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矛창모 盾방패순)'의 뜻은 위의 풀이대로 창과 방패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일이나, 상태가 서로 배치되어서 말은 가능한데, 뜻은 맞지 않는 관계에 있음을 비유한답니다.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나라 방패와 창을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상인은 자신의 물건 가운데 방패를 하나 들고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방패는 얼마나 튼튼하고 단단한지 그 어떤 창도 뚫지 못할 정도로 강합니다. "

그러더니 이번에는 창을 들고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이 창은 얼마나 날카로운 지 꿰뚫지 못하는 방패가 없습니다." 라고 물건을 선전하자 구경하던 노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파는 창과 방패는 매우 훌륭한 것이겠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구려. 그렇다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자 상인은 얼굴이 빨개졌다가 바삐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사람이 최강의 창과 방패 두 개를 동시에 선전하고, 팔고자해서 일어난 것이지만, 만약 서로 다른 사람이 최고의 창과 방패를 따로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아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실 말은 최강이니, 최신이니, 절대니 하며 사용하지만, 이 세상에 최강, 최고, 최신형, 절대라는 말은 말만 존재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타고 하루만 지나도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아름답고 더 슬림하고 등등 새로운 것이 나타나거나, 만들어지면서 이제는 그 무엇도 “내가 제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진 시대가 됐습니다.

처음부터 모순이라는 이야기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 공주는 무려 1500여 년 전 백제의 고도로서 한국사람 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고도 공주에는 백제의 유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사라져 버리고 없어져서 딱히 이것이 백제의 유물이요, 남겨진 유산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웅진동의 무령왕릉이나, 고분군들이 있고, ‘공산성’이라고 불리는 백제왕궁의 추정지 등이 남아있습니다. 시내 권으로는 반죽동에 사찰에 당을 세우는 당간지주라고 하는 두개의 돌기둥이 남아 있어서 이곳이 백제 혹은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 가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개의 당간이 반죽동에 남아있으니 ‘반죽동 당간’이라 하면서 공주시에서 만든 안내판 설명에는 대통사지에 있었던 당간으로 기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당간을 중심으로 하여 있었던 두개의 석조는 하나는 반죽동 석조, 하나는 중동 석조라는 이름으로 지금 현재는 국립 공주 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여기에도 또한 대통사 석조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대통사지라고 알고 있는 부분에서는 가루베지온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대통’이라는 기와편이 두 종류 내지는 몇 점이 나오고, 공주시청 청사 입구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도 대통사지 와당이라는 소개와 함께 둥근 연꽃 막새기와가 하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산성공원 안에 마을을 내보내고 그곳을 정밀하게 발굴조사를 하다 보니 ‘대통사’라고 새겨진 토기로 만든 벼루가 출토되었다고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나온 책에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또 2012년 편집된 신문으로 본 공주불교 책자에는 김갑순씨가 제민천변에서 발굴하여 세웠다는 석불을 서혈사 석불들과 같이 공주박물관으로 옮겨져 갔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30년 7월 28일자에 나옵니다.

여기에 70년대에 백제문화연구소에서 안승주학장님과 학자들이 대통사지에서 불두를 발견하였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나오기도 하는데 위에 석불과 함께 불두의 자취를 찾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또한 지금의 봉황동 큰샘거리에는 ‘궁정’ 즉 궁궐의 우물이라는 표현으로 백제 왕궁이나 감영 또는 대통사에서 사용했을 것이라는 안내 문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인삼공사 앞 우측 화단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석물 석점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반죽동 당간지주가 있는 주변으로는 대략 십여 개에서 이십 여개의 석물들이 당간 안과 바깥에 놓여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대통사 난간석이라는 이름의 두개의 석물이 있고, 또 탑이 두기 불완전한 상태로 있는데 하나는 반죽동 탑이고, 하나는 봉황동 탑입니다.

