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 신풍면에서 유구읍 방면으로 2~3킬로미터를 가다 보면 우측으로 ‘동원리 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나옵니다.약 1킬로미터를 동원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을 회관이 있는 근처에 작은 냇물을 건너 우측으로 보면 민가들이 있고, 비닐하우스들이 있으며, 그 사이로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 석탑이 나옵니다. 안내판에는 ‘주위에 사찰이 있었다’는 말은 없고, ‘풍수상 질병을 막기 위해 현감이 탑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주위를 발굴하다 보면 분명 사지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미암사는 공주시 탄천면 대학리와 견동리 경계에 위치한 산 팔부능선에 있었으며, 바위에서 절에 머무는 사람의 숫자에 맞춰 쌀이 나와서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욕심을 일으켜 쌀 바위 구멍을 파내는 바람에 그나마 나오던 쌀이 끊어졌다 합니다.청림사지 아래 사시는 이완희노인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딸만 여럿 두었을 때 득남기도를 미암사에 올려서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 길에다가 제물을 차리고 예를 올리던 차에 촛불이 재가 있는 곳으로 넘어지게 되고, 그날 밤 꿈을 꾸니 흰 재를 뒤집어쓴 동자하나가 보이고 그길로 태기가 있어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이완희 노인의 외삼촌이 되는 그분은 후에 자손을 여럿 두어서 대를 이어갔다고 하는군요.견동리 아래 푯말에서 대학리
? 청림사는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에 있습니다.“청림사는 과거에는 규모가 대단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마을 분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법당과 요사가 전부입니다워낙 시골에 위치하다보니 신자들은 별로 많지 않고 잠시 정양을 위해 머무는 스님들이 교대로 계시다가 떠나곤 하는 절입니다.삼층탑과 탑 앞에 부도가 한기 보이는데 그 부도는 마을 분들이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옮겨 모신 것이고, 앞에 초석은 부도의 주인공인 스님의 행장을 적었던 비석의 기단부로 보입니다만 애석하게도 비석이 없어졌습니다.과거에 주위에 부도 군이 많이 있었지만 일제 때 보를 막는다는 미명 아래 부도를 부숴서 사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요즘은 얼굴을 고치는것은 물론이고, 몸매까지도 바꿔보려고 거액을 투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는 말을 뉴스에서 종종 듣습니다.올여름 방학에도 이미 접수가 완료되었고, 한국의 성형기술이 유명해지니 세계 각국으로부터 미인이 되고자 성형관광을 오는 이들도 많아진다 합니다.사실 ‘신언서판’이라는 말에서 보듯 일단은 몸이 바르고 나서 말과 글과 판단력이 있으면 어디서나 인정받는 경향이 많다보니 얼굴을 고쳐서라도 인상을 좋게 하려는 시도가 무리는 아니다 싶습니다.그렇게 바꾸어 보는 것이 나쁘다 할 수는 없겠지만, 한참 만에 보는 자기 가족이나 친지조차 몰라 볼만큼 확 달라져 버리면 이로 인한 혼란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그렇지만 얼굴을 바꾸고 몸매를 보정하여 지내다 보면 그 마음가짐도 또한 달라져서 하는
옛날 행세깨나 하는 집에는 첩실을 두는 것이 큰 허물이 아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허 정승’이라는 이도 벼슬을 하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첩실을 하나 얻었는데, 첩실이 하는 양이 너무나 곱고, 예뻐서 등청을 하였다가 돌아오면 그곳부터 먼저 찾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첩실에게 등청을 하면서 “금방 다녀 오마” 하고 나갔다 돌아오니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던 첩이 보이지 않습니다.이게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싶어서 급히 아랫사람들을 불러 물으니 아씨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도 없고,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입니다.“내가 나간 뒤에 누가 집에 다녀간 적이 없느냐?”물으니 하인이 “오늘 나뭇간에 숯을 들였습니다.”라고 하는 대답을 듣습니다.그날부터
