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경(스토리텔링 작가/전주대 연구교수)

지난 2016년 10월 20일, 나는 정말 오랜 만에 전라남도 진도를 찾았다. 이는 “진도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와 위상”이라는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주관하고, “진도군”이 후원하는 진도 동학혁명에 관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국제학술대회의 <종합토론> 좌장을 맡은 나는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극적으로 우리나라 - 대한민국으로 돌아 온 진도 동학지도자 유골을 논의하면서 우리 공주 동학도들의 유골은 도대체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공주대학교 지수걸 교수에 의하면 “공주는 동학농민전쟁 최초의 취회지이자, 비록 실패했지만, 마지막 취회를 하고자 했던 곳”(특급뉴스, 2015년 11월 22일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런 동학농민혁명(필자는 “전쟁”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칭하고자 함)의 중요한 유적지인 공주 우금티에서의 항쟁 후 세상을 개벽하고자 과감히 목숨을 내놓은 공주에서 죽은 수많은 동학도들의 시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사실, 이번 진도 동학농민혁명 - 국제학술대회는 진도 면화재배 관리자인 사토마사지가 채집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알려진 “1906년(이번 진도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 때 박주언 토론자의 증언에 의하면 공주 계룡산 상신마을에 1916년 들어 온 취음 권중면이 그 당시 진도군수였으며 그의 아들 봉우 권태훈은 1992년 9월 12일, 93세 특강에서 진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함) 진도에서 효수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귀가 적힌 “유골”을 어떻게 진도로 봉안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90년 동안이나 홋카이도 대학 창고에 방치되었다가 1995년 발견된 진도 동학도의 “유골”은 1996년 우리나라로 봉환되었지만, 그 당시 안장지를 찾지 못해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20여 년 간이나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에 급기야 작년에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현재는 환속함)의 건의로 전주시에서 안장을 추진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진도사람들의 반발이 있었고, 나에게 전화가 쏟아졌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가 있는 혜문스님(평소 친분이 있었음)과 전주시 담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도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했다.

이렇게 내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은 진도군 학예연구사로 있을 때 원광대학교 신순철 교수(현재는 원광대학교 이사장)와 박맹수 교수에게 “진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학술 용역“을 발주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중앙부처에 <진도 동학농민혁명 - ”유골” 봉안을 위한 기념관 설립>도 건의했었다.

참, 세상사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없지만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관해서는 그 실마리를 풀기가 대단히 어렵다.

공주에서도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방면에서 “공주동학”과 “우금티”를 이야기 해 왔는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갈 길이 멀다.

오늘(오늘은 1894년 10월 23일, 공주 우금티에서 1차 전투가 벌어진 뜻 깊은 날임) 아침 문득 “공주 동학농민혁명”에서 사라져 간 억울한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혜문스님이 “유골은 안장시켜 편안하게 보내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공주 우금티 고개 옆에 자리한 원효사의 해월스님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 공주에는 진도 송현리처럼 동학농민혁명 때 죽은 동학도들이 묻혀 있는 “떼무덤”은 없느냐고 하니 해월스님은 “떼무덤은 모르겠고, 송장배미는 안다”라고 해서 인터넷으로 “원효사” 다음 카페를 검색해서 사진으로 찍힌 “용 못(송장배미)” - 안내판을 정리해 본다. 

▲ <2016년 10월 20일, 진도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에서 일본 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발표하고 있는 모습 및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후원해 준 진도군 이동진 진도군수와 김영을 문화관광과장 그리고 필자 모습>

<용 못 (송장배미)>

공주시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 / 소재지 : 공주시 웅진동 247

이 연못은 1894년 10월 ~ 11월에 있었던 동학 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官軍)과 일본군에게 밀린 농민군이 익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금치전투는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있었던 1차 전투와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있었던 2차 전투 등 두 차례에 걸쳐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2차 전투 때에는 효포로부터 웅치와 우금치에 이르는 전선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전봉준 지휘하의 농민군 주력무대 1만여 명은 우금치를 공격하였는데,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면서 밀리던 농민군이 이 용못에서 익사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얼마 전까지 한 독지가에 의해 희생된 농민군에 대한 위령제가 올려졌으나 현재는 위령제도 끊기고, 연못도 도시개발로 점점 메워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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