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내와 면소재지 사지순례를 하면서 동혈사와 공주시 탄천면 미암사에 전하는 쌀 바위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두 사찰에는 스님이 한명이거나, 객이 와서 두 명 혹은 신도가 온다든지 하면 그 숫자에 맞추어 쌀이 나오는 신묘한 바위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식구食口’ 즉 밥을 같이 먹는 사람 수에 맞추어 저절로 쌀이 나오는 자동쌀통 같은 것인데 그만 욕심이 많은 스님이나 불자에 의해 조금 더 쌀을 내고 싶은 욕심으로 쌀 바위를 파헤치니 그 뒤 부터는 아예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절에 사는 스님들이 아무리 험한 곳에 있어도 열심히 기도 정진을 하면 자기 먹고 수행할만한 분량의 수요가 공급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그에 더하여 작은 욕심이라도 더 내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공급도 끊어지게 되면서 공부도 그만이라는 것을 말하는 교훈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수행자나 종교인들이 물욕에 마음이 쏠리면 물욕의 숲에 파묻혀 청정함을 잃게 되고, 그리되면 애초에 발심하였던 상태로 되돌아감은 정말로 어려운 일임을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허공을 나는 새가 미리 며칠 먹을 것을 비축하지 않고, 그 날 그날의 수고에 해당하는 먹이만 얻으면서도 자유로이 살아가는 것처럼 수행자들도 그 어디에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몸과 마음이 되어야만 해탈의 나루를 향한 쉼이 없는 정진이 가능하게 됨은 생각합니다.

오늘도 몇몇 분들과 안동 하회마을 도산서원 봉정사를 다녀오며 종교인과 종교단체가 돈과 친하여 부자가 되고, 건물 외형이 화려하고, 커지면 도와는 거리가 멀어지니 ‘요즘 우리나라의 종교단체를 보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지적에 함구무언일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옛날 스님들은 자신을 상대에게 말할 때 스스로를 ‘빈도貧道’라고 칭하였다 합니다.

‘가난한 수도인’이라는 의미가 될 것인데 빈도에 두 글자를 넣어 붙이면 ‘청빈낙도’라는 말이 됩니다.

‘맑은 가난에 도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 한 떼기도 없지만, 그 맑음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으며, 즐거움을 느끼는데 있어서는 요란하지 않아도 수도인으로서 도의 맛에 침잠하여 기쁘고 즐거운 것은 그 누구와 비교하여도 부족하지 않으니 오히려 맑은 가난을 즐기면 즐길수록 도의 창고는 가득하게 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요즘에는 절에도 부자스님과 가난한 스님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물신주의에 빠져 본분을 잃은 이들이 적지 않지요.

그런데 그런 궂은 모습에 필이 찍혀서 나쁘게만 보려하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익되는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나 종교인들의 궂은 면을 보는 눈을 돌려 종교 본래의 가르침인 지혜와 자비 사랑의 정신으로 생활 속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인이요, 도를 즐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미디프로인가에 보면 ‘그러거나 말거나’ 라는 노래로 세상을 풍자를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던데 정말로 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만 잘하고, 나만 올바른 눈을 잃지 않고 세상을 바로볼 줄 알면 눈이 닿는 곳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들어올 것이요, 만나는 사람 이르는 곳마다 참다운 즐거움이 보일 것입니다.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주고받았다는 농弄인 ‘부처 눈에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는 아주 단순한 가르침 속에는 무궁무진한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소박하고 단순하며 꾸밈이 없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무한 감동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억지로 꾸미고 만들고 보기 좋게 하자면 무엇이라도 만들어 내는 재주가 사람에게 있어도 그 사람이 만들어낸 모습에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은데 그것은 인위라고 하는 가식과 욕심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무위의 반대개념인 ‘人爲’라는 말은 합하면 ‘거짓위僞’자가 됩니다.

자연이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행하는 것은 진실보다는 거짓에 가깝다고 하는 것을 ‘僞’라는 글자 한자가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쌀 항아리에 쌀이 바닥이 나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흔들림 없이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다 될 만하면 누군가 수요를 공급하는 반연이 생기게 됨은 외로운 곳에서 수행하고 정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심심 미묘하고, 난사의 한 일임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오늘 안동을 다녀오면서 인위보다는 자연스러움이 훨씬 더 우리들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며 뭇 생명이 깃들어 살게 되는 터전이 되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남들 잘한 모양은 힘써서 배우고, 부족한 모습에서도 그러면 안 되지 하는 배움을 일으켜야 하는데 잘못하다가는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커 보이는 우를 범하기 쉬운 것이니 모름지기 삼가고, 조심하며 노력할 일입니다.

원효대사는 ‘수도인이 탐욕을 부림은 수행자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부자라 소리 들음은 군자의 웃음거리다’ 하셨는데 많이 먹어도 하루 두 때의 끼니면 족하고, 집이 크다 해도 자는 공간은 반 평 방이면 넉넉한 것이니 넘치는 복의 수용을 올바르게 하는 지혜를 갖지 못한 이에게는 부귀와 권세가 오히려 자기 업만 가중하는 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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