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몇 차례 문학 강연을 다녀왔다. 주로 학교에서 불러준다. 학생들을 만나 시와 인생을 이야기하다 보면 내편에서 지레 감동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술술 풀리고 아이들에게도 이야기가 잘 전달된다. 감동이야말로 성공의 예감이며, 그 첨병이다.

특히 지난번 전남 영광군에 있는 삼호중학교에서의 문학 강연이 잊혀 지지 않는다. 처음 나는 너무 거리가 멀어 망설이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담당 선생님들이 어찌나 간청을 하는지 끝까지 안 간다고 할 수가 없어 응하기로 하고 대전서부터 KTX 편으로 목포까지 내려갔다.

실상 이런 일로는 맨 처음 가보는 고장이다. 역까지 차를 가지고 사람이 나와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간단히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연장인 강당에 들어섰을 때 2, 3학년 전원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와 환호로 나를 맞아주었다. 황홀했다.

그 뿐 아니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나의 시를 모든 학생들이 합송으로 외워주웠다. 한편도 아니고 두 편씩이나. 「풀꽃」이라는 시와 「선물」이라는 시. 정말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이렇게 많은, 어리고도 사랑스런 독자들을 만나다니!

안 왔으면 어쨌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학생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이어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해서 다시 한 시간 강연을 했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직원들이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듣는 분들의 자세가 그러하니 말하는 쪽에서도 신이 나고 즐거웠다.

문학 강연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또 그럴듯한 남도식 토속식당에서 하면서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처음 나의 시 「풀꽃」을 알아보고 학교에 알린 사람은 국어담당교사인 이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3년 전 어느 날 이호 선생님이 「풀꽃」 시를 액자로 만들어 복도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하나 둘씩 그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뒤 전교생이 외우고 전교직원이 외우는 시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학부형들까지 외운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 학생들에게서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금은 왁살스럽고, 소란스럽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아이들이었는데, 점점 순해지고, 자존감이 생기고, 타인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것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나는 문학 강연을 마치면 문학 강연을 한 시간만큼 길게 사인을 하는 버릇이 있다. 이름은 물론 차근차근 나의 시 한 편을 써주고, 그 사람이 바라는 축복의 말을 써주고, 또 조그만 그림까지 그려준다.

뒷줄에 선 사람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나는 더욱 정성을 들여 사인을 해준다.

왜 이러는가? 일단은 나를 기억해준 사람들에게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그 다음은 앞으로도 오래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으로 그런다.

잊지 말아달라는 것! 그것처럼 간절한 부탁은 없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7년 전 실지로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의사도 정작 죽는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괴로운 점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잊혀 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세상을 향해 소리쳐 말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죽을병에 걸려 앓고 있다고. 나를 오래오래 잊지 말아달라고.

그러기에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비석을 세워 그의 이름과 공적을 새긴다. 좀 더 공적인 인물, 업적이 있는 인물은 기념관을 세우기도 한다.

모두가 잊혀 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들이다. 실상 살아서 잊혀 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은 살아서 짓는 무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꽃이 진다고 잊어본 적 없다’. 이것은 정호승 시의 한 구절을 빌려다 사용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간 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즐겨 사용됐던 문구이다.

세월호 참사를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미안합니다’란 문장 뒤에 ‘잊지 않겠습니다’란 말을 사용하여 그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때 ‘잊지 않겠다’는 표현은 그 어떤 말보다 강한 위로의 메시지가 되고, 그 어떤 사랑의 맹세보다도 분명한 서약이 된다.

화가이기도 했으며 시인 아폴리네르의 애인이기도 했던 마리 로랑생이 썼다고 전해지는 「잊혀진 여인」이란 시도 결국은 잊혀짐의 두려움에 대해서 쓴 작품이고 우리나라 시인 김춘수 선생의 작품인 「물망초」도 비슷한 내용이다.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 하늘의 별일까요?
꽃 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 나를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 김춘수,「물망초-forget me not」전문

갑갑한 여자보다
가엾은 여자는
쓸쓸한 여자예요

쓸쓸한 여자보다
더 가엾은 여자는
앓아 누은 여자예요

앓아 누은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예요

버림 받은 여자보다
한층 더 가엾은 여자는
의지할 곳 없는 여자예요

의지할 곳 없는 여자보다
더욱 더 가엾은 여자는
쫓겨난 여자에요

쫓겨난 여자보다
더더욱 가엾은 여자는
죽은 여자예요

죽은 여자보다
정말로 가엾은 여자는
잊혀진 여자에요.
―마리 로랑생,「잊혀진 여자」전문

그러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잊혀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상관이 없다.

잊혀 지지 않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 때 정성스럽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올해도 봄의 끝자락, 문득 다녀온 남쪽의 삼호중학교란 곳, 그 곳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한다. 더구나 나의 시를 외우면서 오래 동안 지상에서 살아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다. 부디 아름답고도 건강한 세상 잘 살아주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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