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수와 ‘가화’의 징조론과 푸른구리 그릇의 다산론

   

무령 임금 무덤에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의 신이한 짐승[신수]과 새[신조], 그리고 나무[신수]들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풍속문화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전체를 다루지 못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3 가지로 한정하기로 한다.

무덤 맨 앞에 놓였던 ‘외뿔 짐승’[석수, 진묘수, 일각수]과 남해 마을에서 동성임금 때 바쳐진 ‘가화’를 통하여 상서로운 징조[상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푸른구리 그릇에 나타난 쌍어 무늬를 통하여 ‘다산’의 의미를 읽어내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실은 이들 3가지 이외에도 ‘신수경’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푸른구리 거울[동경]에 보이는 신선과 4신·3서수 등과 이를 둘러싼 신이한 나무[인동당초문], 검[용봉환두대도] 자루에 새겨진 봉황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임금 비[아내] 머리받침[두침]의 나무새[목조]와 촘촘히 그려진 특이한 동·식물의 그림들, 은 잔[은제연화문탁잔, 동탁은잔] 뚜껑의 사슴·용·새들, 허리띠[과대] 드리개[수식]의 주작과 백호 두꺼비와 도깨비 등 적지 않은 도상들Icons이 있다.

보통 상상의 동·식물이라는 보는 것들이다. 과연 신이한 존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들의 정체를 풀어내지 못하면, 무령 임금 내외와 당대 백제 사람들의 생각과 세계를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령 방격규구신수경에 등장하는 신이한 짐승[신수]은 어떤 도상인가? 거울의 한가운데 인꼭지를 묶는 주변의 12지와 관련시킬 때 28수와 관련된, 동방의 청룡 7별, 남방의 주작 7별, 서방의 백호 7별, 북방의 현무 7별이 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별도로 취급할 계획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고 ‘일각수’를 사례로 논의하기로 한다.  

일각수의 뿔과 전체 모습

지금까지 ‘외뿔 짐승’의 연구 결과는 1) 묘 지킴이와 2) 저승 안내자로 요약된다.

2006년에 권오영[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의 계보와 사상적 배경]과 구중회[무령왕릉의 외뿔 달린 돌짐승]이 그것이다. 권오영은 중국의 ‘진묘수’의 계보를 차근차근 살펴보았고 구중회는 ‘일각수’가 서역[인도India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중국의 거쳐 온 도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이 ‘외뿔 짐승’이 ‘묘 지킴이’나 ‘저승의 안내자’의 의미는 물론이고 근원적 바탕에는 상서로운 징조[상서]를 표상하는 도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느 나라든지 마찬가지이지만, 중국문화는 발상지와 동시에 전파지의 요소가 합쳐져서 이루어져 있다[중국의 한 학자는 무령 임금 관련 학술대회에 와서 ‘중국의 진묘수와 무령 임금 무덤 진묘수’가 ‘합동’[?]이라며 은근히 문화의 예속성을 발표한 바 있다].

알려진 대로 소위 ‘일각수’는 초나라 문화로 알려져 있다. 초나라는 주나라 제후국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전욱[고대 전설상의 임금, 황제의 손자로 하 나라를 세운 우 임금의 할아버지라고 전한다]이 시조이며, 그의 후손인 웅역이 주 나라 성 임금에 분봉되어 단양에 도읍하였다.

춘추시대의 무임금 때[741~690, BC] 임금 호를 스스로 말하였고 문 임금 때[690~677, BC] 영으로 서울을 옮겼다.

장 임금 때[614~591, BC]에 중원의 패자가 되어 ‘전국 7웅’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가 결국 진시황[247~210, BC]의 침략으로 멸망[BC 223]하게 된다.

굴원[약 343~약 277, BC]과 송옥[약 340~278, BC] 등의 문인을 배출하여 ‘초사’[사부 계열의 시의 형식으로 지방 가요를 표현. 대표적인 것은 굴원의 ‘이소’, ‘9가’, ‘천문’ 등과 송옥의 ‘9변’, ‘초혼’ 등이 있다.]로 발전하였다.

