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1년 앞서 남한 사람들 스물 네 명이
어렵게 어렵게 윤동주 선생 묘소에 다녀왔다.
그것은 2016년 8월 27일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으며
현지에 길을 아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았다.
운 좋게도 중국인 마을버스 한 대를 빌려 타고
풀 섶 길 헤쳐 도달한 무덤은 풀도 나지 않은 붉은 무덤
마치 오래 전에 돌아간 시인이 통곡하며 우리를 맞는 듯했다.
찾아간 남한 사람 가운데 열다섯 명은 공주 사람이고
두 명은 인천 사람, 네 명은 대전 사람, 두 명은 청양 사람,
그리고 한 명은 세종시 사람.
묘소 앞에서 서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꽃다발을 바치고 늦게 찾아온 사유를 밝혀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고
선생의 시 「서시」를 읽고 몇 사람은 절을 드리고
무덤에 난 잡초를 움켜잡아 뽑으면서
울컥 솟아오르는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복잡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날 왜 우리는 그렇게도 감격해야만 했던가?
그것은 오직 선생의 시 몇 편이 우리들 가슴에 아직도 살아서
숨 쉬고 속삭이고 우리들 인생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기 때문.
100살이 되어도 여전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 선생의
아름다운 정신이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깨끗함과 사랑을 깨우쳐주고 있었기 때문 .
그날 우리는 그렇게 윤동주 선생의 정신과 마음의 자손이었다.
남한에서 찾아간 스물 네 사람 모두는
한 마음 한 핏줄을 나눈 마음의 형제 자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