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문학사는 굴곡이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의 역사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특히 8․15 해방공간과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적, 이념적 대결이 첨예했기 때문입니다. 행방되던 해에 태어나 그 이후 모든 민족사 수난과정의 흐름에서 성장한 나 같은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이지러진 시문학의 역사만을 접해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북으로 간 시인들의 시작품을 대하는 일이 제한적이었거나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하여 우렁찬 리얼리즘 계열 시인들의 시를 전혀 읽지 못한 채 시인으로 성장해야만 했습니다.

뿐더러 김기림이나 정지용 같은 탁월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 시조차도 금기사항으로 알만큼 불운한 시대의 학생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이들 시인의 작품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 마치 금서를 보듯 복사본으로 돌려서 읽으면서 갈급한 마음을 달래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좋아지고 이념적 갈등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1988년 시인장관이기도 했던 정한모(鄭漢模) 문광부장관 주도 아래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전 발표된 모든 예술작품 가운데 월북․납북을 불문 순수예술작품에 한해 해금조치를 대대적으로 단행한 일입니다.

이에 따라 앞에서 밝힌 정지용, 김기림은 물론, 임화, 설정식, 박세영, 이용악, 오장환 같은 굵직한 이름들이 풀리고 백석처럼 북한 출신으로 북한에 잔류한 이들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호기를 맞은 셈이지요.

이제 말하고자 하는 이병철이란 시인은 이렇게 해금은 되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 소외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병철 시인뿐만 그런 건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 문학 풍토의 편협성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유행을 따르는 가벼운 시대풍조도 가세된 것 같기도 하지만 어느 편으로는 시인 자신의 시작품의 수가 유난히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병철, 이병각, 유진오(소설가 유진오가 아님) 같은 시인들은 이념적인 문제에 얽힌 시인들이고 함형수, 오일도, 허민 같은 시인들은 그런 이념이나 분단의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작품수가 적거나 문단의 편협성 때문에 널리 평가되지 않은 시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가운데서 나는 이병철, 오일도, 함형수에 대해서만 시를 한편씩 골라 감상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병철이라고 하면 대뜸 기업인 이병철(李秉喆)을 떠올릴 것입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 아버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닙니다. 시인 이병철(李秉哲, 1918-? ). 한 때는 우리나라 중학교 국어 교과서(1946-1947)에도 시가 실렸던 시인입니다. 연보에 대한 사항이 별로 상세하지 않습니다.

경북 영양군 출생. 서울 혜화전문학교에서 1940년대 초에 조연현 등과 문학을 공부. 1943년 <조광>지에 시 「낙향 소식」이란 작품으로 등단. 광복 후에는 좌익적인 청년시인인 김상훈, 유진오(소설가 유진오가 아님), 박산운, 김광현 등과 함께 『전위시인집』(1946년)을 발간.

그리고 이 무렵 문학가동맹에 가입. 그 후부터는 이전의 서정적인 시와는 달리 항쟁적인 시로 변모. 1948년 전후 무렵에 이화여중에 교편을 잡았으며 1949년, 문둥이 시인인 한하운 시인을 발굴 <신천지> 4월호에 소개하는 일을 하기도 함.

1950년 봄에는 ‘남로당 시울시 문련예술과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간된 바도 있음. 이후 월북하여 북쪽의 이념에 부응하는 여러 편 시를 발표한 사항이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1988년 5월 17일까지 <동아일보>(북한소식 난)의 보도 내용으로 알려진 일임.

이러한 이병철 시인의 시작품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충남 금산문화원에서 신경림 시인이 내려와 문학 강연을 한다고 해서 청중으로 참석한 기회에 신경림 시인에 의해서입니다.

신경림 시인은 문학 강연의 뒤풀이 식사자리에서 시 한 편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시였습니다. 바로 1940년대 후반 중학교 국어교과서 실려 있었다는 바로 그 「나막신」이란 시였습니다.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단아한 작품이었습니다.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라는 문장이 세 번 나오면서 어디선지 ‘딸그락 딸그락’ 하는 나막신 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었습니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서럽고도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숨기고 고향을 떠나는 순박한 젊은이의 빛나는 이마가 문득 떠오를 것 같은 시였습니다. 시의 배경은 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는다 했으니 광활한 느낌이 납니다. 우주적 상상력이 작동합니다.

그 다음은 지극한 인간의 일입니다. ‘목숨 수자 박힌 정한 그릇’에서는 어머니의 단정하고도 깨끗한 부엌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에서는 우리 민족 고래의 그 여유만만 같은 것도 엿보이지만 ‘마시고’가 아니고 ‘먹고’란 단어에서 이 사람이 밥 대신 물을 먹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배고픈 뜨내기(행인, 나그네)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도 다음 문장을 보면 이 사람에게도 동행이 있음을 보면서 안심을 하게 됩니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란 구절의 바로 ‘삽살개’가 바로 그렇습니다.

삽살개를 앞세우고 가는 사람. 그는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일까요? 이것을 단순논리로 그냥 ‘북한’일거 라고 말하는 일은 곤란합니다. 젊고 푸른 마음으로 그냥 가고 싶은 어디일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제한하고 단죄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지 않을 만큼 우리의 의식세계는 많이 성숙되어 있습니다.

지난 4월, 공주문인협회 회원들과 함께 경북 영양으로 문학기행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이 영양의 두둘마음. 그 마을은 조선시대의 학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사직하고 내려와 자리를 잡은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재령이씨의 후손으로 내세우는 문인이 시인 이병각(李秉珏)과 소설가 이문열과 바로 이병철 시인이었습니다.

관광지를 돌면서 만나게 된 이병철 시인의 시 두 편. 그 가운데 한편이 바로 「나막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현 편에 쓰인 시에는 오자가 발견되어 씁쓸한 심정이었고, 같은 항렬자인 이병각 시인에겐 시비가 있었지만, 이병철 시인에겐 시비조차 없어서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시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막신/ 이병철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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