아는 것처럼 초사[자수와 형식의 제한이 없다]는 북방문화를 대표하는 시경[중국 최초의 시가집. 총 305편으로 4언이 위주이다]과 쌍벽을 이룬다는 것이 문학사의 통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일은 변방의 초나라 문화인 ‘일각수’가 어떻게 중국 왕실 문화의 핵심과 연결이 되느냐이다.

‘일각수’의 도상은 중국 궁중문화의 의장과 노부[임금이 거둥할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해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무기나 물건]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왜 무덤 지킴이과 저승 안내자가 대궐 문화의 중심부에 들어와 임금을 수행하고 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중국 최초이자 최고의 법전으로 평가를 받는, 당 나라 법전인《당육전》에 당시의 궁중 문화의 하나인 상스러운 징조[상서]가 소개되어 있다.

상서는 네 단계 즉 가장 높은 대서, 상위인 상서, 중위인 중서, 하위인 하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각수’는 가장 높은 단위인 대서에 포함되어 있다.

가장 큰 단계의 징조[대서]는 경성[밝은 별], 경운[경사스러운 구름, 822년(헌덕왕 14)에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연호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황성진인[누런 별 진인], 하정[강의 정], 기린, 봉황, 난새, 비익조, 동심조[마음이 하나인 새], 영락조[즐거움이 영원한 새], 부귀[가멸과 귀함], 길리[좋음과 이로움], 신귀[신이로운 거북], 용, 추우[옳음을 아는 짐승으로 생김새는 호랑이와 같은데 검은 무늬가 있고, 생물을 먹지 않음 ], 백택[흰 못 및 구름을 표현.], 신마[신비스런 말], 용마[뛰어난 말], 택마[못 말], 백마적모[붉은 다팔머리 흰 말], 백마주종[붉은 갈기 흰말] 등과 같은 것이다.

또 주잡[한 바퀴 돎], 각서[뿔 달린 상서], 해치[해태], 비견수[어께가 있는 짐승], 6족수[6 다리 짐승], 자백[신선], 등황[등은 전국시대의 뛰어난 임금], 도도[좋은 말], 백상[흰 코끼리], 1각수[외뿔 짐승], 천록[하늘 사슴], 별봉[자라 관리], 추이[귀 달린 묵은 술 단지], 표견[표범 개], 노견[바깥 개], 현규[검은 홀], 명주[밝은 구슬], 옥영[구슬 뿌리], 산칭만세[만세를 부른 산], 경산[경사로운 산], 산거[산 수레], 상거[상아 수레], 조거[새 수레], 근거[뿌리 수레], 금거[금 수레], 주초[붉은 풀], 굴질[굽은 수레], 명협[달력풀], 평로[곧은 이슬] 삽보[부들, 요 임금 때 부엌에 난 서초], 호주[쑥 기둥], 금우[금 소], 옥마[구슬 말], 옥맹수[구슬 맹수], 옥옹[구슬 항아리], 신정[신이한 솥], 은옹[은 항아리], 단증[붉은 시루], 예천[단술 천], 낭정[물결 우물], 하수청[맑은 강과 물], 강하수5색[5색 강물], 해수불양파[파도가 없는 바다물] 같은 것 등이다.

이상과 같이 ‘일각수’는 대서인 63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나라의 상서로운 일이므로 임금이 거둥할 때 쓰이는 의장과 노부의 깃발로 표현된다.

《당육전》의 상서 부분

 

외뿔인 짐승은 일각수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치기, 천록기 등도 있다. 일각수는 기린[원래 서역에서는 말이나 염소 모양이었으나 중국에 들어오면서 바뀐 것이다]의 일종으로 태평세월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신수이다.

해치기는 해태를 그린 깃발인데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한다. 천록기는 범과 같이 생겼는데 누런빛 바탕에 그려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뿔의 의미이다. 무령 임금 무덤의 짐승 외뿔이 쇠로 만들어진 것도 이를 의미일지로 모른다.

교수이며 소설가인 조동길은 초상이 죽음과 관련된 ‘喪’인데, 소상[2년상]과 대상[3년상]에서 왜 ‘祥’으로 쓰이는지 의문을 품어왔다고 했다.

상례란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이가 조상에 편입[시→구→우→신의 단계]되는 과정이므로 결국 살아있는 이의 입장에서는 상서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령 임금 무덤의 일각수는 백제의 상서로운 징조[상서]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백제 시대의 상서에 대한 문화적 코드인 것이다.