“너만 알고 있어. 이건 일급비밀이야. 정말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하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혹은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냥 곧이곧대로 들으면 정말로 입을 함구하고 말아야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널리 알려줘" 라는 의미가 말의 내면에는 들어 있습니다.그렇다보니 일단 어떤 말이든 “비밀을 지켜줘”라는 이름으로 나온 말에 그 비밀이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라 하겠습니다.또 사람은 한번 들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머리속에 담아두고 있는 체질이 안 되는 경우인지라 그 말이 비밀이라는 포장을 하고 다음 사람에게 전해질 때는 침소봉대하여 부풀려지고 왜곡되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 되어 날아다니기도 합니다.그래서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불경에 보면 몇대를 독자로 이어 온 아들을 잃고 반은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어 오직 아기를 살리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아기를 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끼사 고타미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실성할만큼 아기의 생명에 집착이 강한 고타미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달려가서 만나는 이마다 아이를 살려 달라 애원하지만, 모두 “한번 죽은 아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댑니다.마침내 사람이 아주 폐인이 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말하기를 “부처님은 세상에서 뛰어난 분이시니 그분께 한번 가보라”는 말을 해주는 것을 듣고 일말의 희망을 안고 급히 찾아 갑니다.부처님은 "내 아이를 살려 주십시요" 하는 고타미에게 “아니다 살릴 수 없다. 불가능 하다” 고 말하지 않으
일전에 소개했던 1942년 공주본정국민학교 앨범에 있는 사진입니다.졸엄앨범이므로 사진에 나오는 아동들은 6학년생일텐데 칠판에 판서된 내용은 우선 큰 제목이 ‘기계화부대’입니다.당시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그랬을테지만,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군사교육을 하고 있는 사진이니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도구로 쓰였는지 알게 하는 사진입니다.사진속 판서된 글자를 돋보기로 들여다 보니 다 알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 글자들이 우측부터 써 있습니다.출동-전차부대...7시 *전투-자동차부대...보병. 공병. *병전진명령(대장)난투맹렬...보병. 공병추격-기계화부대장추격명령 무선전화전차군자동차군적배후백칠팔십*(금야 명조: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황군천
어느 신사분께서 “시월에 우금치 전적지에 있는 동학혁명탑 앞에서 당시에 돌아간 전몰군관민 영가분들을 위해 영산재를 지내려 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다”며 방문하셨습니다.그 취지에 대하여 서로 차를 나누며 담소를 하고, 함께 우금치를 올라보니 한동안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간이 화장실 하나가 있던 공간에는 20여평 정도의 새로 지은 건축물이 들어서서 오는 이들의 근심을 덜어 주는 해우소가 만들어져 있고, 주차 공간도 말끔히 정비를 하여 구획을 지어 놓았으며, 다만 조금이라도 쉬어가고 싶은 분들을 위하여 몇 개의 벤치도 놓였습니다. 이제는 멀리서 우금치 전적지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깨끗하고 보기 좋은 경관과 함께 손이라도 씻고 할 수 있는 세면장시설까지 함께 갖추어져 있으니
공주시 옥룡동에는 금학동과 연결되는 옥룡터널이 있는데 옥룡터널 좌측으로 200여미터 들어가면 백제시대 고찰 터인 수원사지가 있습니다.수원사지가 있는 뒷산은 월성산이라 하는데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가 있습니다. ‘수원사’라는 이름은 물이 좋아서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터널을 파면서 그 좋던 물이 끊어졌다 합니다.탑지와 금당터 그리고 요사채로 보이는 주초석들이 남아 있습니다. 주위에 거주하는 불자에게 들으니 월성산에는 채광을 하던 굴이 두어 개 있어서 지금도 간혹 가다가 기도 객들이 다녀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원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사명(寺名)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돼 있습니다.‘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彌勒
