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을 다 토하고 까무러쳐서 죽게 앓네. 다행하도다. 종사상은 태연히 앉았구나.
선실에 도로 돌아와 눈 감고 누웠더니 대마도 가깝다고 사공이 말하거늘
다시 일어나 나와 보니 십 리는 남았구나. 왜선 십여 척이 배를 끌려고 마중을 나왔네.

퇴석 김인겸 선생이 지은 일동장유가에 나오는 대마도 대목이다. 곰나루21 문화기행단 일행은 일동장유가와 임진왜란의 통한이 서린 대마도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사전에 공주시 석장리 무릉골에 자리한 김인겸 선생의 묘소를 찾아 술 한 잔 올리려고 갔다. 어디가 묘소인지 풀밭인지 표석도 없었다.

일행 중에 한 번 가봤던 구 시인이 기억을 더듬어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찾았다. 허물어진 봉분 위로는 두 뼘도 넘는 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고, 가지 사이로 새들이 선생을 일동장유가를 읊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참으로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기울어진 조그마한 혼유석을 일행과 함께 바로 잡고 생수 한 잔도 옳게 못 드리고 메마른 가슴으로 절만 하고 내려왔다.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김인겸 선생이 누구인가. 장편 기행가사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를 지은 퇴석 김인겸(1707-1772) 선생의 유택이 공주시 무릉동에 자리 한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도 퇴석 선생을 기리기 위한 노래비가 금강 다리 강 언덕에 세워져 있음 또한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쁘니까 누가 누굴 탓하리.

퇴석 김인겸은 57세 때인 영조 29년(1753)에 일본 통신사 조 엄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듣고 보고 느낀 바를 우리글로 적은바, 8,243구의 장편 기행가사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를 지었다.

여기 일동(日東)이란 일본을 말한다. 일동장유가는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모를 사람이 거의 없다.

퇴석의 일동장유가를 스무 해전 국문학자들이 주도하여 공주 금강 다리 언덕에 퇴석 김인겸의 노래비를 세웠다.

노래비에 ‘오늘 선생의 인품과 유운(遺韻)을 사모하는 후진들이 정성을 모아, 생시의 선생이 옷자락 펄럭이며 건너다니시던 이 오얏나루 언덕에 조그만 한 덩이 돌을 세워 기린다’고 적혀있다.

여기에 나오는 오얏나루는 선생의 향리가 가까운 무릉동이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차 한대 근접하기 어려운 곳에 세워져 있어 누구하나 눈 여겨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릉동 개발과 함께 선생의 연고지를 찾아 무릉동 입구에 마땅히 옮겨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무릉동’이라 함은 백제시대의 왕릉이 있다 하여 ‘무릉동’이라 한다는 설과, 무른돌에서 무릉동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낙향한 남궁(南宮)씨들의 집성하여 살고 있다. 무릉동은 고 박동진 명창의 고향 마을이기도 하다.

퇴석은 정묘호란의 척화운동의 얼굴이었던 김상헌 선생의 후손이다. 일찍이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하고, 시련의 어린 시절을 보내다 47세 때인 영조 29년(1753)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당시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종사관인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통신사 조엄(趙曮)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그 뒤 지평현감을 지냈다.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조엄은 구황작물인 고귀마(고구마)를 가져와 양산 통도사에서 시배하였다.

무릉동 김인겸 선생묘지
미루어보건대, 김인겸 선생도 공주 땅에서 고구마를 시험적으로 길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공주의 밤과 함께 김인겸 선생의 고구마를 길러 특화할 필요가 있다.

퇴석의 설화 마을과 함께 고려할 수 있다고 본다. 문학과 문물의 선구자였던 선생님께 삼가 왕생극락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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