그리고 금학동에서 옮겨왔다는 불상의 광배에 해당하는 석물과 보살상과 크고 작은 불상 등이 있기도 합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바로 ‘대통교’라는 이름이 제민천변 당간지주 근처에서 동서를 이어주는 다리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이상이 대통사지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하고 확인할 수 있었던 실물이고, 거기에다가 가루베지온이라는 일본인의 조사 보고서를 참고한다면 분명 대통사는 공주에 있었던 백제의 절임은 분명해집니다.

지금 여기서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통사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각종 안내문이나, 책자에 반죽동 당간지주 주변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도보존사업으로 대통사를 복원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러서 공주시는 ‘대통사지가 지금 현재의 당간지주 주변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가지고 당간지주와 인접한 나대지에다가 4층(시에서는 3층) 건물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안내문에 나온 대로 반죽동 당간은 1960년경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하고, 백제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유물로 보존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대통사가 성왕대에 527년경에 무령왕의 사후 무령왕의 명복을 비는 의미와 더불어서 양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국찰로 지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일단 대통사가 지어지고 난 후에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도 사찰은 존속되어 오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당간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출토되거나, 발굴된 유물들을 근거로 본다면 대통사지는 당간 주변의 반경 수 백 미터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그런 정황을 곳곳에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도시가 형성되어 세밀한 발굴 조사가 어려워진 상태에서 “몇 군데 나대지를 발굴해보니 대통사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공주문화원 옆에 있는 구 공주 경찰서 자리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 반죽동이나 봉황동일 것이라는 생각 아래 대통사지를 찾으면 안 되고, 금학동 교대 부근으로 올라가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까지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을 모두 참고하여 본다면 결국 지금 현재로써는 공주에 대통사는 분명 있었지만, 대통사가 있었던 장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한다면 모순이요, 자기 부정이라 한다면 자기 부정이 될 것이니 대통사지 출토 와편, 와당, 석조 불두, 당간 난간석 외에 반죽동 탑, 봉황동 탑, 큰샘으로 알려진 궁정 대통교 등 무수히 많이 나열하고 예시된 대통사 유적이 한낱 실체를 알 수 없는 자리에서 발굴한 결과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대통사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라는 지금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한다면 유물 안내에 안내판에서 ‘대통사’라는 글자가 없어져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반죽동 대통사지 혹은 봉황동 대통사지 등등으로 쓰여 있는 유물의 안내판 및 그동안 나왔던 대통사지 관련 책자들에서도 모두 검증을 거쳐 가면서 다른 이름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분명 대통사지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이라 표시해 놓았는데, 그 출토지는 정작 대통사가 아니라고 자기 부정을 한다면 ‘대통사지’라고 붙여놓은 것은 자기기만에서부터 시작해 세상을 속이는 일이 되는 것이니 우리에게는 대통사지가 어디인가 발굴 조사해 내는 일도 시급하지만, 지금까지 대통사라는 이름으로 기록해 놓은 많은 기록물들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김갑순씨의 석불 발굴 기사에는 높이가 3미터 30센티 폭이 1미터 80센티 되는 초대형 석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공주에는 그와 같은 석불은 존재하지 않고, 박물관에 있는 금학동 출토 석불의 광배 높이를 줄자로 재어본 결과 2미터 65센티 정도의 높이인 것으로 보아 동일 석불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공주와 공주사람들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석불의 위치와 이동 경로, 혹은 사진 한 점 갖고 있지 못하면서 무려 1500백 년 전 대통사지를 찾는다 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지적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또한 안승주교수등이 대통사지에서 발굴하였다는 불두 역시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 내역 보고서를 면밀히 찾아본다면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써는 50여 년 전 발굴된 불두조차 행방을 알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역사. 문화. 예술의 도시 공주'라는 타이틀이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소개하기 좋은 이름이기는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근대문화유산에 있어서까지 우리는 깊이 있는 연구자나, 정확한 연구 보고서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대통사지를 찾아낼 방법이 거의 전무에 가깝다고 한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남아있는 유물 즉 대통사 당간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 현재 당간 주변을 외면하고 대규모 건축물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경찰서라든가 금학동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면 발굴의 가능성을 1퍼센트도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인데다가, 정말로 경찰서나 금학동 교대주변을 발굴하여 대통사지의 실체가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지금 현재의 대통사지 당간지주 주변만 잃어버리거나,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당간이 백제 때 만들어졌건, 통일신라 때 만들어 졌건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대통사’라는 절이 있으므로 해서 당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 아래 당간 주변을 확보하고, 기왕에 ‘대통사’라는 이름으로 출토되고, 발굴된 유물들을 근거로 삼아 천오백여년의 베일에 싸인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지금 우리 공주가 서둘러 할일이면서 침체되고 위축되어 가는 공주라는 역사 문화 예술도시를 다시 살려내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지방자치제의 선거에 임하는 출마자들이나 유권자들은 종교에 관계없이 공주라는 고도가 복원과 발전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가면서 학계와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합니다.

