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훈조건축사/건축학박사 (주)유림피엔씨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02-576-4248
우리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이 있다. 현금을 보관하는 은행이나, 음식을 저장하는 냉장고가 없었던 과거에 ‘곳간’은 현재의 의미와는 분명 다른 확실한 무게감이 존재했다.

수 십 년 시집살이를 해온 며느리도 이 곳간 열쇠를 움켜지지 않고서는 안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곶감 하나도 함부로 내주지 못했다.

사람이 활동을 하려면 경제적 행위의 배경이 되는 재물을 운영할 힘이 있어야 한다. 말 잘 듣는 종을 칭찬하려해도 곶감 하나를 쥐어 줘야 하고, 글공부 하는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려해도 꿀 한 숟가락을 떠 먹여줄 능력이 필요하다.

살기 좋은 땅의 조건에서 ‘인심’이란, 곳간이라는 넉넉한 경제적 뒷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 인심 좋은 곳은 경제력이 받쳐주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넓은 의미에서의 인심은 이웃 간의 정을 비롯한 미풍양속과 사람이 사회제도를 운영하며 형성한 인문ㆍ사회적인 요건 전반을 아우른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중환선생은 살만한 곳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다음으로 ‘인심(人心)’을 꼽았다.

『택리지』의 인심은 내용 중 대부분을 사람의 심리를 통해 본 정치제도와 조선시대 역사적인 인물, 그리고 인물에 얽힌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기도 하였고,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과 풍속이 다른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중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인심을 논하는 것인가. 공자는 ‘마을 인심이 착한 곳이 좋다. 착한 곳을 가려서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랴’ 라고 했다.

또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도 아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옳은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자신에게만 아니라 자손들도 반드시 나쁜 물이 들어서 그르치게 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살아갈 터를 잡음에 있어 그 지방의 풍속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택리지』에는 인심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들이 사화나 당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 등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시대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하여 본인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억울함, 나아가 세상을 걱정하는 선생의 뜻이 행간에서 읽혀진다.

조선 후기의 심각한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을 통탄하는, 사회가 기대어 살 곳이 못 된다는 절망감까지 보이기도 한다.

“보통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거둬들이고, 권세를 부려 영세민을 침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다른 당파와는 같은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며, 동리와 골목에서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뭐가 뭔지 측량할 수 없다.”

심지어 혼자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의미의 내용도 있다.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고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면, 비록 농ㆍ공ㆍ상이 되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으면 인심의 좋고 좋지 못함도 또한 논할 것이 못 된다.”

붕당 사회에서 촉발되는 사람 사는 사회의 절망감을 보여주는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붕당이 없어야 사람들이 사람답게 잘 살 수 있다는 이중환선생의 피맺힌 마음 속 절규의 완곡한 표현이다.

현대에서도 지역 특색과 지역감정은 엄연히 존재한다. 지역 특색이 서로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많은 것 같다. 현대의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은 특히 새겨들을 일이다.

현대인도 인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현대인들이 살기 좋다고 판단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초스피드로 변화하는 사회답게 현대인들이 주거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변하고 있다.

어디에서는 ‘경제 여건’을 가장 중시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교육’보다 ‘치안’을 더 중요시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인들은 교육 환경이 좋은 곳뿐만 아니라 살기 좋은 도시의 전국순위를 매기고, 범죄 없는 마을 간판을 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풍속을 유지하는 마을을 표창하기도 할 뿐 아니라 세계유산에 등재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면 국가적인 자부심으로 여기기도 한다. 결국 현대인들도 인심과 풍속이 좋은 곳을 선호하고, 관심 있어 한다는 방증이다.

한문학자 황안웅 선생은 ‘문명화된 생활방식’이 인심과 풍속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한다.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이 자연환경과의 공존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나 사람 위주의 발전만을 꾀하다 보니 생태계가 파괴되고, 비인간화가 조장되는 등 인심과 풍속이 점차 악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명화된 생활방식의 단점 중 하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더 열악해진다는 것이다.

무리를 지어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에게 올바른 인심과 풍속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의 문명화된 생활방식의 중심에는 인심과 풍속의 파괴가 공존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고 조화롭고 겸허하게 살아갈 때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택리지』는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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