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책,『죽은 시인들의 나라』를 시작하면서

오래된 일입니다. 「죽은 시인들의 사회」란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웰튼이란 명문학교에서 키팅이란 시학 교사와 학생들이 벌이는 매우 인간적이며, 자유분방한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죽은 시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영화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들, 그러니까 ‘죽은 시인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의 일이 아니라 매우 오랜 기간, 책으로 읽고 책을 덮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대단히 외람된 이야깁니다만 결론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는 죽은 시인들의 시가 훨씬 무게가 나가고, 아름답고, 감동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아, 시인이란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완성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앞에 생존해있는 시인들의 시가 얼마나 가벼운 것이고 헐거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쉽고도 간명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죽은 시인들에게 주목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와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시인마다 한 편의 시를 골라 책을 한 권 쓰리라! 이것이 이 책을 쓰는 출발점이요 목적입니다.

한동안 나는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죽은 시인들을 만나 그들과 호흡하고 대화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2012년 6월의 막날, 나 태 주

1. 김소월, 「초혼」 

평생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나에게 김소월이란 이름은 시인의 대명사이며 시 그것과도 동의어입니다. 언제부터 김소월을 읽었던가? 아무래도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공주에서였지 싶습니다.

이미 중학교 때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시를 읽었던 것으로 보아 아슴아슴 김소월의 시를 읽기는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싸구려 연애시 정도로만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 자라서 시인이 되리라, 기어코 시인이 되고 말리라, 혼자서 부질없는 각오를 세우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소월을 좀 더 읽기는 읽었겠지만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였지 싶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나이를 더하면서 시 읽기가 깊어지면서 김소월은 결코 그런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싸구려 시인도 아니었고, 연애시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시의 초창기에 피어난 가장 큰 꽃송이였으며 그의 시는 민족시가로서 결코 빠지는 바가 없었습니다.

평생 가장 좋았던 시인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그 첫 자리에 김소월을 둡니다. 아니 김소월 선생을 둡니다. 선생이란 말. 존경의 뜻입지요. 그런데 한 번도 나는 김소월이란 시인 이름 앞에 ‘선생’이란 용어가 쓰여진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선생이지요. 김소월 그이한테 선생이란 말을 붙이지 않고 누구한테 붙이겠습니까! 32세 젊은 나이에 돌아갔다고요?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가 20세에 돌아갔다면 그냥 청년 아무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신세진 일이 없고 개인적으로 스승이 아니라고요? 왜 만나 본 일이 없겠습니까? 시로서 만났고, 책으로 만났고, 이야기로 만났고, 혼으로 이미 여러 차례 만나지 않았습니까?

시로서 신세를 지고 시로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의 스승이 아닙니까? 시를 앞세우고서 그이만한 스승이 어디 또 있다 합니까?

김소월의 시가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시건방진 사람들입니다.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렇고, 전체를 읽지 않아서 그렇고, 오래 읽지 않아서 그렇고, 잘 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 자신이 먼저 무식하고 무례해서 그렇습니다.

김소월의 시처럼 어려운 시가 내게는 없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깊은 맛이 나고, 모르는 맛이 나니 어려운 시일 수밖에요. 가도 가도 만나기 어려운 시가 김소월의 시요, 읽어도 읽어도 다는 모르겠는 시가 김소월의 시입니다.

이러한 김소월의 시가 우리나라 신문학 초기에 있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우리 시문학사의 행운입니다. 천재란 말을 써야한다면 김소월 이분한테만 그 말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소월의 시는 매우 우뚝합니다. 죽순이나 소나무 정도가 아닙니다. 마치 바닷물을 뚫고 올라온 화산과 같습니다. 돌연변이입니다. 민요 위에 또 하나의 민요, '청출어람(靑出於藍)'입니다. 기적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시인이라면 즐겨 이분의 손자입니다. 이분의 무릎 앞에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입니다. 대대손손 그렇습니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분보다 더 큰 이름은 없습니다. 이분의 시를 제대로 모르는 시인이라면 그는 분명 가짜이거나, 철부지거나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시인 김소월, 그 이름 그 기록 앞에서 우리도 한 사람씩 좋은 시인이기를 꿈꾸고 다짐합니다. 이 땅의 한 사람 시인인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국어로 시인인 것을 영광과 크나큰 자랑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자랑, 한국어의 보석, 시인의 사표입니다. 당신을 향한 찬사는 몇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시인의 이름은 김정식(金廷湜, 1902~1934). 평안북도 구성 출생. 살고 있던 고향집 앞에 있는 산 이름이 소산(素山)인데 그 위로 뜨는 달이 좋아 '소월(素月)'이라 호를 지었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는 문장은 시인의 성장 배경에 문패처럼 따라다니는 기록.