공주에서 부여방면으로 나가면서 원효사가 위치한 우금치 고개를 넘어 가면 좌측으로 ‘주미 양달뜸’이라는 마을 입구가 먼저 나오고, 다음은 주미음달뜸이 나옵니다. 대부분 전씨들 세거지로 이루어져 있는 좁은 마을 안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새로 신축한 집들이 몇 채 보입니다.제일 마지막 좌측에 있는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면 삼 십 여미터 앞으로 커다란 나무 군락이 보이는데 그 군락지를 향해 오르면 바로 주미사지가 나옵니다. 삼국유사에 진자와 미시랑 수원사지와 주미사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적인 유적입니다. 지금은 연꽃문양을 새긴 석등의 기초부재와 석탑의 조각 그리고 주초석과 기와 편 무더기가
고흐가 창가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보다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나가는데 그 사람의 셔츠 앞에는 포장용 천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고, 거기에는 ‘Breakable'(잘 깨지는 것)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그것을 본 순간 고흐는 “아하! 사람은 깨지기 쉬운 존재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앞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다시 보았는데 그의 등에도 ‘Be Careful'(취급 주의) 라는 글자가 인쇄된 상태로 있는 것을 보고 “맞아,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하고 다시 깨달았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그런 깨달음이 있던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지만, 그는 말년에 자기의 귀를 스스로 잘라내고, 보자기를 뒤집어 쓴 자화상을 그
4일 오전에는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공주시 의당면 주민들의 집터다지기 행사에 다녀왔습니다.?집터란 단순한 주거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생을 다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가정의 행복은 물론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를 통해 자손 대대로 만년대계를 설계하는 공간이므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새집을 짓는 이의 집터에 가서 품앗이로 일을 하며, 마을 공동체가 잘되기를 기원하고, 건강과 행복을 축원하는 우리 전통 민속의 하나입니다.?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사라져갔을지도 모를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면면히 계승시켜 오늘날 민족문화의 발자취를 되살린 여러분의 노고가 더욱 빛이 나는 날이었습니다.?나는 며칠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류시화씨가 엮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라는
근대 100여년을 전후하여 공주에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사셨습니다. 그중에는 마곡사를 중심으로 하는 화승들이 계셨는데 금호약효스님이나, 보응문성스님, 일섭스님, 우일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불모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어산 범패 등 염불 작법에도 뛰어난 스님들이 계셔서 지금까지도 면면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내용 중의 하나는 경허, 만공, 수월, 혜월, 혜봉, 전강스님 등에 이르러서는 선종의 역사가 새로 쓰일 만큼 훌륭한 도인들도 많이 배출되었으니 세간에서는 경허스님을 가리켜 ‘선종의 중흥조사’라 칭했고, 제자인 만공스님에 대해서는 일제 시대 많고 많은 스님 중에 선지가 가장 뛰어나다 할 만큼 훌륭한 분이셨습니다.선지도 당대 제일이지만, 삼십일본산 주지회의
‘마조’라는 스님의 제자가 아주 많은데 그 가운데 ‘대매법상’이라는 제자가 있어서 젊은 시절에 마조스님이 이야기하는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마음이 부처다” 하는 한소리에 일체를 놓아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심즉시불 한 구절에 깊이 침잠하여 법희선열에 든 채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한결같은 정진을 하니 수염이며 머리칼이 스님인지 속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산하대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해갑니다.어느 날 마조스님이 옆에 있는 제자를 시켜 “대매법상이 어디에서 머무는 지 알아보라” 이르니 “모모한 산에 토굴을 묻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하는 대답을 듣고, 공부가 어떠한지 떠볼 요량으로 제자를 그곳으로 보냅니다.사람은 물론이요