정호섭[2009]은 박사 논문[‘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구려 임금들이 죽어서도 현실생활을 이으려는 믿음[계세신앙]뿐만 아니라 내세에 대한 기원까지를 포함한다는 제안한 바 있다.

구리 거울[동경]의 인물과 상서로운 짐승[서수]들

 참고로 뿔이 2개인 깃발은 벽사도기[천록과 같은 모양새]가 있고, 3개인 깃발은 삼각수기[머리가 백택과 같으나 녹색의 털과 푸른 바탕으로 뿔이 3이며, 흰 배에 녹색의 꼬리이다.

이 삼각수기는 조선시대에서도 여전히 건재하였다.]가 있다. 각단기도 모양새가 돼지와 같으나 코 위에 뿔이 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하루에 18,000리를 간다고 한다.

서양에서 뿔 달린 짐승의 도상은 유니콘[라틴어Unicomus, 영어 Unicorn 인도어 브리샤쉬바파티]이다. 온라인 브리테니커[http://premium.britannica.co.kr 2011. 8. 27]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유니콘은 이마에 뿔이 하나 달린 말이나 새끼 염소와 비슷하게 생겼다.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회화예술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인도India의 고대신화에도 등장하여, 점차 동남아시아와 중국에까지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BC 27세기경에 온화한 기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유니콘이 초나라를 거쳐 중국에 들어오면서 기린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문화는 ‘원생산지’[소위 세계문화 발상지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외부[서역 즉 인도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등]을 받아들인 ‘재생산지’였던 것이다.

그리스 문학에서 외뿔 짐승(그리스 Monokerōs)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크테시아스Ctesias[BC 400경]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유니콘은 몸이 희고 머리가 자줏빛이며 푸른 눈이다. 이마에는 50㎝ 정도의 끝은 붉고 중간이 검고 밑 부분이 흰 뿔이 달려 있다. 크기가 말만한 인도 야생 당나귀처럼 생긴 동물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뿔에서 나오는 피를 마시는 사람은 위통과 간질을 치료하고 독에서 해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동물은 발이 무척 빨라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크테시아스가 말한 동물은 실제로는 인도의 코뿔소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유니콘[자료는 온라인 브리테니커]

외뿔 짐승은《구약성서》와도 관련이 있다. 성서의 시구에는 강하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레엠이라는 동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레엠은 '유니콘'이나 '코뿔소'로 번역되는데 근대 번역에서는 대부분 히브리어 레엠의 정확한 의미인 '들소'(오로크)로 옮겨진다.

성서에 나오는 유니콘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비유적으로 해석되었으며, 인간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들어 올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자란 그리스도와 자주 관련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처녀만이 유니콘을 길들일 수 있다고 한다.

