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다. 물고기가 사는 계곡은 물살이 빠른 곳이었다. 물살에 쓸려 내려온 작은 벌레 같은 먹이들이 많이 내려왔다. 

물살 가운데서 입을 벌리고만 있어도 배를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물고기는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여름 갑자기 산사태가 나서 계곡 위쪽이 무너져 내렸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살은 예전처럼 빠르지 않았고 물속에는 벌레가 없었다.
이제 물고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자기가 익숙한 방식을 쓸 수 있는 물살이 빠른 곳을 찾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험이다.

아니면 방식을 바꿔서 자기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먹이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이 역시 모험이다. 모험, 변화 없이는 이 물고기는 생존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또다시 산사태가 나서 원래의 환경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전에 공주는 경부선 철도역 건설을 거부했다. 애초 일제 때 수탈을 위해 일본이 놓는 철도를 거부한 건 양반고을로서 너무 당연하고, 잘한 일이다.

그런데 해방이후로 철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공주에는 철도역이 생기지 않았다. 덕분에 대전부터 예산, 논산, 연기 모두 철도역이 있지만, 한 가운데 있는 공주는 없게 되었다. KTX 역사는 대전, 아산으로 갔다.

물론 지역 리더십의 문제도 있다. 어떤 시설을 끌어오느냐를 가지고 리더십을 평가하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경쟁에서 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먼저 공주의 모습이 위에 말한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살은 변했는데 여전히 같은 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변화의 계기가 주어졌을 때 일단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버릇이 든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변화를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버릇이 된다. 사람은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그 결정이 잘한 것이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같은 식의 결정을 내리기 쉽다.

심리학에서 이미 실험으로 입증된 것이지만, 사람은 자기 태도가 옳다는 걸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서 뻔히 보이는 사실도 외면할 때가 있다.

다수의 목격자에게 길에 휴지를 버리는 사람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단 한쪽은 불량한 외모를 지닌 젊은이고, 한쪽은 신부님 복장을 한 실험자다.

빤히 보이는 데서 휴지를 버리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을 때 "신부님이 버리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반 가까이나 나왔다는 결과가 있다.

신부님은 그런 일을 할리 없다는 평소의 믿음이 실제로 보이는 현실을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삭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변의 고향 사람에게서 "공주가 뭐가 부족해서"나 "이정도면 됐지" 라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그러면서 함께 많이 나오는 얘기가 ‘양반동네’라는 표현이다.

물론 '양반 동네'라는 것은 나쁜게 아니다. 하지만 혹시 신부님이 휴지를 버리지 못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고정관념처럼 우리가 현실의 변화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위의 실험에서 신부님이 아니라, 그렇게 분장한 일반인이라는 걸 알려주면 버린 종이의 구체적인 모양까지 기억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역의 발전, 미래의 경로를 위해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는 건 우선적으로 지역 리더십, 지역 자치 행정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 걸 할 역량이 없거나, 겁이 많으면 작은 이벤트들로 뭔가를 하고 있는 시늉만 하게 된다.

지방자치의 조건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다. 위임되는 권한이 많아지면서 할 일은 늘고, 변화가 지속화되면서 처리하고 판단할 정보와 정책도 당연이 늘어간다.

또 하나 변화에 대한 반응도 여러 가지인지라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들로 나뉘고 있다. 내 고향 공주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같은 농업이라고 해도 과거처럼 논농사를 짓는 사람과 시설재배를 하는 사람, 소와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민들의 정책과 지원에 대한 우선순위가 각기 다르다.

지역의 변화방향에 대해서도 위 이야기의 물고기가 택할 수 있는 대안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대로’부터 ‘바닥부터 바뀌어야’ 까지 여러 층이 있는 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호관계의 형태 자체가 달라져서 자연부락,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요구 정도만 파악되던 시절과 다르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똑 같이 동네 재개발에 찬성하는 사람의 속내도 들여다보면 한 사람은 값 오른 땅을 팔고 떠나려고 하고, 한 사람은 거주조건이 좋아지고, 우리 동네가 좋아지는 걸 바래서 일 수 도 있다. 그럼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개발전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지역을 가도 이런 사례가 많다. 크게는 새만금 개발방향에 대한 갈등이나 제주 군항 건설에 대한 이해의 대립 등에서 부터 시작해, 작게는 동네 길을 포장하는 데까지 매사 마찬가지다.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선택 가능한 정책의 수도 다양해지고, 그 결과에 대한 이해관계도 복잡해진다.

모두를 단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변화를 수용하고 더 나은 단계로 가야 한다는 대전제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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