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후회스러운 일이 생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이번 중국 여행에서도 후회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후회스런 일은 내가 평소 좋아했던 중국 시인 왕유(王維)의 상을 보고서도 몰라보고 그 앞에 새겨진 시를 읽어보지 못한 일이다.

이는 나의 부주의 탓이고 사려 깊지 못함의 탓이고 더 나아가 무식의 탓이다. 양관(陽關)이란 곳, 중국 한나라 때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곳. 거기서부터 정말로 실크로드의 출발이고, 험난한 사막 길, 천산북로 천산남로가 열리는 카라반 루트의 시작점이다.

여행 일정의 마지막 부분에 그 양관이란 곳을 우리 일행도 가 보았다. 더 없이 스산하고 황막한 풍경이 정말로 인간이 사는 마을의 끝 지점에 비로소 우리가 왔구나 싶은 실감이 일었다.

건조한 모래바람이 그렇고 두꺼운 햇빛이 그렇고 풀 한 포기 제대로 발붙이기 어려운 척박하다 못해 붉은 모래흙이 그것을 일어주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양관이란 곳에 왔다는 감격에 휩싸여 내달리며 휘둥그레 눈을 치뜨고 여기저기 바라보며 사진도 찍고 그랬다. 허뚱허뚱 다리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했으리라.

‘양관’이란 붉은 글씨가 붙어있는 누각 앞에 섰을 때 한 사내의 입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새하얀 대리석 석상으로 호방한 포즈로 도포자락 휘날리며 왼손에 술잔을 든 채 오른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그 입상이 바로 왕유였다. 그렇지만 나는 일행을 따라 급하게 이동하느라 그 앞을 지나며 슬쩍 풍경 사진에 그의 모습을 우연히 담았을 뿐이다.

바쁘게 지나면서 보니 입상의 왼쪽에 붉은 글씨로 무언가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보였다. 허지만 나는 그것까지는 사진에 담지 못했다.

어쩐지 범상치 않다 싶었지만, 그것이 정작 왕유의 입상이고 바위에 새겨진 것이 왕유의 시인 줄은 차마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생각해보니 후회막급이다. 그 왕유의 입상을 보려면 7박 8일의 중국 여행길에 다시금 올라야 한다.

내 어찌 살아서 다시 그 왕유의 입상을 본다 하겠는가. 다만 후회와 아쉬움으로 왕유의 시를 꺼내어 새삼스레 읽었을 따름이다.

위성 땅 아침 비에 먼지가 젖고
객사 푸른 버들 비 맞아 더욱 푸름을 보며
나 그대에게 술 한 잔 다시 권하며 말하네
여기 양관을 벗어나면 옛 친구도 없을 것이네.
― 왕유, 「안서로 가는 원이를 전송하며」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勸君更進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 王維(왕유), 「送元二使安西(송원이사안서)」

성당(盛唐)시대 시인으로 이백, 두보와 더불어 삼대 시인으로 지칭되는 왕유. 그림까지 잘 그려서 나중에는 중국 남종화의 비조(鼻祖)가 된 왕유. 그는 이 글에서 양관 땅을 떠나 서역으로 가는 정든 벗을 위해 술 한 잔을 권하며 이별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천 이백년도 넘는 옛 사람들의 이별이 오늘날까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니, 글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한다 하겠다.

누군가 이 글을 읽은 사람 있어 다시 양관에 가거든 왕유의 입상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 옆에 새겨진 붉은 글씨의 글이 왕유의 글인지 확인해보고, 내게 알려주었으면 싶다.

아, 그렇다면 우리가 한 번 지나쳐온 길을 다시 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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