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기(花器)의 폭에높이의 두 배꽃을 꽂을 때1주지로 가장 적당한 길이다 화기에 꽂히는 가지처럼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삶의 길이잴 수 있을까신이 허용한 걸맞은 삶은자신이 가진 폭과 길이를곱까지는 늘려 보는 일 일지도그러나 우리는허용치를 넘거나 미치지 못한다내 안의 고요를 키우지 못해소음에 귀 기울이는 우愚.
저것을 어째지 멋대로 늘어진자유로운 몸짓한참을 고민하다돌돌 감아둥근 틀을 만들어 버리는나의 속셈은 한 잔 술을 걸친 듯저 가지처럼 나도 휘어지고 싶어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늘어진 가락으로 목청 뽑고 싶어흐물흐물 허튼 수작 부려 보고 싶어 그런데 이녁 맘이 이녁 맘대로안 되는시샘일 걸아마.
밑둥을 정리하고 꽂은느티나무 가지에서툭툭 펴지는 어린잎들 손톱만한 잎 하나 따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정교하게 짜 간저 작은 실금이고단한 삶 잠시 쉬어 갈정자 그늘 되는데 마음자리 하나가리지 못하는종횡무진 얽힌내 마음의 실금들 세상에 빛도 되지 못할이 미세한 실금들로밤을 뒤척이는내 옹졸한 삶도‘탁탁 쳐내고정리하여 다시 꽂으면이 세상에 그늘 하나 될까.
네가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백색의 배냇저고리가 입혀졌고한 남자를 만난 출발점에서너는 흰 백합꽃을 들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지금나는 너의 관 위에흰장미를 꽂는다.나폴거리는 아스파라가스의 잎 위로하얀 장미를 수놓듯 꽂는 내 손이문득 멈춘다 우리는 출발점마다에서 왜 흰색을 취할까우리 생이 가야 할 길이 결국 순백의 길이라면이제 마흔, 너는 그 길을무덤에서 채워야 되는 거고우리는 바깥 무덤에서채워야 하나 지긋이 굽어보는 성모상 아래, 관 위로살아지은 모든 죄 사해주시는십자가 붉은 우단이 내려지고너의 육신은 천천히 걸어 나간다 내 손을
필 것 같지 않은 꽃봉오리선택 받기엔 부족한 잎쳐내야 할 가지 소리 없는 눈들이나를 바라본다다 끌어안을 수도버릴 수도 없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욕심인지버리는 것이 오만인지지식이 가져다주는불필요한 진실.
거의 완성된 작품 앞에 앉아마지막 한 송이 꽃을제 자리 아닌 엉뚱한 곳에 놓고 싶다 틀 속에 갇힌 세상의 문을홀연히 열고 나가고 싶은 유혹그 길을 따르고 싶은마지막 한 송이가조화를 흩트려버릴화기 안의 질서 꽂힐 자리선연히 눈에 보여그곳에 꽂고 마는 내 안의 슬픈 질서.
다른 잎이랑꽂아 둔 백합이하룻밤 사이 피어 환하다 밑줄기 자른 곳에물들이 다투어 올라그리 빨리 필 줄이야 잘린 상처 안고그들이 서 있을 곳은가시밭길 침봉 그곳에서도환하게 필 줄 아는긍정의 저 힘그대.
평화로운 풍경되어거실 한 켠에 앉아 있는꽃, 눈에 들면 누군가를 용서 못해들 끊는 분노내 탓이지 못해입 가득 고여 오는 변명모난 생각 주둥이가사르르 풀어져 한 나절 건너기가수월해진다.
꽂아 둔 꽃이활짝 피어 절정에 이르렀을 때뽑는다 진다는 것은단순히 꽃잎만 지는 게 아니다줄기 살들이 문드러져냄새를 피우는아름다운 기억마저 잃는 일이다 내가 시들기 전 꽃을 뽑듯누가 내 생의 절정에서“그만” 이라고 말해 주면 좋겠다.
꽃들이 살다 온세상을 자른다 한 켜 한 켜 넘을 때마다생겼을 마디마디를 잘라뽀족한 *침봉을 가린다 한때는, 둥근 화기(花器)처럼나도 둥글어날카롭고 강한 것이내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그리 멀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날선 마음을 가리기엔잎이 무성한 여름이 제격이다 헐벗기 전모든 모난 것들을 위하여이 여름에후덕하게 살아 둘 일이다.*침봉: 꽃을 고정하기 위해 쓰는 도구.
포장길이 생겼다울퉁불퉁했던 길속에 묻힌수많은 발자국들이 지워졌다 돌아보면길 아닌 길은 없는데길 위에 서서 길을 갈망했다 눈 비 올 때마다패인 흔적을 남기던질척대는 울음은모두 추억이 되어가벼워지고 오늘은발자국도 남지 않는 포장된길을 간다.
