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3박4일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 일정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무덤이 있는 넵스키 수도원 묘지, 국민문학의 창시자로 러시아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인 푸시킨 박물관, 그리고 어제 보려다 못 본 ‘피의 사원’을 관람하는 일이다.

그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은 역시 푸시킨이다. 그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인이자 소설가다. 그는 어떻게 그런 시인이 되었나.

사흘을 머문 호텔 방을 떠나려니 약간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역시 사람은 환경에 잘 적응하게 된 존재인가 보다.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올라와 짐을 정리하여 끌고 로비로 내려와 일행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아침부터 하늘은 흐려 있고 간간 비를 뿌리기도 했다. 도로 사정은 여전히 안 좋다. 차에 막혀 버스가 제대로 달리지를 못한다. 출근 시간과 겹쳐 더욱 그렇다고 한다.

예정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한 후 넵스키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 수도원은 종교적인 면에서보다 수도원에 딸린 예술가들의 무덤으로 더 유명하다. 여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하여 차이코프스키, 글린까, 무소르그스키 등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묻혀 있다.

무덤은 당연히 우리의 것과는 다르다. 시신을 묻고 그 위에 견고한 돌을 덮은 다음 그 위로 예술가와 관련 있는 조형물이나 당사자의 얼굴을 조각하여 붙여 놓은 형태다.

예술가들로서는 사후 여기 묻히는 것이 대단한 영광이라 한다. 그래서 여기 들어오기 위한 경쟁이 매우 심하고, 따라서 이곳 묘지에 안장되려면 해당 심사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의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 한 사람이 따라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영어로 설명을 하는 걸 들으니 잠깐 자신들의 노래 공연을 보고 가라는 것이다. 웃으면서 노 머니란 말을 덧붙인다.

우리는 그를 따라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와 똑같은 검은색 성직자 복장을 한 남자 넷이 나와 무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아카펠라 노래 소리가 청아하고 순박해서 잠시 귀가 행복해졌다. 두 곡의 노래를 부르고 난 그들은 그들의 노래가 담긴 시디를 내 놓았다. 판매 대금이 좋은 데 쓰인다는 말에 일행 중 몇 분이 그걸 샀다.

우산을 쓴 채 예술가들의 무덤인 묘지로 들어섰다. 큰 나무가 비를 맞고 더 싱그러운 잎을 피우고 있었으며, 띄엄띄엄 널찍이 자리 잡은 묘지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었는데 아주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 묘지부터 찾았다. 젊은 시절에 사회 개혁에 앞장서 매우 과격하고 진보적인 생각과 활동을 했던 그는 시베리아 유형 중 읽을 것이라고는 성경밖에 없던 환경에서 그걸 무수히 반복해 읽으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 후 그의 작품 곳곳에는 신에 대한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 성경을 읽었으며 유언대로 평생 읽었던 성경을 가슴에 안고 죽음을 맞았다.

그의 묘소는 다른 사람의 것에 비해 조촐했다. 화려하거나 요란한 치장도 없었다. 직사각형의 돌로 된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십자가를 새긴 비석이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돌로 된 그의 부조(浮彫) 형태 얼굴 조각상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의 표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우수에 찬 얼굴과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길이 편안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아 보였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이 숨어 있다고나 할까. 그의 작품 세계를 절묘하게 표현하는 것 같은 저 얼굴 표정을 어쩌면 이렇게 정확히 나타냈을까 하는 감탄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라면 후배 작가로서 여러 해 전 채만식 선생 묘소를 처음 찾았을 때 큰절을 올렸던 것처럼 그 앞에 절을 올리고 싶었으나, 내가 팀의 리더도 아닌 터에 앞장서 나서는 게 잘난 체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마음속으로만 잠시 인사를 올렸다.

차이코프스키 무덤 등 다른 묘소를 둘러보고 그곳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푸시킨 박물관을 찾았다. 이 박물관은 겨울 궁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버스가 들어갈 수 없다 하여 먼 곳에서 내려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고, 비까지 뿌려 걷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38세 되던 푸시킨은 결투 당일 집에서 나와 결투 장소로 걸어갔는데, 그 길이 바로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걷고 있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지만 부인의 낭비벽으로 인해 경제 형편이 어려워지고, 자유분방했던 부인 문제로 급기야 자신의 명예까지 더렵혀졌다고 판단한 푸시킨, 그는 무모한 줄 알면서도 권총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장소로 걸어가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일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2층에서 차를 마시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30대 후반의 귀족 출신 인기 작가,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 일부러 찾으려 해도 눈에 잘 안 띠는 이발소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리 곳곳에 있었다.

그 이발소에 들어가면 대개 벽에 액자가 걸려 있고, 그 액자 속에는 보통 바다와 강, 갈매기와 물레방아, 흰 파도와 돛단배가 그려진 인쇄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시 구절이 쓰여 있었는데,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마라...’ 이런 시였다. 하도 많이 접하게 되어 그 시를 쓴 사람이 푸시킨이라는 건 몰라도 그 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푸시킨은 러시아에서 항상 1순위로 존경 받고 사랑받는 시인이다. 국민 시인, 근대문학의 창시자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극장, 건물 등이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작은 도시도 있다.

