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이나 정지산에는 지금은 찾기 어려운 ‘관정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후에는 ‘취원루’라 불리던 정자가 있었나 봅니다.

‘관정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아래 내용에도 나오듯이 정자를 고쳐짓고 나서 공주 목사 정간 이공이 교은郊隱 정이오에게 이름을 지어 주십사 부탁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정간공은 고려 공신 이도의 후손으로, 세종 때 ‘가전충효 세수인경’이라는 이름을 받을 정도로 충과 효로 널리 알려진 전의이씨 가문의 인물이고, 공주 목사를 지내면서 목은 포은 야은등 삼은을 동학사 삼은각에 모시고 향사를 지낸 분입니다.

또 교은 정이오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대학자로, 목은과 포은의 학덕과 정신을 이었으며,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등 주요 관직에 있었던 인물로, 본관은 진주이고 단종 임금을 모시던 3정승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등 세분 가운데 한분인 우의정 정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사곡면 호계리에 충효사 사당에는 애일당 충장공 정분의 영정과 아드님 포옹 정지산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교은공이 정간공의 청에 따라 ‘관정정’이라 이름 지은 내력을 보면 그 가르침이 얼마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 오늘 날 정치를 하고 자기 수양을 한다는 사람들이면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는 마음으로 전재합니다.

훗날 이 ‘광정정’이라는 이름은 서거정에 의해 ‘취원루’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의 공산성 안내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취원루(聚遠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옛날의 관정정(觀政亭)이다.

정자가 연못 가운데 있었는데,

목사(牧使) 권체(權體)가 정자를 헐고 누(樓)로 만든 것을

뒤에 목사 홍석(洪錫)이 동헌(東軒) 동쪽에 옮겨 세웠다.

정이오(鄭以吾)의 관정정기(觀政亭記)에

"공산(公山)의 공관(公館) 동쪽에

옛날부터 연못이 있었으니, 거의 1, 2묘(畝)나 되었다.

지금의 부유후(副留後) 영가(永嘉 안동) 권씨(權氏) 담(湛)이

일찍이 이 고을에 목사로 와서 그 못에 초정(草亭)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 봄에

목사(牧使) 이공(李公)과 통판(通判) 유군(柳君)이

옛것에 인하여 증수(增修)하되 옛못을 개발 확장하고,

그 가운데 돌을 쌓아 터를 돋우고 넓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단청을 하였으니,

바라보기에 날아갈 듯하였다.

또 조그마한 시냇물을 끌어 못으로 흘려보내니,

깊고 맑게 물이 고여 깊이가 4척이나 되었다.

버들에 부는 바람ㆍ

연꽃에 비치는 달ㆍ

무성한 대[竹]ㆍ

아름다운 화초가 맑고 상쾌하며,

무성하고 향기롭게 좌우로 서리고 얽혀 있어

성곽과 산천을 궤석(几席)에 앉아 대해 보면,

실로 한 고을의 아름다운 경치라고 이를 만하다.

이사군(李使君)이

그 기이한 승경(勝景)을 갖추어 기록하여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지어 주기를 청해 왔다.

내가 그 글을 읽어

이 정자가 절승한 줄을 알고는

한번 그 가운데 종유(從遊)하여 못 물을 굽어보며

마음을 씻어 보고 싶었으나 얻어서 이룰 수 없는지라

사사로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못물에서 정사하는 것을 본다.[池水觀爲政]'

는 시구(詩句)를 취하여 이름 붙이기를, '관정정'이라 하였다.


군자는 사물(物)을 보면

도(道)가 있지 않는 데가 없음을 아는 것이니,

정사를 하는 데도 보고 본받을 만한 것이

이 못물보다 나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연못의 물이 고인 것은

맑아서 요동하지 않고, 평평하여 넘치지 않으며,

더러움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으며,

나쁜 것을 흘려버려서 머물러 두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무궁히 하는 것을 보면

정사하는 도리도 또한 이에 있을 것이다.

