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이웃 선생님 댁에서 대추를 얻어 왔다. 색이 참 곱고 먹어보니 아삭아삭하며 아주 맛이 좋다. 내가 어릴 적 따먹던 대추보다 훨씬 크고 맛이 좋아 손이 계속 간다.
대추는 한자로 조(棗)라고 쓰는데 자(朿-가시자)자가 아래위로 붙어있는 형태다. 조(棗)는 가시가 많다는 뜻이지만, 열매가 이렇게 다닥다닥 맺는다는 의미다. 예로부터 대추는 다산을 상징하여 집 근처에 대추나무를 많이 심었다.
어릴 적 밭둑에 아주 오래된 대추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 되어 대추가 붉게 익어가면 아버지가 장대로 가지를 후려쳐서 대추를 떨어뜨렸다. 아버지의 장대질이 멈추면 온 식구가 소쿠리를 들고 가 대추를 주워 분류해 멍석에 널어 말렸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대추나무는 이렇게 후려 때려야 상처 난 가지에서 내년에 새싹이 돋고 그곳에 열매가 매달린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감을 딸 때는 가지를 꼭 꺾어주어야 내년에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른들의 생활 속 지혜가 놀랍다.
‘대추를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 의하면 대추를 먹으면 배고픔을 줄이고 오래 꼭꼭 씹으면 곡식을 대신한다고 했다. 실제 대추에는 영양소가 풍부하다. 비타민, 미네랄, 생리 활성화 물질의 집약체다.
특히 비타민C가 아주 풍부하다. 그러니 대추를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다는 말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제사상에 진설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홍동백서(紅東白西)’다. 신위를 기준으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제사상 5열 제일 동쪽에 올라가는 것이 바로 대추다. 대추만큼 제사상에서 붉은 것이 없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기에 임금을, 그다음 밤은 셋 쪽이니 삼정승을, 감은 씨가 여섯이니 육판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내려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음양오행에 의한 것이며, 보약으로 먹는 대추는 뼈에 좋고, 밤은 머리에 좋으며, 배는 배(腹)에 좋고, 감은 피부에 좋아 자주 먹어야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추가 보약제로 가장 많이 쓰인다.
‘대추나무 방망이 같다.’라는 속담은 대추나무의 속성을 잘 말해 준다. “저 사람 작아도 대추나무 방망이 같아”라고 하면 체격은 작아도 아주 건강하고 힘이 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조선 후기 서유구 선생이 지은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대추나무는 본성이 단단함으로 싹트는 시기도 아주 늦다. 3년 동안 싹이 나오지 않아 죽었는지 알았지만, 3년 뒤에 싹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재질도 무겁고 단단해서 예로부터 방망이나 도장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요즘과 달리 옛날 재래종 대추나무는 키가 컸기 때문에 아주 드물지만, 벼락을 맞는 경우가 있었다. 대추나무가 벼락을 맞으면 도끼나 톱으로 쉽게 빠개거나 자를 수가 없었다.
과학적으로 나무가 벼락을 맞으면 순간적으로 수분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아주 단단해진다고 한다. 민속신앙에서는 벼락 맞은 벽조목(霹棗木)은 다른 나무에 비해 양기가 강하고 신통한 효험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벽조목으로 도장이나 염주를 만들었다.
햇빛에 아주 붉게 말린 대추는 여러모로 쓰임새가 귀하다. 특히 겨울철에 차를 끓여 마시면 감기 예방에도 좋고 뼈도 튼튼해진다고 한다. 밥을 지을 때 대추를 썰어 넣고 지은 대추 밥은 특유의 단맛이 가미되어 밥맛이 아주 좋다.
건강 차원에서 가을 햇빛을 가득 머금은 대추를 먹는 것이 겨울을 나는 생활의 지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