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공주 이인면 초봉리에 있는 유림 의병 정란사적비를 소개하고, 비문을 우리말로 올려보겠다 약속했습니다.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란 120년 전 동학이 발발, 동학과 농민군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다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으로 남은 우리 민족사의 비극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당시에 동학과 농민군들을 격퇴시키는 데 관군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힘이 부치자 일본군들의 화력까지 빌려서 전쟁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주 유림들과 주민들이 의병을 조직해 동학교도들을 패퇴시키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그 당시의 유림의병들이 왜 전쟁에 참여하게 됐으며, 어떤 명분과 의리로써 싸웠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내용이 적힌 비석으로 1994년에 공주 노인회와 유림의 후예들이 만들어 세운 비석입니다.

동학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동학 혁명탑의 비문을 전재하기도 하고, 그에 반대되는 이념을 가졌던 분들이 만든 이번 유림의병 비문을 올려두는 것은 두 가지를 다 보고 나서야 각자 자기 나름의 역사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혹 오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전문을 인용하고자 하는 분은 직접 비문을 확인하고, 대조하시기를 권합니다.

공주 초봉리 검바위에 있는 유림의병정란사적비문 내용은 이러합니다.

유아민족은 전통사상으로 충효를 숭상하고, 예의를 존중하여 왔다.
효는 백행지본’이라 하고, 충은 정의지대절이라 하였으며,
예로 질서를 정제하고, 의로서 기강을 정명 하였으니
이에 선현들은 비록 궁색하였으나,
안빈낙도하여 그 본분에 충실하였고
국난에는 살신성인하여 그 대절을 사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천강이 배척되고, 윤기가 사해되며
국불국 이민불민하고, 부불부 자불자하여
세도가 판탕되고, 멸천난륜의 사해로 전락하고 있다.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갑오 동학민란 이후에 국가는 멸망되고
우금 백유연연간에 그 잔혹한 인화를 극복하며
이질 문화에 동화되어 고유의 예의 범백과 의관문물이 변질되고
시습 풍속이 이변되었으며
상금 분단된 국토에 동족상쟁의 영일이 없다.
오호라!
조선왕조 개국 500유년에
비록 유학을 숭상 하였으나
선현들의 가모양책이 실현되지 못하고
종래 탕탕한 왕도에는 실정하였고
내우외환의 정쟁 당화로 현준들은 초야에 은둔하고
탐관오리들의 행패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니
급기야에는 동학당 민란이 창궐하였다.
동학당은 본시 종교집단으로서
당초에 호국안민이라는 기치하에 국정개혁을 표방하고
농궁민을 선동하여 대권에 반란하고 혁명을 획책하였다.
대저 호국안민이라는 명제는 본시에 성웅들의 대지로서
이는 3대요도가 있는 것이다.
첫째, 대본이요
둘째, 대의요
세째, 대법이라 한다.
대본이라 함은 인심, 곧 천심 소재를 말함이요,
대의라 함은 시의로서 곧 대세의 변화를 말함이요,
대법이라 함은 부자간의 인도와 부부간의 가도와
군신간의 국법을 말하는 것이다.
국가라 함은 대세에 의하여 성립되고
인심에 의하여 존속되고
법도에 의하여 인심의 향배로 변화되는 것이다.
고대 혁명사에 의하면
대세에 의하여 국민을 위한 혁명이 있고
대세를 거역하고, 사욕을 위한 무력혁명도 있으며
혹은 집단 반란으로 세상을 소란케 하고
자멸한 집단도 있었다.
동학당은 시폐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감히 선배들이 성취하지 못한
호국안민을 제창하였으니 과연 대세에 의합한 것인가?
당시의 시폐는 과적된 고습으로서 조야가 공환된 사안이다.
국민들은 의연히 대처하고 충의신이 불변하였으니
이것이 대세에 변화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일부지역의 소소집단 난동으로 시국을 소란케 하여
국가에 위해하고 평온을 희구하는 국민과 괴리하였으니