정자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이를 정사하는 데 비유한 것은

못 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령(守令)의 직임이란

백성을 친애(親愛)하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을

마음 속 에다 담아야 할 것이다.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지만

그 요체는 왕인(王人)을 예로 접대하고,

조정의 전장(典章)을 삼가 지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정자에 오르는

부절(符節)을 가지고 온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특히 그 직무의 노고를 잊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못물을 보고 정교(政敎)를 베풀게 한다면,

이 정자를 지음이 또 그 백성에게 관계되지 않겠는가.

이공의 이름은 정간(貞幹)이요,

유군의 이름은 지례(之禮)이니,

이 일을 보면 그가 정사하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최인호 소설 임상옥에는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라는 말이 나오는바 물에 비유하여 재물이나 사람의 가치를 논하였는데, 교은공은 물의 수평성과 덕에 비유하여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의미로 지은 정자의 이름이 관정정입니다.

2016년이 어느덧 저물어 가는 오늘의 나라는 혼미한 정국이 지속되면서 국민들은 어디 의지할 바를 잃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때 무릇 정치하는 사람들은 오직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교은공의 관정정기를 소개해 보는 것입니다.

훗날 서거정은 ‘관정정’의 이름을 ‘취원루’라고 이름 지으면서 또 다시 정치인들의 자세에 대하여 논한 바 있습니다.

나(서거정)는 말하기를,

‘이 정자의 좋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먼데 것을 모은 것[聚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멀리 있는 모든 좋은 경치를 이 한 누(樓)로 모아 들였다는 것이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좌우와 전후에 강과 산이 두루 비치니,

아래 위 수백 리 사이에 저 들판의 광활함이며,

여염집의 즐비함이며, 나루터와 다리에 다니느라 고생하는 모습과,

역원(驛院)에 드나드는 나그네의 힘든 형편과,

밭가는 자ㆍ누에 치는 자ㆍ나무하는 자ㆍ소 말 먹이는 자ㆍ고기 잡는 어부

물건 파는 장수들ㆍ사람들이 생활하며 오가는 것들이 한이 없다.

아침에 해 뜨고 저녁에 그늘지며

사철이 서로 바뀌는 것과,

우로(雨露) 상설(霜雪)의 변천이며

초목(草木) 화훼(花卉)가 피고 지는 것이며,

스스로 날고 스스로 울며,

스스로 모양을 이루고 스스로 빛을 내는 것 등

형기(形氣) 속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그 기상(氣象)이 각기 일정치 않음을

이 누에서 한번 눈을 들어보면 모두 알 수 있다.

아, 어쩌면 멀리서 이 누에 모여드는 것이 이와도 같은가.

올라 구경하는 좋은 경치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누각을 세운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볼 때에는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고,

여염을 바라볼 때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하며,

나루터와 다리를 바라볼 때에는 어찌하면 내를 잘 건널 수 있게 하고

나그네를 바라볼 때는 어찌하면 우리의 길에 나오기를 원하게 할까 하며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 가지가 아님을 볼 때에는

죽는 이를 살려 주고, 추운 자를 따뜻하게 할 것을 생각하게 하며,

산천초목과 조수, 어별에 이르기까지 화락하게 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멀리는 물(物)에서 취하여 이 누에 모으고

이 누에 모은 것을 다시 마음에 모아서,

이 마음이 항상 주(主)가 되어

내 눈과 귀에 부딪치는 것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이 누에 이름 붙인 의의(意義)에 거의 가까울 것이며,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에도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다.


무릇 정치하는 이들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관정정기와 ‘취원루기’를 살피고 살펴 자기를 돌아보고 온고지신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나라 안팎이 두루 평안해 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소개를 하여 봅니다.

공주시청 입구 좌측으로도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지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관정정’ 혹은 ‘취원루’라는 이름을 붙여 교은 정이오공과 서거정의 글을 소개한다면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공직자들에게 항상 새로운 청렴과 바른 정치와 애민의 정신을 심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디 2017년 1월 1일부터는 모두의 마음에 평화와 행복 건강이 깃들기를 두 손 모아 부처님 전에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