또한 이 나라의 크고 작은 도시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서울 소공동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러시아 대통령이 그 개막식에 참석한 바도 있다. 그는 왜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추앙받는 인기 시인이 되었는가.

그는 18세기가 끝나는 1799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대대로 이어오는 귀족이었고, 모친 역시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던 이집트 출신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이렇게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당시 귀족들의 풍속대로 일찍이 프랑스어를 익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는 주로 밖에서 활동했으므로 그의 양육은 주로 외할머니와 유모가 담당했다. 그런데 그 외할머니와 유모는 그에게 러시어로 전래 민담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후일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프랑스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당시 러시아어는 고급 언어가 아니었기에 귀족들은 잘 사용하지 않고 서민들이나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런 러시아어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그의 민중 지향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적인 문학을 개척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문인들이 하지 못한 일로 그의 과감한 결단의 결과였다. 즉, 그는 말과 글을 일치시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한 러시아 최초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국민문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이며, 후일 고리키는 그를 가리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유명한 말로 위상을 규정하기도 했다.

귀족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그는 18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외교 관리가 된다. 그러나 직업에 충실하기보다는 술과 연애, 방탕으로 젊음을 불태우며 그 열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써 오던 글을 계속 썼다.

그러다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거기에 동조하는 글을 쓰게 되는데, 이들의 행동이 발각되어 데카브리스트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이들과 연루된 혐의로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유배는 자유로운 편이어서 취직하여 돈을 벌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하는 생활이었다. 외증조부의 영향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였던 그는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그 동안에 여러 작품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6년간의 유형이 끝나고 황제의 명령으로 귀환하지만 그는 황제의 곁에서 글을 쓰고 활동해야 하는 일에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사교계의 총아였던 절세 미녀 나탈리아를 만나게 되고, 3년간의 끈질긴 구애 끝에 13년 연하의 그녀와 모친의 반대 속에 결혼을 했고, 이후 그녀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를 두게 된다.

그의 부인은 그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여러 남자들과 어울렸는데,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당시 황제도 끼어 있었다.

결국 프랑스 기병 장교인 당테스가 유부녀인 그녀에게 구애를 하게 되고, 둘 사이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게 되자 푸시킨은 가장인 자신과 귀족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당시 결투는 불법이었으나 그는 죽을 것을 감수하며 결투를 감행한다. 1월 27일 결투 당일 그는 집에서 나와 자주 가던 카페로 가서 주스를 한 잔 마시고, 오후 다섯 시 다리 위에서 결투를 하게 되는데, 평생 글만 쓰던 그와 여러 전투를 치른 장교의 결투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테스가 약속을 어기고 먼저 총알을 발사했다고 하는데, 동시에 했다고 해도 그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진 그는 곧 집으로 옮겨졌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2만 명이나 모여 그의 집을 둘러싸고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틀 후 눈을 감고 만다. 황제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 장소의 비밀스러운 변경, 장례식에 가족과 가까운 친척만 참석, 일반인 조문 절대 금지, 언론의 과격한 추모 기사 보도 금지 등의 명령을 내렸다.

이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반체제 시위가 촉발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내린 조치라 할 수 있다. 또한 황제의 이런 조치를 결투 자체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라고 해석하는 증거로 들기도 한다.

그의 사후 부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러시아를 떠나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더욱 허무하고 비극적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푸시킨 박물관은 도로에서 우리나라 대문처럼 된 거대한 문을 지나야 만날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우선 꽤 큰 규모의 정원에 라일락이 환하게 피어 있고, 그 앞으로 좀 큰 신장의 푸시킨 동상이 서 있다. 한 손을 펴고 서 있는 모습이 꽤 멋있어 보인다.

박물관은 그 맞은편인 도로 쪽의 건물에 있다. 지하로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바로 박물관 입구다.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

우선 의자에 앉아 입장 순서를 대기해야 한다. 전시실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만큼 시차를 두고 입장시키기 때문이다. 전시실 방이 좁기 때문에 한 번에 대략 5-6명씩 입장시킨다.

당연한 일이지만 비를 맞아 젖은 옷이나 신발은 전시물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철저하게 통제된다. 겉옷은 벗어서 관리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고, 발에는 신발 위로 비닐 주머니를 착용하여 습기나 먼지 등을 차단해야 한다.

이곳은 해설하는 사람이 없고, 수신기를 통해 안내 멘트를 들으며 관람해야 한다. 고맙게도 한국어로 된 안내도 있어 그것을 들으며 방마다 정해진 시간만큼 관람을 하고 다음 코스로 넘어가야 했다.