구중회[2006]는 ‘무령왕릉의 외뿔 달린 돌짐승 연구’에서 그 도상을 인도의 브리샤쉬바파티와 Unicon, Apis, Anu 등과 연결시켜 제시한 바 있다[이 논문은 독립된 별도의 항목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논의한 대로 무령 임금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소위 ‘상상’이 붙은 도상들도 대부분 상스러운 징조[상서]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당육전》의 상위 단계, 중위 단계, 하위 단계 상스러운 징조들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상위 단계의 징조[상서]는 삼각수[3뿔 짐승], 백랑[흰 이리], 적비[붉은 큰 곰], 적웅[붉은 곰], 적교[붉은 하루강아지], 적토[붉은 토끼], 구미호[9꼬리 여우], 백호[흰 여우], 현호[검은 여우], 백록[흰 사슴], 백장[흰 노루], 백시[흰 외뿔 들소], 현학[검은 학], 적오[붉은 까마귀], 청오[푸른 까마귀], 삼족오[3발 까마귀], 적연[붉은 제비], 적작[붉은 참새], 비목어[비목 고기], 감로[단 이슬], 묘생상목[사당에 생긴 상서로운 나무], 복초[복풀], 예초[예절풀], 평실[부평초 열매], 대패[큰 조개, 화폐임], 백옥적문[붉은 글씨가 쓰인 흰 옥], 자옥[자주빛 옥], 옥양[옥 염소], 옥귀[옥 거북], 옥모[소 울음소리를 내는 옥], 옥영[옥 꽃부리], 옥황[서옥], 황은[누런 은], 금등[금 등나무], 산호구[산호 낫], 해계서[뛰는 닭물소 새긴 옥], 대통벽[머리가 뚫린 벽옥], 옥유리[옥 유리], 계취벽[닭모양 벽옥]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중간 단계의 징조[중서]는 백구[흰 비들기], 백오[흰 까마귀], 창오[푸른 까마귀], 백택[흰 못], 백치[흰 꿩], 치백수[흰 머리 꿩], 취조[물총새], 황곡[누런 고니], 소조생대조[큰 새를 낳은 작은 새], 주안[붉은 기러기], 5색안[5색깔 기러기], 백작[흰 참새], 적호[붉은 여우], 황비[누런 큰 곰], 청연[푸른 제비], 현맥[검은 담비], 적표[붉은 표범], 백토[흰 토끼], 구진기수[9가지 기이한 짐승], 충황출곡[계곡에서 나온 충황], 택곡생백옥[백옥을 낳은 태곡], 낭간경, 벽석윤색[윤색된 푸른 돌], 지출주[땅속에 나온 구슬], 능출흑단[무덤에서 나온 검흔 단사], 위수[위엄 있는 수레 손잡이 줄], 연희[기쁨을 끌어들임], 복정[복 우물], 자탈상생[탄생이 벗어난 신선], 빈연활달[활달한 손님], 선모[좋은 띳집], 초목장생[오래 사는 풀과 나무]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하위 단계의 징조[하서]는 거비[찰기장과 검은 기장], 가화[형태가 특이한 벼], 지초[지초 풀], 화평[꽃핀 개구리밥], 인삼생[천연 인삼], 죽실만[대나무 열매], 椒桂합생[서로 붙은 산초와 계수나무], 목련리[서로 붙은 나무], 가목[아름다운 나무], 대각우록[큰뿔 암사슴], 박록[말과 비슷하며 범을 잡아먹는 맹수 사슴], 신작[신이한 참새], 관작[볏 달린 참새], 흑치[검은 꿩]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당 나라의 상서문화를 정리하면, 흰 색[白]이 가장 상위에 있고 다음이 붉은 색[赤]이고 검은 색[玄]과 푸른 색[蒼] 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부터 진인[신선], 새, 말, 거북, 사슴, 수레[車], 식물 등인데 식물이 가장 하위 단계의 상스러운 존재가 된다.

후한[동한] 시대의 벅돌 무덤의 상서 그림

상서로운 징조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통치자[성인]나 백성들의 마음과 행위[공덕]에 대하여 하늘과 땅이 ‘감응’한 결과인 것이다. 나라가 ‘태평성대하다’는 다른 표상이다.

따라서 상서로운 좋은 징조[상서]가 나타나면, 그 종류와 등급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감응’의 정도내지는 규모 등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당육전》의 경우, 총 148가지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좋은 징조[대서]가 63가지, 상위 단계의 징조[상서]가 39가지, 중간 단계의 징조[중서]가 32가지, 하위 단계의 징조[하서]가 14 가지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징조[대서]가 가장 많고 가장 낮은 단계의 징조[하서]가 가장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장 높은 단계의 징조가 이하 단계와 비교할 때 거의 절반이 되는 것은 좋은 징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원이자 염원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징조[대서]가 출현하면 즉각 표[마음에 품은 생각을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아뢰고 문ㆍ무 관리들은 대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축하의 의례를 올린다.

그러나 나머지 세 단계의 징조는 모두 연말에 원외랑이 표를 갖추어 아뢰면 담당 관리가 종묘[임금 선조들을 모신 곳]에 알리고 관리들도 대궐에 나가 축하를 올린다.

왕충[27~?]《논형》‘선한편’에 의하면 상서에 감사하는 의미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감로 원년[53]에 황룡이 신풍에 나타나 예천이 흘렀다. 거기에는 봉황이 5~6마리 나타난다든지 새들이 일시에 혹은 이상한 새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기린, 신작[신이한 참새], 황룡, 난조[난새, 황제 수레를 끄는 말의 방울], 감로, 예천 등이 나타나 후토와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무령 임금 아내의 머리받침과 여러 도상들

상서로 바친 새와 짐승들은 산 채로 잡은 것은 각각 그 습성에 따라 산과 들에 놓아준다.