이를 집단반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요는 지자라면 자신의 입지를 성찰하고
경거망동은 자제하여야 하고
진정 애국자라면 국가 장래를 예측하여야 했다.
고어에 '여급여로 해망' 이라는 말과 같이 공멸 하였으니
결국 자신은 물론이요 무구한 다수의 양민을 희생케 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켜 종래 국가도 멸망 하였다.
동학당은 당초 무지 목매한 궁민을 선동하여
농기구와 죽창 등 무모한 폭력을 의세하였으니
그 기세가 막대하였으나
충효사상으로 무장한 유림이 건재하고
500유년 전승하여 온 종사가 비록 국력은 허약할지라도
당당한 국본과 법통이 엄연한 현실을
감히 능멸하고 그 무모한 망동을 자행 하였으니
우리 공주 유림들은 안연히 좌시하지 않았다.
때는 고종조 갑오년 10월 사건이다.
동학당은 성군 자고단하여 전라도지방 관가를 습격 강점하고
그 여세로 충청도를 침범하여 공주 감영을 침범하고자
이인 취병산에 집결하여 이인 찰방을 유린하고
인근 민가에 약탈방화 등 악행을 자행하여 민심과 괴리되었다.
본향은 자고로 충절의 고장으로서 유림들은 전통적인
호국충절로서 단호히 이를 격퇴키로 의결하였다.
유림대표 양공채목은 세전 유가 출신으로서
학문이 고매하여 조야에 명망이 있고
관록을 사양하고 초야에 은일하여 있었다.
이에 반란군의 난폭에 분연히 창의하여
공주 부여 석성 등의 의중을 초모하여 약400여명이 운집하고
어천박씨 문중의 비호 하에 탄천 송학리에 둔거하여 대비하였고
관군은 이인 초봉 후록과 주봉리 산협에 둔진 대치하였다.
반군은 공주로 진군하기 위하여 야음에 하산하고
정오 준비 중임을 탐지하고 유림의병이 기습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이인 구암리 방향 검바위 지점으로 축출하였고
관군이 일제히 출격하여 반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의병과 전후협공하여
잔군은 일패도지하고 용성리 산협을 통하여 계룡면 방향으로 패주하였다.
반군은 경천의 일부군과 합세하여 공주로 진군중
효포리에서 관군과 격전하여 여기서 괴멸되었다 한다.
의병은 시종 관을 보우하여 공주 일우를 방어하고 종래 평온 회복에 공헌하였다.
이에 국조로부터 유림 대표들에게 포공의 은전이 있었다.
유림은 사도 본연의 충의 대절을 다하여
국난에 공헌하여 도의 정신이 소착 하였으니
공주의 전통이요 동방사문의 긍식으로 영세불민하리라.
후학말예들은 감히 소수의 성으로써
영세구전하고저 근찬각석 하노라.
단기 4327년 갑술 10월
남원인 양기덕 찬서
공주노인회 공주유도회 공수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 난리가 혁명이 되고, 혁명이던 것이 반란이 되기도 하니
무엇을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에 앞서 당시의 정황을 가감 없이 바라보고, 스스로 판단하여 삶의 정과 사를 분간하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니 앞서 보내드린 동학혁명탑 비문과 비교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며칠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하신 영규대사와 승병들의 기록물을 정리하면서 정말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항상 경계의 눈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라는 사실에 실감을 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채 300년도 안되어 조선말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 및 피맺힌 일제 강점기 36년을 지나오며 겪었던 우리 선조들의 고통을 보면서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는 민족이 어떻게 망해가는 지를 곱씹어 보아야 하고, 다시는 이 땅에 남의 나라 군대들로 하여금 짓밟히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명심각골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며칠 후에는 기허당 영규대사의 기록을 몇 차례에 걸쳐서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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