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삼(3)이란 숫자를 좋아하나 봅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런 것 같고 하나의 본성처럼 보입니다.

일찍이 공자는 ‘三人行이면 必有我師’란 말씀을 남겼는데 여기서도 ‘삼인’이 등장합니다. 예전에 간혹 잡지나 신문 같은 데에서 ‘신춘정담(新春鼎談)’이란 것을 할 때도 꼭 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문학사의 전통으로 삼인시집은 1929년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김동환(金東煥)이 지은 합동시집 『三人詩歌集』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다음을 이은 것이 이른바 청록파로 이야기 되는 1946년도의 박목월(朴木月)·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에 의해 간행된 『청록집(靑鹿集)』입니다.

이 시집은 민족광복 이듬해 혼란기에 나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영혼의 고결함과 한국어의 금채색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시집입니다.

이들 세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일한 잡지, 동일한 천자(薦者)에 의해 시인이 되었을 뿐더러 시적인 경향마저 닮아 있어 매우 의초로운 어울림과 시적인 성장을 보여준 시인입니다.

『청록집』에 수록한 세 시인들 시의 특질을 논하는 자리에서 김종길 교수 같은 분은 ‘박목월의 시는 음악성으로, 조지훈의 시는 교양으로, 박두진의 시는 종교적 안목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타당성 있는 견해로 들렸습니다.

세 시인의 출생으로 볼 때 박목월, 박두진이 1916년이고 조지훈이 1920년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기는 거꾸로 조지훈 시인이 가장 빠르고(1968년, 48세), 박목월 시인(1978년, 62세), 박두진 시인(1998년, 82세)의 차례입니다.

사람이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지만 돌아감에는 순서가 없다는 걸 이런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생전에 조지훈 선생을 뵙지 못했습니다. 내가 문단에 등단하기 이전에 선생이 세상을 떴기 때문입니다.

만 나이 48세.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진이나 기록으로 만나는 시인의 풍모는 너무나 노숙하고, 우람하고, 권위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범접하기 어려운 어떠한 기상, 그러니까 카리스마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의젓하고 어른스런 모습, 우람한 외모는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합니다.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은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조부(趙寅錫)와 부친(趙憲泳)으로부터 한학을 익히면서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 강원 외전강사로 취임해서 일했습니다.

조선어학회 <큰 사전>편찬원으로 일하다가 일경에 검거, 심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국광복 후에는 고려대학교 교수로서 평생 이 땅의 젊은이들 사표로 살았습니다. 본명은 동탁(東卓).

시인이 된 것은 1939년과 1940년 사이. 작품 「고풍의상」,「승무」,「봉황수」가 정지용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서입니다.

시집으로는 앞에서 밝힌 『청록집』 외에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역사 앞에서』,『여운』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창가에 기대어』,『시와 인생』,『지조론』,『돌의 미학』, 등이 있고 이론서로 『시의 원리』,『한국문화사 서설』,『한국민족운동사』 등이 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시인으로도 알아주지만, 학자로서 그 위상이 더욱 높고, 특히 「지조론」의 필자로서 향기가 높습니다. 이는 집안의 내력이기도 하고 민족정기의 계승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조지훈 시인은 조선 말기의 절명시인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잇는 지사의 맥으로 자리매김 된 바 있습니다.

지난 봄, 경북 영양에 들른 김에 조지훈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일월면 주실리에 간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고풍스런 옛 기와집들이 떡 버티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마을에 한양 조 씨 아닌 집이 하나도 없다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수많은 학자와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명문가로 보였습니다.

조지훈 시인의 조상은 조선 후기 노론 세력에 밀려 이 마을로 살려고 온 남인 집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안사람들이 강골이라서 ‘검남(劍南)’이라고들 불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춥고 배고픈 상황, 어려운 지경에도 자존심을 팔지 않고 사는 지조 높은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병대장이 나오기도 했고, 일제침략기엔 자결로서 자존심을 지킨 조상이 있노라 합니다.

그러나 실학을 일찍이 받아들여 스스로 개화의 길을 걸으며 머리를 짧게 깎고, 설 명절을 도회에 나가 공부하고 돌아오는 자식들에게 맞추어 신정으로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그 서슬 퍼런 상황에도 창씨개명만은 끝까지 않고 버텼다고 합니다.

또 이 집안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교훈의 덕목은 삼불차(三不借)입니다. 세 가지를 빌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돈을 남한테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불차(文不借). 이것은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물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친자로만 가통을 잇는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모두 지키기 매우 어려운 항목들입니다. 명문가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찾아간 주실리 마을 전체가 조지훈 문학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좀 지나치다 싶게 많은 시비의 수. 잘 정비된 문학관 건물과 내부. 문학관 현판은 조지훈 시인의 미망인인 김난희 여사가 썼다고 합니다.

또한 문학관의 한 방에는 김남희 여사가 남편 조지훈 시인의 시를 소재로 하여 쓰고 그린 시화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의미와 풍취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명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님, 저 나태주가 너무 늦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쓰고 났더니 생전 한 번도 뵙지 않은 조지훈 선생을 가까이 뵌 것 같고, 아직도 살아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지훈 시인의 시는 한국 시사 상, 이미 ‘전통적인 언어적 운율과 선적인 미학이 현대적 표현법으로 결합되고 승화된 시’라는 평이 나와 있는 시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좋아하는 시는 「낙화」, 「승무」, 「고사」와 같은 작품이지만, 나는 전혀 다른 시 「병에게」란 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말년에 시인은 질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끝내는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렇게 질병에 시달리면서 사는 동안에 쓴 시가 바로 「병에게」입니다.

병을 일러 ‘오랜 친구’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부터가 남다른 배포이고 특별한 인생 인식입니다. 그리하여 그(병)로부터 시인은 ‘생의 외경’을 배우고 ‘허무’를 배웁니다. 끝내 시인은 병에게 다정한 말로 이야기합니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던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우리 한국문학사에 이만한 작품을 가졌다는 건 우리의 횡재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도 들지 못한 채 나중에 ‘전집’이 발간될 때에야 실리게 됩니다. 어쩌면 시인이 세상에서 맨 마지막에 쓴 작품이고 또 발표한 작품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병(病)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 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 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던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1968년 <사상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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