잡을 수 없는 것이 있거나 또는 서로 합쳐진 나무[목연리]이 같은 것은 해당 지역에서 조사하여 허위가 아니라면 그림을 첨부하여 올린다.

반대로 좋지 못한 징조[재이 대표적인 것이 일식]가 나타나면 5가지 북과 5가지의 군사를 준비하고 임금은 나라 일을 보지 않으며 모든 관리들은 소복[흰 옷] 차림으로 일상 업무를 보지 않고 기다렸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북을 쳐서 알리게 된다.

상서로운 징조는 경우에 따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소위 ‘연호’라는 것이다. 연호는 많은 숫자가 ‘상서’와 관련되어 있다. 연호는 임금이 자신의 치세에 붙이는 명칭이다. 대년호 또는 원호라고도 한다.

처음 사용된 시기는 서한[BC 206~ AD5, 전한] 나라 무제 때[141~87, BC]인 기원전 140년이고 이름은 ‘건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년을 고쳐 ‘중원년’, ‘후원년’ 등으로 사용했다.

연호가 정식으로 사용되면서 상서의 출현, 정치적 이상, 종교적 바람 등 여러 이유로 새 연호를 제정하였다. 이렇게 연호를 고치는 것을 개원이라 한다.

예를 들면 한 무제는 원수 6년[B.C. 116] 여름에 분수 곁에서 보정[보배로운 3발이 달린 솥]을 얻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원정’으로 바꿨다.

옛날 솥[정]은 흔히 세 발이 달린 것인데, 우 임금이 천하를 9 주로 나누고 그 주를 상징하는 징표로 솥을 아홉 개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부터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원래 연호는 한 임금 대에 여러 연호가 사용했으나, 명나라[1368~1644] 이후에는 1연호[1세1호]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5·16군사정변 후인 1961년부터 ‘시력기원’을 연호로 사용[법률 제775호]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단군기원’을 서력기원과 같이 사용[법률 제4호]한 바 있다.

이 1948년은 ‘단기’로 4281년이었는데, 이는《삼국유사》 단군신화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을 BC 2333년이라는 데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상서문화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의 하나이다. 백제에서도 이와 비슷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화’를 사례로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24대 동성 임금[재위 479~500] 시대 ‘가화’[형태가 특이한 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가화’는 상서로운 징조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풍년이 들고 남쪽 바다 마을에서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것이다.

11년[489]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가을에 나라 남쪽의 바다마을 사람들이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었다.

우리나라는 농업 국가이다. 벼에 대한 인식도는 다른 곡식과 비교하여 관심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조선후기에서 구한말까지 여러 차례 수정하고 보완된 《증보문헌비고》[권11 상위고 11, 물이 3, 곡이]에는 우리나라 역대의 ‘가화’와 관련하여 것들을 정리한 기록이 있다.

◆ 신라
○ 파사왕 5년[84] 5월에 남신현에 보리가 두 갈래가 하나로 붙었다.
○ 벌휴왕 3년[186] 7월에 남신현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조분왕 13년[242] 가을에 고타군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유례왕 11년[294] 7월에 다사군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눌지왕 36년[452] 7월에 대산군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효소왕 6년[697] 7월에 완산주에서 가화를 바쳤는데, 이랑은 다른 데 이삭을 함께 한 것이었다.
○ 혜공왕 3년[767] 9월에 김포에서는 볍씨가 모두 쌀로 되었다.
○ 헌강왕 6년[880] 8월에 웅천주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고구려
○ 양원왕 4년[548] 9월에 환도에서 가화를 바치었다.

◆ 백제
○ 동성왕 11년[489] 가을에 나라 남쪽의 바닷 마을 사람들이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었다.

