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회 공주대교수(JH지식곡간채 한국풍속문화연구원 원장)가 ‘풍속문화로 만난 무령임금 무덤의 12가지 비밀’을 출간했다.

구중회 교수는 그동안 관련학계에서 풀어내지 못한 무령왕릉에 숨겨진 비밀들을 풍속문화학적 관점에서 연구, 시원하게 풀어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71년 발굴된 무령 임금무덤[왕릉] 연구는 주로 고고학과 역사학 입장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성과’[깊이]와 ‘미진’[넓이]이 있었으며, 이 책은 ‘풍속문화학’이란 외연을 확장하는 방향에서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무령 임금 무덤 즉 고대사의 비밀 가운데 12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방법의 하나를 발견하고 풀어냈다는 의의가 있다. 더구나 오늘날의 융⦁합 학문 접근 방법과 일치하므로 앞으로의 활용도가 더 기대되기도 한다고 할 것이다.

<내용>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이 임금무덤 읽기다.

1) ‘왕릉’이란 용어는 중국의 ‘제릉’이나 ‘황릉’보다 아래 단계의 무덤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임금무덤’이라고 했다.

2) 우리나라 문화Y는 외래문화X 즉 중국과 일본 나아가 서역문화라는 요인을 끼워준 산물Z이다. 다시 Z가 상수항 Y가 되어 풍요해지고 기본등식이 된다. 이러한 반복이 문화의 흐름이다.

3) 무덤문화는 상례[장례 포함]의 하위 개념이다. 상례를 연구하지 않고 무덤을 접근한다면, 깊이를 보장할 수 없다.

둘째 부분이 무덤에서 발견된 12가지 비밀이다.

1) 반함의례[수저-큰 못박힌 신발-머리받침-발받침]의 흔적이다.
2) 임금은 ‘보검’을 가지는 것이지, ‘큰칼’[‘대도’는 일본용어. 우리말은 ‘장도’]을 가지지 않는다.
3) 28개월상은 길제로 임금 내외가 모두 ‘甲’일에 치러졌다.
4) 귀걸이는 자손의 번성과 안산의 상징이었다. 음양[임금 것은 여자의 성기(하트 모양). 아내 것은 남성의 성기(포환 모양)의 디자인이다.
5) 임금 머리 꾸밈새의 127개의 영락과 임금 아내의 바리때는 ‘재가승려’라는 징표다. 진흥임금 내외는 죽으면서 승려가 되었다.
6) 신이한 짐승과 특이한 벼[가화]는 도·불·유 교가 결합된, 나라의 좋은 징조를 나타내는, 상서 문화이다.
7) 무덤의 맨 앞의 돌에 새긴 문서와 맨 끝의 구리거울의 기물 배치는 백제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8) 소위 ‘남조묘’는 양 나라가 개발한 형식이 아니라 한 나라 잔존문화의 흔적일 뿐이다. ‘기와박사’는 기능공이 아니라 당나라의 ‘견와서’와 같은 국가기관이다.
9) 벽돌무덤방은 외부와 연계를 가지는 구조로 문짝과 공헌 제의[현금]가 있었다.
10) 귀·팔·목·발 등의 보석[구슬]은 서역[오랑캐]에서 온 풍속이다. 죽은 이를 지킨다는 믿음과 불교가 결합된 문화의 소산이었다.
11)‘박장’도 ‘후장’도 아닌 백제식 장례였다. ‘나무를 심지 않고 봉분을 만들지 않은 것’은 박장이지만, 28개월상과 금은동 등의 ‘명기’ 등은 후장이기 때문이다.
12) 백제력[원가력]은 삼복, 대장군, 삼살 방위 등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은 백제 무령임금 시대부터 기록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이 풍속문화론의 종합적인 검토이다.

1) 자손 번성과 안산, 2) 임금 무덤의 불⦁도⦁유교의 통합, 3) 백제시대의 ‘생활의학’ 등에 대하여 종합적인 검토를 하였다.

<풍속문화학과 고고학⦁역사학의 비교>

고고학 연구는 보통 유물 하나하나가 독립된 채로 설명된다. 예를 들면, 수저[청동저], 머리받침[두침], 큰 못 박힌 신발[식이], 발받침[족좌] 등은 네 항목이다.

그러나 ‘풍속문화학’에서는 ‘반함의례’ 용품으로 이들 네 품목이 하나의 항목으로 묶여진다.

죽은 사람의 몸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의례 장치인 것이다. 또 다른 예는 귀걸이[식이, 이환], 목걸이[경식], 팔·발찌 등도 고고학에서는 세 항목이지만, 풍속문화학에서는 서역[인도]에서 유입된 ‘칸티’라는 하나의 품목으로, 외부에서 침입하는 질병[여역]을 막아내는 아물렛Amulet이며 복을 기원하는 탈리스만Talisman에 속한다.

고고학은 어찌 보면 ‘일본학’이다. 소위 임금의 소유로 ‘환두대도’라는 큰 칼이 있다. 그런데 ‘대도’란 용어는 일본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용어는 조선 시대 정조 때 나라에서 지은《무예도보통지》에서 보듯이 ‘장도’이다.

무령 임금이 소유했던 유물은 ‘보검[패검]’이다. 일본 황실에서 소장한 ‘보검’과 같은 부류인 신성한 물건The Sacred이지, 소위 ‘위세품’인 세속적 물건The Profane이 아니다.

