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경 (스토리텔링 작가/ 전주대 연구교수)
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나는 오랜 만에 여유를 가지고 나하고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공주시 중동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느린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성삼문 요여'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충남역사박물관에 있는 “성삼문 요여”는 1871년(고종8년), 홍주 노은서원(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이 훼철되면서 성삼문의 신주를 모실 곳이 없어지자, 노성의 당호재(현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로 신주를 옮겨오면서 사용한 요여이며, 1903년(광무7년), 칙명에 의해 성삼문의 봉사손이 결정되면서 창녕성씨 집성촌인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현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사우(현 문절사)로 옮겨질 때도 사용한 요여이다. 지금은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참화를 당할 당시 그의 동생과 아들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血孫)이 끊어졌다.

이에 성삼문의 부인 김씨가 관비로 끌려가서도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고, 김씨가 죽은 후에는 외손인 박호(朴壕, 1466~1536)의 집안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들다가 임진왜란 등 혼란기에 신주를 땅 속에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72년, 인왕산의 바위가 무너지면서 땅에 묻혀있던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홍주 노은동에 있는 성삼문의 생가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당시 우암 송시열이 <성선생신주천봉기(成先生神主遷奉記)>를 지어 잘 기록해 두었다.

여하튼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던 “성삼문 요여”는 이제, 충남역사박물관 2층에 안착해 소중히 보관 중이다. 거기다가 이런 내용에 대해 키오스크를 활용해 “성삼문 요여” 스토리텔링으로 방문객들에게 보다 쉽게 “성삼문”이라는 인물과 “성삼문 요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있다.

<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필자가 촬영한 충남역사박물관의 성삼문 요여 및 키오스크 모습>

<텍스트 Key Word-자막용 스토리텔링(나레이션) 내용 + Music + 런닝타임 30″>
꼬마 선비 성삼문 캐릭터(10) : 성삼문의 요여 이야기+인왕산 무너진 바위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찾아내어 충남 홍주 노은동으로 옮기는 장면 그리고 유허비 모습 및 3개의 서원 등을 구현할 것

충청 기호유학의 상징, 성삼문 요여가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871년, 고종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없애라는 명령(서원훼철령)을 내려 충남 노은서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제 신주를 모실 곳이 없게 되었죠.

이때 제 제사를 모시고 있던 무안박씨 집안의 박진하(朴鎭廈)가 나라의 허락을 받고 논산의 노성 당호재라는 건물로 제 신주를 옮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제 제사를 모셔줄 자손이 결정되면서 저의 집안 후손들이 모여 사는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사우, 현재 문절사로 또, 한번 제 신주가 옮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계신 무안박씨 요여는 제 신주가 1871년, 홍주 노은서원에서 논산 당호재로 옮겨질 때 사용되었고요. 1903년 논산 당호재에서 연기 달전리로 옮겨질 때도 제 혼백을 담았던 가마입니다.

이렇게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제 요여를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이유는요. 앞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여러분에게 제 나라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인 것 같아요.

자, 그럼 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짠~ 족자를 한번 펼쳐 보세요. 충청 기호유학의 상징, 성삼문 요여가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삼문 ‘요여’ 키오스크_스토리텔링 : 집필, 김미경(스토리텔링작가/전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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