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기위해 뽁뽁이를 붙이고, 여기저기 바람구멍을 찾아 막으며, 겨울 채비를 꼼꼼히 했습니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오고, 무척 춥다는 예보에 경기까지 많이 안 좋다는 뉴스가 나오니 콧노래를 부를 분위기는 아닌 듯합니다.

늘 제일 춥고, 제일 어렵고, 몇 십 년 만에 오는 어려움을 전례행사처럼 되풀이하는 이런 공허한 말들이 이 겨울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는 이런 상황들을 어찌 표현했을지, 어찌 이겨냈을 지를 생각해보며 몸의 온도를 조절해보려 합니다.

어려웠던 시절. 이때쯤이면 따뜻한 물이 아니라, 그냥 미지근만한 물 반양동이만 있어도 머리를 감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드라이기가 없었으니 머리를 대충 말리고, 교동에서부터 금학동까지 학교를 다녔고, 등교하는 동안 머리에서는 발걸음에 맞춰 “덜그럭 덜그럭”하는 소리가 나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기를 잘 몰랐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지요. 내복인들 충분했었을 까요? 이런 기억은 마치 소중한 낡은 앨범을 조심스레 넘겨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돈만 내면 얼마든지 쉽게 다양하고 화려한 떡들을 접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설이나 돼야 가래떡, 떡국 떡을 먹을 수 있었지요.

그 시절에는 어머님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쌀을 담구고 불린 다음,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잘 빼고, 큰 대야에 소쿠리를 올려 어머니 머리, 때로는 아버지의 짐 운반용 자전거로 옮겼습니다.

방앗간에 도착 후 그냥 쉽게 떡을 뺄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지요. 그 때 새재, 시어골, 하고개, 웅진동, 교동 근방에는 방앗간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설이 다가오기 전 대략 일주일 전부터 방앗간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집이 가래떡을 했고, 방앗간의 기계도 하나 뿐 이다보니 북새통을 이뤄 방앗간은 꼼짝없는 기다림의 현장이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앗간에 다양한 대야가 줄을 서 있는 모양이 지금 생각해 봐도 어느 설치미술보다 근사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에서 떡쌀을 찌느라 연기가 펄펄 나고, 방앗간 주인아주머니와 아들이 떡을 잘라 물속에 떨어뜨리면 어머니는 차곡차곡 대야에 옮겨 담으셨습니다. 어린 저는 어머니 곁에서 들뜬 마음으로 마냥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어머님은 마지막 남은 한 가래라도 빠질세라 손놀림을 멈추지 않으셨고, 어머니께서 머리에 대야를 이고 집으로 오셔서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흰 가래떡을 썰어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주셨습니다.

저희 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가래떡을 꿀 대신 왜간장에 찍어먹었었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그 맛은 아마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그런 과정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불편함, 어려움이 그리움이 되어버린 그 설날의 김이 모락모락 나고, 뜨끈하던 하얀 가래떡이지금도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저는 이것을 34번째 동작치유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오늘의 생각해보기

유년시절 하얀 가래떡의 이야기처럼 나만의 가장 따듯했던 설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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