이상이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가화’에 대한 기록이다. 시기로는 5월[음력]부터 9[음력]까지 농사철과 관련이 있고 지역적으로는 전 국토가 그 범주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상서로운 징조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 접어들면서 임금의 ‘가화’에 대한 믿음이 다소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성종 11년[992] 9월에 등주에서 벼 이삭의 길이가 7치 되는 것과 기장 이삭의 길이가 1자 4치 되는 것을 바치었다[여러 신하들이 하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숙종 3년[1098] 10월에 영광군 및 관내의 군현에서 벼가 한 종자로서 두 번 결실하였다.
○ 예종 11년[1116] 6월 병자에 상주에서 상서로운 보리[서맥]를 바쳤는데, 줄기 하나에 이삭이 넷이었다. 12년[1117] 6월 병인에 상주에서 또 상서로운 보리를 바쳤는데, 갈래가 둘이고 이삭이 셋이었다.
○ 공민왕 15년[1366] 10월 임자에 전라도 순문사 김유가 벼의 마디가 10이 되는 것을 바치었다.
○ 우왕 9년[1383] 5월 갑자에 진주에서 보리가 줄기 하나에 이삭 하나로 갈래가 셋, 넷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서면서 나라에서 이러한 가화나 서맥을 바치지 않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만큼 인지와 사고의 발달이 된 수준에서 ‘상서’가 역동성을 잃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상서문화는 여전히 조선이 망할 때가지 그대로 유지된다.

은잔의 받침 도상들
○ 세종 19년[1437] 여름에 경기 관찰사 김맹성[1437~1487]이 보리 이삭이 4 갈래로 된 것을 바치었는데, 임금이 이것을 물리쳤다[이내 여러 도에 두루 유시하여 하례하지 말게 하였다].
○ 세조 2년[1456] 9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극배[1422~1495]가 가화를 바치니, 세 이삭, 두 이삭이었는데, 이것을 물리쳤다.
○ 선조 31년[1598] 4월에 제천현에서 상서로운 보리가 났는데, 5갈래 인 것이 3포기이고, 4갈래인 것이 5포기이고, 3갈래인 것이 6포기이며, 2갈래인 것은 매우 많았다.
○ 인조 2년[1624]에 여주에서 보리 이삭이 2갈래인 것이 있었다. 9년[1631] 6월에 하동현에서는 올벼[조도]의 묵은 뿌리에서 줄기와 잎이 다시 나와서 이삭이 팼다.
○ 숙종 17년[1691] 여름에 경상도 관찰사 이담명[1646~1701]이 보리 이삭이 4, 5갈래인 것을 바치었는데, 이를 물리쳤다.
○ 영조 25년[1749] 5월에 청주에서 보리가 두 이삭, 혹은 세 이삭 된 것이 있었으므로 관찰사 이일제[?~?]가 상자[궤]에 담아서 진상하였는데, 이를 물리쳤다.
○ 정조 14년[1790] 12월에 임금이 경모궁에 거둥하였다가 돌아오는데, 한 백성이 조 한 줄기에 이삭이 36이 되는 것을 가지고 어가 앞에 바치니, 백성의 버릇이 해괴하므로 병조에 명하여 엄하게 다스리게 하였다.
○ 고종 2년[1865] 11월에 전라도[호좌]에서 가화를 바쳤는데, 한 줄기에 이삭이 16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는 벼보다는 보리나 조[수수]에 대한 이상한 것을 보고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 돌연변이라고도 할 것이다.

가화에 대한 내용은 땅이름[지명]에도 등장한다. 황해도 지역인데 원래 고구려의 웅한이→고려 영녕현→조선태조 5년[1396] 가화현으로 변화하고 있다.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가화’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땅이름이라 여겨진다. 태종 시기에는 이미 상서 개념이 약화되면서 8년[1408]에 현을 폐지하게 된다.

‘가화’라는 땅이름은 많았을 것이다. 나라에 가화를 바칠 정도이므로 그 지역 주민들은 ‘상서로운 땅’이라는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흔적의 하나가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면 지역의 영유현이 가화현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상서문화가 쇠미해지면서 차차 땅이름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가화’에 대한 기록은 적어도 왕충[27~?]《논형》‘선한편’에 나타난다. 효명 시기에 봉황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기린, 감로, 예천, 신작[신이한 참새], 백치[흰 꿩], 자지[자주빛 상스러운 풀] 등과 함께 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문진보》‘희우정기’에도 당숙의 땅에서 진기한 곡물이 나와 이를 성왕에게 바쳤는데 주공이 이를 ‘가화편’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성왕은 그 곡물의 이삭 끝에 열매가 더부룩하게 나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천하가 화동할 조짐이라며 크게 기뻐하여 주공에게 글을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이 글은 본래《서경》에 들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푸른구리 그릇에 새겨진 쌍어 무늬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이다.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를 하려고 한다.

