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우리는 돈황의 하이라이트 세계 최대의 석굴사원 막고굴(莫高窟)로 갔다.366년 승려 낙준(樂尊)에 의해 시작된 석굴사원은 이후 수, 당, 5대 10국, 송, 서하, 원나라를 거치며 1,000여 년간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1,618m에 735개의 동굴이 조성됐다.

막고굴은 현재 492개의 석굴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1,400여 개의 상과 4만 5,000㎡의 벽화가 있는 실크로드의 화려한 문화를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돈황(敦煌)은 고대 동서양 교류의 요지로 실크로드로 가는 통로로 BC 111년 한무제가 이곳의 흉노족을 무찌르고, 동부에서 한족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후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이곳을 거치면서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돈황 예술’을 창출했다.

492개 동굴마다 빈틈없이 그려진 벽화들로 해서 동양 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막고굴 벽화의 초기내용은 민간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 후 불교가 전해지면서 부처님의 선행, 열반상, 그리고 사후 극락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막고굴에는 중국 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제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제57굴의 보살 벽화, 제158굴의 열반상, 제285굴의 비천도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17번 굴은 송대(宋代)까지의 경전이나,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1908년 16번 굴 안에 숨겨진 17번 굴(장경동)에서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신라 고승 혜초스님(慧超, 704~787년)이 5개의 천축국(오늘날 인도)를 순례하신 후 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비롯한 불교 경전, 황제의 칙령, 티베트 의약서, 위구르족의 토지매매 계약서, 고대 기독교 네스토리우스 경전, 인도 경전, 마니교 경전 등 다량의 고문서가 발견됐다. 

그런데 돈황의 막고굴이 발견된 이후 당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이곳의 자료들을 가져갔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가 가져갔다.

한편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세계 각지의 학자들은 석굴의 벽화와 문서를 해독, 연구하기 위해 이곳 중국을 다녀갔으며, ‘돈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가 막고굴을 방문한 날에는 왜 그리도 사람이 많은지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고굴을 보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는 2개 팀으로 나뉘어 입장, 한국어 통역이 가능한 중국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1,000년이 넘도록 선명한 상태로 남아있는 벽화를 보면서 숭례문의 단청을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막고굴의 벽화도 점차 퇴색이 진행되고 있어 중국정부에서 이에 따른 폐쇄조치를 감행할 것으로 보인다. 천 년 전의 막고굴의 벽화를 사진이 아닌, 실물로 보았다는 것이 행운으로 느껴졌다.

북경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해설사는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 주고자 노력을 했지만, 날은 덥고, 사람은 많고, 시끄럽다 보니 막고굴을 원하는 대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번 굴은 기어코 봤다. 17번 굴은 막고굴의 한쪽끝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