고 화려한 자리에 앉거나 눕지 말라, ⑨ 때 아닌 식사를 하지 말라, ⑩ 금이나 은 등의 보물을 받거나 비축하지 말라 등이다.

이와 같이 영락은 사미계의 단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인과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근책’하여 영락을 얻을 수 있고, 이 영락들은 각기 다른 기능과 위력을 지니며 중생을 위해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인 구족계를 7명의 증명사의 증명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구족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족계란 범어로 upasaṃpadā이다. 새로 출가한 사람이 최고 단계의 승려 위계인 비구[팔리어로는 bhikkhu이고, 산스크리트로는 bhikṣu] 또는 비구니[팔리어로 bhikkunῑs]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계율이다.

이 단계는 7중, 곧 7종의 구성원 가운데에서 우바새·우바이[재가자]와 비구·비구니·식차마나·사미·사미니[출가자] 등과 관련이 있다. 남자 출가자는 사미로 시작하여 비구에 이르고 여자 출가자는 사미니로 시작하여 식차마나를 거쳐 비구니에 이른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식을 거쳐야 하는데 그 의식 자체도 출가라고 불린다. 이러한 출가 의식은 지역마다 세부사항에 있어서 다소 다르다.

이와 같이 구족계는 사미[남자]와 사미니[여자]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수계법에 의하면, 구족계를 수지한 자는 곧바로 비구·비구니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승려들이 구족계를 받으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나이는 20세가 넘어야 하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병역에서 면제되어야 하고, 부채가 없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며, 불교에 대해 적어도 몇 가지 기본적인 교육은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새로 출가한 자에게 수여하는 사미계 수계식은 수계자가 이전에 이미 수계한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다.

수계자는 승려의 법복을 입고, ‘삼보Triratna, 즉 부처Buddha, 법Dharma, 승가Sangha에 귀의할 것과 10계[승려가 지켜야 하는 기본적이고 윤리적인 행동규범]를 지킨다’는 말을 따라한다.

그리고 수계자는 스승과 함께 수계사 앞에 서서 해당 계율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이때 수계자는 3번 질문을 받는데, 만일 계율을 받아 승려가 되는 데에 반대 의견이 없으면 이 출가자는 승려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여성 출가자도 이와 유사한 의식을 통하여 비구니가 된다.

이상과 같이 영락은 사미계를 받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 임금 내외가 받은 수계는 이러한 출가승과 달리 재가승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바새[임금]와 우바니[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7중을 고려할 때 한 단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살아서 수계를 받았는지 죽음 직전에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영락경은 요진[384~417]의 축불념[~384~]이 376년에 인도의 경전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축불념은 강족 사람으로 범어와 한문에 정통하여 승가발진·담마난타 등과 함께 역경 사업에 종사했던 스님이다.

건원 20년[384]에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번역하였다. 혼자 번역한 것으로 《보살영락경》《십주단결경》《보살처태경》등 12부 74권이 있다. 그러나 근래 연구에 의하면, 5~6세기경 중국에서 지은 경전이라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했다[온라인 브리테니카 2011. 8. 14].

이제 임금 비[아내]의 머리 부분 서쪽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바리때[청동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순서가 되었다.

출토 당시 이 바리때에는 안에 작은 장도와 은제 숟가락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 바리때는 주둥이 선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고 몸체가 약간 좁아진 형태이며 띠 부분은 평평한 바닥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태로 인하여 ‘전형적인 바리때’로 판정되었다.

바리때는 범어로 Pātra인데, 발다라, 파다라, 파달라, 발달라, 발달란, 다라한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흔히 발이라고 줄여서 쓴다.

중국에서는 한 나라의 주발[완]을 모방하여 바리때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중국고대김루대사전:기명》2001:3]이 있다.

만약 이 설명에 동의한다면, 같이 출토된 ‘청동제완’ 3점도 같이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응기, 응량기라고 옮겨지기도 하였다. 돌아다니면서 이것으로 음식을 구걸하되, 비구가 먹는 분량에 한하기 때문이다.

 

바리때[발]의 그림 왼편은 임금 비, 오른편은 중국의 것[《삼재도회》자료 1607년]

승려가 마을마다 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는 수행을 탁발Piṇḍapāta이라고 한다. ‘걸식’, ‘지발’, ‘봉발’이라고도 한다. 탁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송 나라 때부터이다.

인도에서는 수행자의 일반화된 풍습이 불교에 도입된 것인데, 중국과 우리나라 불교에서, 특히 선종에서는 수행의 일환으로도 간주되었다.

본래의 취지는 수행자의 간소한 생활을 표방하는 동시에 아집과 아만을 버리게 하며, 속인에게는 보시하는 공덕을 쌓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임금 비[아내]와 바리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91년 이호관은《백제무령왕릉》‘청동제 생활 용구’를 취급하면서 ‘용도미상의 단순한 청동제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껴묻거리[부장품, 장신구] 하나하나를 독립된 유물로만 인식하고 전체 유물과 연계시키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이러한 품목 단위로 유물을 보는 고고학적 시선은 전체의 품목을 넣어서 보는 문화풍속학적 시선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영락과 함께 생각할 때, 임금의 비[아내]가 수계를 받은, 재가의 ‘우바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수저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반함의례에서 쓰인 것이고 장도는 탁발을 하면서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것이라 여겨진다.

임금은 우바새로 수계를 받은 직후이므로 ‘영락’을 직접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비[아내]는 임금과 함께 우바니로 수계를 받았으므로 실천적 도구인 ‘바리때’가 더 적절했을 것이다.

참고로 백제에서 불교가 얼마나 생활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가 있다. ‘계수’라는 단어라는 그것이다. 땅에 머리를 대고 절한다는 뜻이다. 《수서》에서 백제 풍속으로 ‘계수’를 기록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여기서 계수는 원래 범어로 Vandana 혹은 Vandi이고 반담· 반제라 음역되었다. 계수례라고도 한다. 계수란 인도에서는 최상의 경례 방법으로 양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양 손바닥을 위로 올리며 상대방의 발을 갖다 댄다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밀교사전》1998:37]

9 가지 경례 가운데 가장 정중한 것으로 달리 정례, 접족작례, 두면예족, 오체투지라고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주례》 춘관 대축에는 ‘9 가지 절 가운데 첫 번째가 계수이다.’라고 하였다.

가공언[?~?]의 소에서는 ‘계수는 땅에 머리가 닿는 것이요, 돈수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계수와 돈수는 모두 머리를 땅에 닿도록 하는 경례법이지만, 계수는 머리가 오래도록 땅에 닿아 있는 것이고 돈수는 머리가 땅에 닿는 즉시 드는 것이다’고 하였다.

계수를 하던 시기가 언제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침류 임금 원년[384]에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 하여튼 얼마나 불교식 절하는 방식이 일상화되었기에 이런 기록이 있을까 한다.

따라서 무령 임금 내외의 재가승 즉 ‘우바색’[영락]과 ‘우바이’[바리때]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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