‘널길’이란 고고학 용어는 ‘羨道’이다. 한자음은 ‘선도’인데, 실제는 ‘연도’라고 읽는다. 일본식 발음과 닿아 있다. 원래 연도는 《후한서》‘주반전’에 나오는 ‘埏道’이다.

이와 같이 고고학은 일본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용어를 아무 반성 없이 사용한다. 학문 축적이 적지 않은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문화에의 기여’라는 점에서 고려해야 할 시기이다.

역사학은 한·중·일간의 국제적 관계를 다룬다. 중국이 선진국이고 그 문화가 후진국인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승되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다. 말하자면, 문화의 원산지는 중국인 셈이다.

그런데 문화란 원래 ‘비빔밥’과 같은 것이다. 재료가 자기 환경에서 재생산되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추석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들어간 풍속이다. 귀걸이 문화는 서역[메소포타미아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간 풍속이다. 귀걸이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상여를 이끄는 방상씨가 착용하고 있다.

중국문화는 ‘원산지’이면서 동시에 ‘전파지’이다. 역사학에서 중국문화는 전파지 개념이 거의 수용하지 못한다.

‘중국의 양 나라 임금 무덤이 백제 무령 임금 시대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생각은 1980년에 일본 학자가 제기한 이래 지금은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위 남조라고 하는 유송, 제, 양, 진 등은 북위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난 한족 문화이다. 양 나라는 50여년을 유지한 나라[생존권]인데 백제는 55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상승권]이다. 이들 한 나라 잔존 세력들은 선비족 정권에게 쫓겨서 양자강 이남까지 내려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던 정권들이다.

중국학자들의 용어대로 ‘정제된 고도의 한나라 문화’라고 하더라도, 양 나라는 그 문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을 치른 후 무덤을 만드는 기술자가 죽어서 임금 무덤이 허술하게 된 것을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양 나라의 무덤방 만드는 기술은 한 나라 문화에서 계승되던 수준이 낮은 것이다. 서역[중앙아시아]의 무덤방 만드는 기술은 이미 높은 수준의 것이다.

풍속문화학은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을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3년 상’이란 시간상으로 14개월이면 가능하다. 연말 1개월, 다음해의 12개월, 그 다음해의 연초 1개월 등을 합하면 되기 때문이다. 서양식으로 따지면, 1년 2개월인 셈이다. 무령임금 내외의 장례는 28개월 걸렸고 ‘甲’일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시선 내지 시각’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5세기 백제는 유송에서 원가력을 들여온다. 원가력에는 ‘삼복’, ‘대장군’이나 ‘삼살’ 방위 등의 풍속이 나온다. 적어도 왕실에서는 ‘삼복’을 지켰다고 생각된다.

‘삼복’이란 가장 더운 때인데, 金氣가 여름의 火氣를 두려워 복장 즉 숨는다는 뜻이다. 초복은 하지를 지나서 세 번째 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는 입추 후 첫 번째 경일이다. 음양오행에 의거한 풍속이다.

임금 귀걸이의 마감은 여성의 그것[성기형의 하트 모양]로 임금 아내[비]의 마감은 남성의 그것[성기형의 포탄 모양]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

임금 아내의 남성 성기는 여성 성기에 둘러싸인 구성이다. 거기에 생명의 상징인 굽은 곡[곡옥]과 안산의 상징인 산치자를 조합하였다. 철저하게 음양으로 짜인 것이다.

한 나라 명제 이후로 임금 무덤은 불·도·유의 혼합물로 꾸며지기 시작하여 한 번도 변화되지 않았다.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인정하지 않던 조선 시대에도 순종 임금의 무덤까지 ‘4신 그림’[청룡, 주작, 백호, 현무]가 지켜졌다. 무령 임금 무덤은 6호무덤[분]의 4신 그림이 벽화에서 개별 유물로 옮겨온 때다. 이러한 장례 풍속이 처음 바뀐 임금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령임금 무덤에서 출토된 구슬은 수량이 많고 형태도 다양했다. 그 이유를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하였다. 또한 작은 발찌가 발 부근에서 놓이기도 하였다. 임금 아내[비]의 어릴 때 것[어릴 때 이런 보석을 가지려면, 백제는 금 천국이 되어도 부족할 것이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과 판단은 풍속문화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 아물렛과 탈리스만으로 죽은 이의 영구에 닥치는 침해를 막으려는 장치였던 것이다.

무령임금 무덤은 우리나라 아주 옛날 역사[고대사]의 보고이고 ‘지하박물관’이다. 그동안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판도라의 상자’는 열지 못하였다.

당대의 풍속문화로 접근하지 않고 오늘날 서구화된 문화로 풀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한·중·일의 문화권을 넘어서 세계문화권으로 발상을 전환하여 우리문화 유산을 보아야 할 것이다.

<기여도>

발굴 40년이 지난 무령임금 무덤의 비밀을 푸는데 풍속문화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대사 연구에도 이러한 방법이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풍속문화학은 민속학과 궁중학을 보탠 학문영역이다. 오늘날 한⦁중⦁일 3국의 문화를 대상으로 삼는 인식을 벗어나 세계문화를 대상으로 확장하는 범주도 풍속문화학이 민속학과 다른 점이다.

민속학의 실체는 민속 현상에서 고도의 숙련공을 만나 궁중학에 편입되었다가 계층, 자본, 기능 등에서 한 부분씩 축소되어 다시 민속학의 영역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풍속문화학은 고대 사회문화를 푸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풍속문화로 만난 무령임금의 12가지 비밀’은 서경문화사에서 출판했다. 가격은 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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