마음이 산란한 날은성을 오른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면땀땀이 쌓아 올린 돌에 맺힌 땀방울묵은 향들이 건너와 내 어깨에 힘을 뺀다 지나간 시간의 궤적을 따라 오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왕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나라 걱정에 밤을 지새며 뒤척이는 소리잠시 멈춰, 따스한 눈길 보낸다 옛 사람들이 두루마기 입고 지나거나 앉았을숲과 하나 된 누각엔오늘은 반바지 차림의 아가씨가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늘 거기에 있어 시간을 넘을 수 있는 곳 봄이면 아름드리 나무들은 빨리 꽃을 털어작은 나무들을 꽃 피우고펑펑 내리는 눈은 먼저 받는다모두가 풍경
잘 있다는 말그냥 잘 있으려니 지나치다가족욕을 하려고 목욕탕에 앉아뜨거운 물 한 컵을 마시면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은땀방울이 아니라 눈물이다 운전 중이라모임중이라내 감상적이 말에너 더 서러워질까 봐무심하게 받았던 전화 사방은 산이고꼭대기 달랑 초소하나개미처럼 살고 있을 아들아,수화기 놓고 초소로 돌아가는군복의 적막한 너 뒷모습가슴 아린다 정말 잘 있나족욕을 하면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온몸이 눈물샘이 되어눈물이 난다.
댐 수몰지구 누구의 앞마당이었을까물에 잠겨 끝만 남은 가지 끝엔말라 버린 열매하나 달려있다 한때는 마당가 화덕 솥에감자 얹어 호박잎 쪄내며지어내는 아침밥에매캐한 연기 온몸으로 받아도한겨울이웃까지 불러 아랫목 간식될 때칼바람도 훈훈했던 발길 떼지 못했던 주인목을 빼고 기다리는 저 충정 물새 한 마리가슴에 꼭 담고 간다.
지상으로 내려 온말씀의 하느님 몸의 반은바람의 길 따라가며질기게 생각한다 다시 꽃 피고 흔들릴여름, 가을은 생각의 꽃등불로더욱 환해질 것이다.
늦가을 바람은 몸을 뚫고길을 만든다 몸 따라 길이 흔들린다 가녀린 몸 사이사이별빛 서둘러 파고 들고 드디어 환해지는 몸알품을 수 있겠다.
유리병에 소복이 꽂은흰 카네이션 속에드문드문 붉은 카네이션 주체 할 수 없는 열정 안은진분홍 카네이션은남편 기다리다 지친 어머님이기방 찾던 날다홍치마 기녀의 장구에훨훨 춤을 추고 있더라는아버님 생각난다 지아비를 그림에기방에 빼앗긴어머님의 삶보다나는 왜 덩실덩실 춤추는아버님의 삶이 목에 걸릴까 내리 아들 둘 낳고도딸 낳은 날시아버지 헛기침에 치마 추슬러부엌으로 나왔다는어머님 제삿날에/흰 카네이션 진분홍 카네이션당신들의 삶이내 속에서 둥개둥개춤을 춘다.
공주의 하늘이시여!이번에는 이런 사람 꼭 보내주시옵소서성황당 산신나무 아래수술비 없어 내 새끼 죽는다고저녁 산 깨지도록땅을 치며 통곡하는젊은 가장의 하얗게 죽어가는 손안에따뜻한 눈물 한 방울 쥐어 줄 수 있는이런 사람어둠이 가시지 않은 신 새벽허겁지겁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등 굽은 노인 앞에 두 무릎 꿇고 앉아제가 잘못하였다고정말로 제가 죽을죄를 지었다고두 손 깨지도록 쥐고 용서를 비는이런 사람겨울비 세차게 뿌려대는 시장터깨진 스레트 처마아래비료포대 좌판 깔고시린 손 발 비비고 동동거리며휭한 빈 골목 지키는 노인에게자판기 커피한
버려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독기가 없다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순 하디 순한 것들도버려지는 순간 독기를 품는 법뿌리 뽑힌 풀뿌리를 보면끝까지 흙을 움켜쥐고몸을 세우는 저 뜨거움을버림받는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차라리 왜 버리느냐고한 번쯤 속 시원히 따져 물을 일이다날 세운 혈기로다시 일어나 세상을 활보할 일이다누구나 수없이 버리고버려지고 버림당했다내가 버린 저 하수(下水)마저도죽을힘으로 강을 헤엄쳐간다독기 어린 눈으로 새 숨길을 찾아 나선다
새벽 4시 눈 비비는 나를 질질 끌고동네 저수지 방향으로 그가 경운기를 몬다. 는개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뿌옇다. 털털거릴 때마다 내 몸이 공중부양을 한다. 보이지 않는 길, 가도 가도 오리무중인데그는 자꾸 묻는다. 멋있지? 환상적이지? 동서남북, 세상은 온통 는개에 갇혀 있는데눈썹과 속눈썹에 작은 물방울을 매달고 그의 입술, 는개의 바다 위 둥둥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