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 TV에서 ‘고려 거란 전쟁’드라마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11세기 거란족은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었다.

그런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쳐들어 왔고 이로 인한 고려의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2차 침입 때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한다. 몽진(蒙塵)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또 다른 말로 파천(播遷)이라고도 한다.

현종은 1010년 음력 12월 28일 나주로 피난지를 정하고 원정왕후 김씨, 원화왕후 최씨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현종을 호종한 사람이 지채문 장군이다.

나주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전쟁 중에 지역 호족 오다련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다.

또 적통 장자인 2대 임금 혜종의 출생지이다. 그러므로 나주는 왕실의 어향(御鄕)이기도 했다.

현종은 이곳에 가면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것으로 생각했다. 후에 현종은 자신이 위기일 때 피난처가 되어주고 힘을 실어 주었던 나주(羅州)와 전주(全州)의 앞글자를 따 전라도(全羅道)를 만들었다.

원정왕후는 임신 중이었으므로 나주까지 함께 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현종은 천안에서 그의 친정인 선산(善山)으로 보낸다.

천안을 거쳐 공주에 피난 행렬이 이르렀을 때 절도사 김은부가 공주목 경계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다.

김은부는 현종을 정중히 모시고, 음식과 의대와 토산물을 받쳤다. 현종은 이때 처음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 군대가 계속 현종을 잡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공주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이튿날 길을 재촉하였고 왕이 파산역(巴山驛- 지금의 논산 부근)에 도착했지만, 역리들은 모두 달아나버렸고 수라간에 먹을 것조차 없자, 김은부가 음식을 올리며 정성껏 받들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에 지방 행정구역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12목(牧)을 설치하고 목사가 지방을 다스렸으나, 거란의 침입 이후 군사 중심의 절도사 체제로 개편하였다.

절도사는 지방행정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목적은 지방호족에 대한 견제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체제라 할 수 있다.

김은부상. 출처:다음 블로그 예연 정승연
김은부상. 출처:다음 블로그 예연 정승연

고려 초기 아직도 전국에 많은 지방호족이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고려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호족들이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

현종은 몽진하는 과정에서 지방호족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개경에서 공주까지 오는 동안 어떤 호족도 임금의 피난 행렬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특히 양주에 이르자 호족이 “왕께서는 나를 아십니까?” 하며 조롱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고려가 아직도 지방을 완전히 통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피난 도중 들었으나, 현종은 나주까지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다. 환도하는 과정에서 다시 공주에 들러 6일간 머물면서 김은부의 환대를 받는다.

이때 그는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올리게 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맏딸은 현종과 혼인하게 된다. 그녀가 바로 현종의 아들이자 고려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의 어머니인 원성왕후다.

김은부는 현종의 국구(임금의 장인)가 되어 개경으로 올라오게 된다. 형부시랑이 된 김은부는 거란의 황제 성종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 근처 내원성에 이르렀을 때 거란은 여진을 시켜 그를 억류시켰다. 7~8개월 동안 여진에 갇혀 모진 고충을 겪다가 간신히 고려로 돌아왔다.

이후 김은부는 승승장구하여 중추원사 호부상서까지 벼슬이 이른다. 이때 둘째 딸과 셋째 딸이 현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다. 딸 셋이 모두 왕후가 된 것이다. 둘째 딸 원혜왕후는 11대 문종을 낳았다. 셋째딸은 원평왕후다.

그는 세 딸을 임금에게 시집 보낸 국구로서 고려발전을 위해 노력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개경에 올라온 지 5년이 되던 해 1017년 사망한다.

현종이 이렇게 김은부에게 벼슬을 하사하고, 세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위해 헌신한 고마움에 대해 보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절도사로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했던 측면도 엿볼 수 있다.

김은부의 출현은 고려가 왕건의 자손들끼리‘용손(龍孫)’이라 하여 서로 혼인하는 풍습, 즉 근친혼이었던 사회에 처음으로 외척의 등장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높은 벼슬이나, 외척의 신분을 떠나 자신의 맡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 그의 고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