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사월 초하룻날 불자님들이 법회 후에 불기며 향로 촛대를 닦으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요령도 그때 닦아 놓으셨는데, 처음 닦고 나서 반짝거리는 모습이 마치 얼굴을 들이대도 그대로 비칠 정도로 번쩍입니다.

일단 광약을 천에다 묻혀서 때를 벗겨낸 다음 신문지와 마른 수건들을 사용하여 팔이 아프게
몇 번을 닦으면 모든 일이 마무리됩니다. 결국 광약은 때를 벗기는 도구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고 반짝이는 요령을 오늘 오전에 불공을 모시느라 사용을 하고 보니 손에 저와 같은 검정이 묻어납니다.

때를 벗긴 광약을 아무리 몇 번 닦아내도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상태로 저렇게 있다가 오래지 않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그것이 다시 때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참으로 누가 무엇을 닦았다 하리요.

바꾸어서 말하면 때는 번뇌요, 악이라 하겠고 광약은 정진이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진으로 번뇌를 이겨내는 노력을 하고, 선을 행하여 악을 짓지 않게 한다는 데는 누구라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광약이 다시 때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정진이나 선이 아무런 상相이 없이 하는 것이 아니면 정진이나 기도 혹은 선행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마음을 가리는 번뇌가 되어버리는 것이니 공부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것입니다.

악을 없애겠다고 하면서 악에 물들기 쉬우므로 우리 스승께서는 "선도 행하지 말라" 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스승이시여 왜 선을 행하지 말라 하시나이까?" 하고 묻는 제자에게 "선도 행하지 말라 하거늘 어찌 악을 행하라 하겠느냐" 하시는 말씀은 역설이기는 하여도 짐짓 선을 행한다 하는 무리들이 오히려 선으로 인하여 악이 됨을 모르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육조대사가 오조홍인대사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고 나서 뒤를 쫓아온 혜명이라는 스님에게 이르는 말이 그것입니다.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을 때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실은 선이라는 것도 악이 있어서 일어난 것. 악이 없어진 자리에 선도 같이 없어져야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선을 행하였다 이것이 선이다 하는 관념의 상에 사로잡히기 쉽고 그런 상이 굳어지면 그에 반하거나 그 범주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이라거나, 악이라는 규정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 선과 악이 다 공한 자리에서 몰록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물거품이요, 허깨비인데 우리는 그 무슨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고 다투니 중생의 마음에 한가할 날이 별로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도 마찬가지요, 중생과 부처도 마찬가지니 이 모두가 공한 도리에서 나투었다가 잡으려 하고보면 “내가 언제 그랬니” 하고 없어지는 아지랑이와 그림자 같은 것이니 그러한 모든 것이 오온개공의 성품인줄 알고 보면 만 가지 법이 무생이요, 비법이며, 비비법 임을 알것입니다.

흔히 좌와 우,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애시 당초 처음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 몸이 존재하기 시작함으로 해서 저절로 생겨난 것인데 우리는 좌우는 논할 줄 아는 마음을 갖기는 하되, 이 몸 자체가 좌도 아니요, 우도 아닌 것이어서 무어라 이름지을 수 없는 것임을 잊기 쉽습니다.

주방세제라고 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방울만 묻혀서 가볍게 문지르면 새로 산 주방용품이나 싱크대가 된다고 선전하는데 오래 찌들은 때를 한순간에 녹여내는 세제는 우리가 그저 ‘세제’라고 부르면서 유해성을 하나하나 따지지 않으니 그렇지 실제로는 그 세제가 남기는 독성과 찌꺼기가 더 몸에 해로울 수도 있는 것임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닦아내지 말고 씻어내지 말자는 말은 아니고, 친환경적이면서도 인체나 생명에 덜 해로운 세제를 써서 자연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불기에 남은 광약의 때나 손에 묻은 검정은 물로 씻어 내거나, 한번 삶아서 닦아버리면 됩니다.

우리네 마음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마음의 번뇌도 지혜의 불빛으로 밝게 비춰 있는 곳을 확인한 뒤에 자비의 손길로 부드럽게 떼어 내는 작업을 하되, 상대는 때라는 인상이나 나는 지혜라는 아상 및 나의 덕이라는 중생의 마음과 오래 간직해야지 하는 수자상의 마음을 갖지 않고 행하는 연습을 쉬지 않으면 지혜와 자비와 때와 마음이 본래부터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와 마음이 차별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올 초파일에는 우리 모두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모쪼록 변해 바로 상락아정이 나타나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하고 깨달아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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