산성공원과 무령왕릉을 잇는 일자형과 그 중간으로부터 올라오는 제민천을 경과하여 반죽동에 이르러서 충청감영과 대통사, 그리고 동헌의 복원을 통해 H 혹은 I자형의 고도 복원 플랜이 결정이 되고, 새로 선출되는 시장이나 의원들이 목표를 가지고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무한 경쟁력이 있다 보여집니다.

청주는 실체를 찾아내지 못한 ‘직지’ 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거듭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 공주는 공주가 갖고 있는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문화유산을 제대로만 가꾸고 복원하고 활용하여 세계에 알리려고 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명품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행해온 제민천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들은 차라리 하지 않고 그냥 두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행되어 행해지고 있는 이상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뿐입니다.

앞으로 고도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충청감영의 복원과 공주의료원의 이전 후의 활용과 동헌의 복원 및 대통사지의 발굴과 복원 주변에 한옥마을 건설 등 구도심에서 행해지는 대형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먼저 백제와 고려 조선과 근대라는 역사와 문화를 염두에 두고 학계와 관과 시민들의 참여아래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시행되어 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봅니다.

아래 사진들을 비교하시면서 글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관련기사 있음)

그림 속에는 대통사지 당간과 탑지 금당지 수조 강당 경찰 국민학교 고녀 입구 공주교 등이 나옵니다 -가루베지온-
대통사지 하수공사 사진과 대통이라는 기와편이 출토되었다는 내용
대통사지 찰간(찰간이란 당간지주를 말함)

대통사지 계단난간석. 좌측 길이 145 높이 27 폭 12.17. 24 우측길이 106센티미터

대통사 당간구역에 놓인 석물들

 

백제시대 석불소상 매일신보 기사

 

높이 2.65미터 폭 1.45미터 옆에 보살상 높이 2.75미터 폭 70센티 서정국교장선생님 키 175센티정도 비교도 윤용혁교수 지은 가루베지온의 백제연구에서 대통사지 관련 44~46페이지 기록상 평지가람의 백제 최초 예라고 할 공주시내 소재 대통사지의 구명에 주력한것은 가루베의 또하나의 업적이었다. 공주시 반죽동에 소재한 대통사지는 조선조 공주목 관아와 충청감영터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공주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택가로 변한 관계로 절터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여건이었다. 류제경의 증언에 의하면 가루베는 공주고 근무시절 바로 이 절터 부근에서 거주하였다고 하며 근무처인 공주고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특히 건축 혹은 상수도 공사등이 이루어지는 기회를 통하여 제반 상황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초석과 기단석등 유물의 단편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백제시대 대통사의 터를 확정하고 아울러 가람배치의 개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수도공사등의 기회를 통하여 현지의 상황을 확인하고 강당과 금당과 탑지등의 위치를 추정하여 지도에 표시해놓은 대통사지의 가람 배치도는 소략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대통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본 설명자료로써 전사傳寫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2기의 백제 석련지등 당시 그가 확인한 절터에 대한 관찰자료는 고고학적 조사가 불가능한 현재의 여건에서 중요한 증언으로 활용되고 있다.
담배인삼공사 앞 화단에 있는 주추 석점
반죽동 석탑
봉황동 석탑
대소인원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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