첫째는 고사[옛날의 사례라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경전에 의하는 경우가 많아 ‘소의경전’이라고 한다]에 의하여 문화적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위 ‘남조 영향’이란 말의 해석이다.

푸른구리 그릇과 안 바닥의 도상

널길[연도]과 목관 받침대 주위에서 5개의 구리잔이 출토되었다. 발굴 당시에는 푸른 녹이 슬어 있어서 겨우 음각의 가는 선[1선]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후에 과학적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잔의 밖과 안[바닥]에 무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쌍어를 중심으로 약 30개의 활짝 핀 연꽃, 연 열매, 연꽃봉오리, 연 줄기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쌍어 무늬는 남조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금속 용기의 안쪽에 쌍어를 표현한 것은 남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 그릇 역시 양 나라에서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이 쌍어 무늬가 중국 구리거울[동경]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 양 나라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였다[이호관 《백제무령왕릉》1991:283]. 그런데 쌍어 무늬가 남조만의 영향일까?

중국 동북 지방의 선비족이나, 남쪽의 남조 지역에서 모두 청동 대야의 안쪽 바닥을 장식한 무늬로 즐겨 사용된다. 무령왕릉의 것은 중국 남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권오영 2005:189]

이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이 ‘중국 동북 지방의 선비족’이다. 이들이 바로 북위의 건립자 선비족 탁발씨이기 때문이다.

북위는 탁발규[재위 386~409, 도무제, 태조]가 386년에 대국을 다시 세운 나라이다. 조위[220~265]에 대하여 북위 또는 후위라고 한 것이다. 398년 평성에 도읍을 옮기고 칭제하고 439년 북방을 통일하였다.

493년 효문제 임금이 낙양으로 천도한 뒤 534년 동·서위로 나뉠 때까지 149년간 누렸다. 말하자면 쌍어 무늬는 중국 남북조에 걸친 문화인 셈이다.

쌍어에 대한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한쌍의 물고기, 2) 한 쌍의 물고기 무늬를 넣은 중국 청자의 한 가지 3) 먼 곳에서 보내온 두 마리 잉어의 뱃속에서 편지가 나왔다는 옛 고사에서 ‘편지’를 이르는 말.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2)와 3)의 풀이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문화가 바로 한 나라가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쌍어무늬는 원래 한 나라 시대에 유행한 세수 그릇에 애용되는 도상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초평쌍어세’였다. 초평은 후한의 헌제 임금 때의 연호로 190년[경오]부터 193년[계유]까지 사용했다. 이 세수 그릇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태세가 갑술인데 초평 5년 오사가 ‘의자손’[세수 그릇]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초평 5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먼 지방에서 연호가 바뀐 줄을 모르고 옛날 연호를 사용하였다.

전한 시절 오봉이 4년[BC 54]에 끝났는데 5년이라고 쓴 것과 같다. 뒤에 이러한 발문을 붙이고 있다[《중국고대기물대사전:기명》 2000:59].

‘초평쌍어세’의 명문과 조선의 쌍어무늬

 


 

 

 

 

쌍어무늬는 남북조의 직접적인 영향이지만 근원이 한 나라에 있고 그 기능이 많은 자손[의자손]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천이 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불화[탱화]에서 ‘소의경전’[그림이 경전의 의거한다는 뜻]이라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가 처한 자연과 역사에서 자연발생한 도상 즉 해와 달, 동심원, 별자리, 넝쿨무늬 등과 불교[정토신앙]적 도상 즉 연화문, 연화화생, 불 · 보살상과 비천[하늘을 날아다님] 등, 그리고 도교적 도상 즉 신선, 상서금수,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려면 그 배경 문화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서문화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기본 요건이라 할 것이다.

결론을 내리면, 무령 임금 무덤의 유물들은 발원지이자 전파지인 중국을 통하여 수혈하면서 스스로 발명한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의 모듬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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