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김소월 다음으로 만난 시인이 한용운입니다. 그것도 통째로, 한 권 시집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시 한 편으로 만났습니다.

그 시는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행인이라? 처음엔 숨은 이야기가 있는 시인가 했고, 동화 같은 시라는 생각도 잠시 했고 이어서 연애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소년의 아둔한 짐작이었을 뿐,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네 인생 전체의 조감이며, 구도자의 수련과정과 같은 것이란 것을 천천히 눈을 뜨는 깨달음 같은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는 결코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몇 개의 동심원(同心圓)이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현실적인 사물인 나룻배와 행인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 시인은 그것을 관찰했을 것입니다. 강가에 나룻배가 있고, 그 나룻배를 타고 가는 행인이 있구나.

여기에 시인은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을 하여 자신이 나룻배가 되어 보고, 행인도 되어보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행인보다는 나룻배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자신을 나룻배라 여기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표상인 ‘당신’을 행인으로 설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나룻배의 입장에서 모든 과정을 풀어갑니다.

얼마나 마음이 짠한지 모릅니다. 세상일들이 다 그렇고 사람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편리한 대로만 세상을 삽니다.

오히려 이 시속에서 우리들은 나룻배이기 보다는 행인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러나 잠시 나룻배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 나룻배. 사랑하는 사람만 가슴에 안으면 싫다 하지 않고 묵묵히 강물을 건너는 나룻배. 그러면서도 당신을 한사코 기다리는 나룻배. 기다리며, 기다리며, 날마다 낡아가는 기다리는 나룻배.

이는 진정한 사랑의 표상입니다. 우리들의 전통적인 모친의 형상이 들어있으며, 우리들의 아름다운 누이나 어진 아내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들에 의해서 우리들 세상은 이만큼이라도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時刻)을 조금 바꾸어보면 이는 또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설정과도 같습니다. 스승은 어디까지나 제자를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제자가 도(깨달음, 지식, 지혜)에 이르도록 돕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스승을 밟고(타고) 제자는 무지의 강물을 건너갑니다. 일단 강물을 건너 저편 기슭에 닿으면 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승을 떠납니다. 또한 그래야 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이고, 냉정이 아닙니다.

강물을 보아서도 스승을 보아서도 안 됩니다. 멈칫거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더 높은 산을 넘지 못하고 더 깊은 강물을 건너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나 스승은 그 제자(행인, 당신, 사랑하는 사람)를 못 잊어 날마다 기다리며 낡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들 인생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풍속도요, 편편 아름다운 드라마입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은 가히 선생의 칭호가 잘 어울리는 시인입니다. 사신 생애도 그렇고, 돌아간 연치(65세)도 지긋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미 3․1 독립운동 당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3년간 감옥에 머물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굴하지 않은 강골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출옥 후에도 당신이 사실 집인 심우장(尋牛莊,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서울기념물 제7호)을 지으면서도 남쪽 방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는 것이 싫다고 북쪽 방향으로 집을 지을 것을 고집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철저한 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승려. 한국 불교의 수호자. 불교 사상가. 월간 교양지 <유심>의 창간인. 소설가. 수없이 많은 용어가 따르지만 ‘민족시인’이란 수식은 제일 먼저 그이의 이름에 붙어야 할 모자입니다.

시인은 오직 한 권의 시집 『님의 침묵』(1926년, 회동서관), 90편의 시로 이 땅의 완벽한 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궁핍한 시대, 엄혹한 시대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시집의 시보다 많은 한시를 남겼고, 적잖은 시조와 뜨문뜨문 발표한 한글시가 있기는 하지만, 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기는 여전히 『님의 침묵』 그 시집 밖에는 없는 줄로 압니다.

시집 『님의 침묵』은 강원도 내설악 백담사에서 시인이 승려생활 가운데 쓴 시집으로 서문 격인 ‘군말’에서 후기 격인 ‘독자에게’까지 마치 하루 밤 사이에 쓴 시처럼 편집되어 있습니다.

하루 밤 만에 쓴 시라? 이 또한 의미심장한 시간 구성입니다. 우리네 인생 이야기 자체가 하루 밤 이야기처럼 부질없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돌아가기도 민족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이었다니 억울하기도 많이 억울한 일이지만, 이러한 원통함은 거꾸로 시인의 진정성을 보태고, 시인의 업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