주방에 어쩌다 눈에 띈 것이 있는데 바로 콩기름 통에 소개된 문안입니다. ‘콩 100프로. 국내에서 직접 만든 콩기름’이라고 되어있습니다.얼른 보면 국내산 콩기름 100프로로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알기 쉬운데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작은 글씨로 된 성분 내용을 보니 콩 100프로(수입산)이라고 적혀있습니다.그러니까 정직하게 표기하자면 ‘콩은 100프로 수입이고, 다만 기름은 우리나라에서 짠 것임’이라는 문구가 정확한 것입니다.국내서 콩의 기름을 짰다고 하여 그것이 국내산 콩기름이 되는 것일까요? 국내 굴지의 유명회사에서 만든 콩기름 통에 있는 그대로 표기를 한다 해도 사먹을 사람은 사먹을 것인데 저와 같은 문구를 사용하여 국내산 콩기름처럼 국민을 현혹하도록 선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아마
얼마 전에 공주 주민 자치협의회원들과 같이 안동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봉정사 등을 다녀왔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이 태어난 집 자리에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입니다.문화관광 해설사인 여자 분이 입구에 있는 비석을 가리키며 “무슨 글자인지 한번 읽어보시라”고 하는데 다들 묵묵부답일수밖에 없는 전서체 글자 넉자입니다.후에 읽고 스스로 풀이하기를 “‘추노지향(鄒魯之鄕)’이라는 글자로 맹자님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님은 노나라 사람으로 공맹의 학문과 도가 천하에 가득함을 의미하는 글귀이니 이곳 도산서원의 주인인 퇴계선생의 학덕이 두 분에 못지않은 훌륭한 거유였음을 상징하는 의미로 공자님 77대손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 원장으로 재직할 때 글로 쓰고, 바위에 새겼다”고 합니다.그리고 퇴계 이황선생
백락천 권학문 白樂天 勸學文有田不耕倉凜虛 有書不敎子孫愚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곳간은 비리라.책이 있어도 교육이 없으면 자손은 우매하리라.倉凜虛兮歲月乏 子孫愚兮禮義?곳간이 비면 세월을 지내기가 구차하고자손이 우매하면 예의에서 멀어질 것이라.若有不耕與不敎 是乃父兄之過歟만약 밭이 있는데 경작하지도 않고 서책이 있어도 가르치고 배우지 않음은이 곧 부모와 형제의 허물이라 하리.당나라 때 뛰어난 학자요 관리인 백락천이 지은 '학문을 권하는 시'입니다. 밭가는 법 즉 농사짓는 법과 마음 밭을 가는 법 즉 공부를 통해서 사람이 온전하게 됨을 의미하는 글이라 하겠습니다.‘백거이’라 불리는 락천은 형주자사로 좌천되었을 때 중앙부처에서는 뜻이 통하고, 마음이 맞는 관리나 뛰어난
황기 2602년 3월이라고 있고, 우측으로는 ‘일억일심’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졸업기념 제 33회이고, 공주본정공립 국민학교라고 나옵니다. ‘황기’라는 숫자는 일제가 쓰던 연호로 우리나라로는 단기 4275년이고, 서력으로는 1942년이 됩니다.오천여년 역사를 지닌 나라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해 나라 잃은 설움이 당시 졸업앨범에도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본정공립국민학교는 본정동에 있는 학교로 지금의 중동초등학교를 의미합니다. ‘일억일심’이란 말은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일제가 왜인과 조선인들 일 억 명이 한마음이 되어 대동아공영권을?사수해 나가자는 비장한(?)결의를 뜻하는 것이니 참으로 섬나라 일본인들의 속셈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귀입니다.아래 사진은 대동아전쟁이 한창인 때에 영국과
목탁위에 핀 꽃을 두고 “우담바라 꽃이 맞다. 아니다, 풀 잠자리 알이 맞다”하면서 갑론을박이 한참 진행되더니 요즘은 조금 잠잠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부처님 얼굴에도, 법당 문에도, 꽃잎 밑에도, 사무실 책상에도, 은행 유리문에도, 차 백미러에도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많고 사진으로 찍어서 ‘삼천년에 한번 피는 꽃’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의 관심을 받기에 그 생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였던 적이 있습니다.누가 먼저 시작하였는지 몰라도 불가에서는 아주 귀한 ‘우담바라’라고 해서 부처님을 친견하듯 불자들이 모여서 예불을 하고, 생물학자들에게서는 “풀 잠자리 알을 가지고 말도 안 되게 무슨 우담바라라고 하느냐?” 하는 핀잔까지 받았던 그 거시기 한 그 아이가 삼년 전 우리 절 유치원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