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다 숨이 졌대요.


어릴적 3월 1일이 되면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3.1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알려진 유관순은

천안태생으로 공주 영명학교를 다니다

이화학당으로 편입을 하여 가는 바람에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였던

이 지역의 의인 열사중 한분입니다.

 
짧은 노래 한곡에서도

푸른 하늘로 묘사되고 있는 자유 대한을

얼마나 목이 메게 부르다 돌아갔는지

마음이 숙연해지는 듯 합니다. 


그렇게 삼월 1일이 지나면서

모든 학교들이 개학을 맞이합니다. 


우리 원효유치원도

재학 아동들과 새로운 아가들을 맞이하여

3월 2일날 26회 입학식을 거행합니다. 


새 학기의 시작이자 일년의 시작인 날입니다. 


오전 11시에 원효유치원 마당에

올망졸망한 아가들과 학부모들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애국가도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하며

애국지사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활기찬 새날을 열어갈 것을 다짐합니다.


나라 잃고 비통해 하면서도

대한 독립을 꿈꾸며 피 흘리고 희생하신

선열들의 넋이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자유대한의 모습을 보고

저승에서도 기뻐하고 눈물 흘릴 것입니다.

공주에는 유관순같은 분도 있었고,

백범 김구같은 분도 머물렀던 곳입니다. 


백범은 동학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군 장교를 때려 치사케 하고 도망쳐서

공주 사곡면 마곡사로 은신합니다. 


그곳에서 삭발을 하고 출가를 한 뒤

일년여 이상을 머물며 수도를 하다가

중국으로 들어가서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토히로부미등을 암살하는 공작을 펼칩니다. 


해방후 돌아와 남북분단을 막아보려 애쓰다

안두희라는 저격범의 총에 맞아 돌아가게 되는

비운의 국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또 마곡사 주지로 송만공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모든 사찰을

31본산으로 나누고 식민지 사업에 동참하게 했는데

당시 31본산 주지회의를 서울 총독부에서 할 때

만공스님은 마곡사 주지 자격으로 참석합니다. 


당시의 일본 총독 데라우찌가

전임 사이또 총독이 불교를 위해서

큰 일을 많이 하였다 하면서 칭찬일색일 때

만공스님이 일어 나 한마디 하겠다 하고는

조선 민중과 불교를 망쳐버린 사이또 총독은

죽어서 무간지옥에라도 가야할 사람인데

어찌 이같은 본산 주지회의에서 망발을 하느냐

하고 사자후를 하였다 합니다. 


당시 서슬이 퍼렇던 총독 앞에서

조선 민중과 불교를 위하여 한마디 사자후 한것은

총과 칼을 사용한 독립운동에 못지 않은

진정한 독립운동의 하나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대부분 만공스님의 사후를 걱정하였지만

본산 주지회의 석상에서는 아무 일 없이 마치고

성북동 심우장으로 만해스님을 찾아가서 쉬면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 만공이 말합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만공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셨다 칭찬하고

한마디 덧붙였답니다. 


기왕이면 목소리로만 사자후 하지 말고

주장자를 가지고 한바탕 내리치지 그랬느냐

하고 웃으며 말하니

만공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합니다. 


어리석은 곰은 주먹을 가지고 힘을 쓰지만

숲속의 왕인 사자는 포효 소리 하나로

산중의 모든 짐승들을 항복받지 않던가

하면서 두 스님은 박장대소를 하였다 하니

이 또한 우리 공주가 가지고 있는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입니다. 


만해는 만공에게 어차피 일본은

이 나라에서 물러가기는 할 것인데

그러자면 형님같은 고승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를 하시는 것이 좋겠다 의견을 내고

만공은 그길로 서산 간월도로 들어 가

간절하게 천일기도를 시작하였고

기도 회향후에 정말로 독립이 되었으나

기도를 권한 만해스님은 해방되기 전

심우장에서 입적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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