일찍이 고향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공부하면서 조만식(曺晩植) 선생 교장으로 김억(金億) 시인을 스승으로 만났으며, 서울에 올라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해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 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이 때 시인의 나이 32세. 남겨진 자녀는 4남 2녀. 함께 음독하기를 시인은 권했지만, 부인 홍실단(洪丹實·본래 이름은 洪尙一이었지만 시인이 다시 지어주었다고 한다.) 여사는 자식들을 생각해 그러지 못했다고 전한다.

처음 시를 발표한 것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 「춘강 春崗」 등 다섯 편의 작품에 의해서였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開闢)>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알려진 대로 시인을 시단에 안내하고 격려해준 사람은 오산학교 시절의 스승 안서 김억이었다.

그 뒤 시인은 <개벽>의 주요 필진으로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 <조선문단>, <문명>, <신천지>와 같은 지면에 활발한 작품 발표를 이어나갔다.

생전에 나온 시집으로는 『진달래꽃』(1925년) 한 권이 있고, 사후에 스승 김억에 의해서 편찬된 『소월시초(素月詩抄)』(1939)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김소월의 시집들을 모아본다면 커다란 책장으로 하나는 될 것이며, 그의 시에 대한 연구 자료나 책들을 모아본다면 방으로 하나는 될 것이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문학사상>사에 의해 ‘소월시문학상’이 제정·시상되고 있으며,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인의 자손으로 남한에 와서 산 사람은 삼남 김정호(金正鎬) 씨 한 사람. 19세 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남한으로 내려오는 방편으로 인민군으로 참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한국군에 입대 제대해고 한국에서 어렵게 살다가 돌아갔다.

내가 김정호 씨를 만난 건 2005년 서울오산중·고등학교에서. 그날은 시집 『진달래꽃』발간 80주년 기념으로 ‘소월 시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학교 교정에 시작품 「진달래꽃」을 새긴 시비를 진달래꽃 핀 언덕 위에 세우고 대강당에서 시인들이 모여 김소월의 시를 읽고 또 김정호 씨를 모셔다가 기념패를 드리는 행사를 했다.

그날 나도 김소월의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런데 그 날 본 김정호 씨는 이미 70을 넘긴 노인이었고,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다.

뒤에, 시인 이명수(李明洙) 씨한테 들은 바로는 김정호 씨의 따님, 그러니까 김소월의 손녀인 김은숙 씨가 온양의 송악저수지 부근에서 송일정이란 이름의 음식점을 운영한다고도 했는데 그 뒤의 소식은 모르겠다. 
 

김소월의 시 가운데 대중들에 의해서 사랑을 받고 문학이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시로는 부지기수다. 가곡이나 가요로 작곡되어 노래 불려지는 시도 그렇다.

언뜻 기억나는 시로는 「산유화」,「진달래꽃」,「엄마야 누나야」,「못 잊어」,「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금잔디」,「접동새」,「왕십리」,「가는 길」,「먼 후일」, 「길」,「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옛이야기」,「차안서선생산수갑산운」,「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러나 나는 그이의 시 가운데 「초혼(招魂)」을 들고 싶다. 초혼이란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대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애타는 대화다. 그러니 격앙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시의 초반부터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외침이 들어있다. 애끊는 하소연, 통곡이 들어있다. 이런 시는 한국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중간부분에 호흡이 잔잔해지다가 다시금 후반부에서 호흡이 끓어오른다. 문장형식으로는 양괄법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박두진 시인이 작사한 「6·25 노래」을 듣는 느낌이다. 하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람에게는 그것이 6·25 같은 전승과 뭐가 다르겠는가. 저승에까지 소리 질러 통화하고 싶은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초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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