이 집은 푸시킨이 말년에 3개월 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러시아에는 여기 말고도 푸시킨 연고지 여러 곳에 박물관이 있다. 그러나 비록 거주했던 기간은 짧지만 그가 최후를 맞은 곳이기 때문에 여기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925년에 국가 주관으로 이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개관했다. 이 집은 원래 푸시킨 개인 소유가 아니었으며, 어떤 귀족 부인이 소유하고 있었던 집을 빌려서 살았다고 한다.

수신기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결투 당일 열고 나갔던 문이 있고, 그 다음 방에는 결투에 쓰였던 권총이 케이스에 담겨 놓여 있으며, 차례대로 아이들의 방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서재,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 그가 쓴 여러 글의 원고,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인 친구에게 원고 청탁하는 편지, 총상을 입고 사람들에게 들려와 누워 있던 침대, 당시 의사의 진료 기록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들의 걱정 어린 마음을 적은 메모, 당시 신문 보도 기사, 그가 사용했던 식탁과 의자, 찻잔, 친지에게 받은 선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 그런 것들이 집필실, 거실, 서재, 주방 등의 방마다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 역시 방마다 감시하는 여성분들이 하나씩 앉아서 관람객이 사진 찍는 걸 제지하거나 전시물에 가까이 접근하는 걸 막았다.

일견 그들의 태도는 매우 도도해 보였다. 가이드에게 들으니 그들은 여기서 일하는 걸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나라 곳곳에 운영 중인 문학관이나 다른 전시관에서도 이런 점은 좀 배웠으면 좋을 것 같았다.

수신기에서 고맙습니다, 란 말이 나오니 이제 박물관을 나와야 한다. 욕심 같아선 좀 더 머물며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도 싶으나 다음 관람객을 위해 자리를 내 주어야 하고, 또 우리의 일정도 있으니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밖으로 나와 정원의 동상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개인적으로도 푸시킨을 만났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 다른 분에게 부탁해서 증빙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걸어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기념품 가게에 들러 쇼핑을 했다. 원래 옵션에 들어 있지 않은 건데, 우리 일행 중에서 몇 분이 꼭 필요하다고 요구해서 들른 것이다.

우리의 대형 마트 비슷한 가게에서 모피, 도자기, 액세서리, 보석, 시계, 문구, 잡화 등 별의별 물건을 다 팔고 있었다. 나도 슬슬 구경하다가 손자에게 줄 물건을 포함하여 몇 개를 구입했다. 갖고 가 봤자 별 환영도 못 받겠지만 며칠 집을 떠나 있던 표는 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시간이 좀 지체되어 다음 일정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피의 성당이다.

이 성당은 알렉산더 3세가 그의 부친을 위해 건립한 것인데, 그의 부친 알렉산더 2세는 1881년 개혁적 진보주의 단체인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을 맞고 쓰러져 궁궐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아들은 그 아버지가 피를 흘렸던 자리에 성당을 지어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고, 정식 명칭인 그리스도부활 성당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혼이 부활하고 영생하기를 염원했다.

따라서 여기는 아들의 보기 드문 효심이 담겨 있는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아버지를 위해 지은 성당이기 때문에 그는 성당의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당대 최고의 기술자와 화가들을 동원하여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성당은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한 입지 조건도 훌륭하고, 큰 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도록 조경도 잘 해 놓았다.

양파 모양의 둥글고 볼록한 지붕은 알록달록하여 마치 동화적인 환상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성당 외벽에는 예수 부활과 관련된 각종 조각상이 부조되어 있고, 출입문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우리는 잔뜩 기대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오늘은 내부 관람 금지라며 문이 잠겨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이드는 아마도 축구 경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하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 놈의 축구 때문에 애먼 우리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니, 흡사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 신세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건물 안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프레스코 성화와 장식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한다는데, 아마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복(眼福)이 우리에게는 없었나 보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시 성당의 아름다운 외관을 보며 나오는데, 긴 수염의 할아버지가 나무 아래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게 보였고, 그 앞에는 입구를 벌리고 있는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성당으로 오기 위해 까잔 성당에 버스를 주차하고 걸어오는 동안 운하 둑 위의 가게 앞 돌로 된 벤치에서 마이크를 들고 혼자 노래하던 청년이 떠올랐다. 유럽에는 이런 풍경이 흔하다. 이곳이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땅임을 실감케 하는 일이다.

다시 버스를 탔는데 비가 좀 심하게 내린다. 이런 비가 가뭄이 심한 우리나라에도 내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 사람들은 비가 내려도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피하는 사람과 그냥 비를 맞는 사람이 반반이다.

 

아무 대비 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정장을 한 신사도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는다. 아마 산성비니, 환경오염이니 하는 게 이들에게는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자연이 깨끗하고 공기가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제 이 도시를 작별하고 모스크바로 가는 일만 남았다. 저녁 식사는 점심을 늦게 먹은 탓으로 천천히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도시락을 준비하여 열차에서 먹기로 했다.

이로써 우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정이 끝났다. 학문과 예술의 도시, 문화와 역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언제 다시 이 도시에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나 이곳의 아름답고 높고 깊은 문화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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