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와 나는 서로 뜻이 맞아 알콩달콩하다가도 순간 틀어지기가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너랑 똑같은 딸 하나 낳아봐라.” 하며 야단쳤고, 이에 질세라 나도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며 톡 쏘아붙이곤 했다. 물론 냉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하고 얻은 첫딸은 매사 엄마에게 기대던 나와 달리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하며 자랐다. 엄마의 유일한 나무람이었던‘너랑 똑같은 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 딸이 지난가을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이후 아기가 분유를 잘 먹지 않는다며 전화상으로 한두 번 물어오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내 이야기는 귀 넘어 들은 듯 반응이 시큰둥했다. 주변에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스스로 키우겠단다.

유튜브와 또래 엄마들 커뮤니티에서 충분히 배워나가면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딸에게 조금은 서운했다.

섭섭함을 내비치는 내게 친구들은 원하지 않는 데 애쓰지 마라,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게 거리를 두어야 한다,

친정엄마를 과소비할 기회를 차단해라 등등 딸과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며 자신들의 경험담을 마구 쏟아냈다. 귓등으로 스치는 친구들 이야기 속에 딸들과의 소소한 마찰에 대한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한 친구는 손주 돌보기도 벅찬데 집안일까지 요청하는 딸에게 너희 집 가사도우미 아니라고 불뚝 마음속 말을 내뱉었단다.

지나친 요구에 속이 상했지만, 딸과 불편했던 상황이 밤새도록 복기 되어 점점 더 맘이 좋지 않았단다.

또 다른 친구는 이미 정해진 약속이 있어 손주를 돌볼 수 없다고 거절했더니 한동안 딸이 연락을 끊더라고 했다.

딸에게서 도움을 요청받지 못하는 나에게 “좋은 줄 알라”고 하며 “행여 먼저 나서서 도와주지 말라”고 당부까지 곁들였다.

나는 아이 키우면서 친정엄마에게 수시로 도움을 요청했었다. 엄마는 늘 1분 대기조였다. 한 번도 다른 일 때문에 오지 못한다거나“어렵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아이를 돌보아 주러 오셨지만, 집안 허드렛일을 모두 정리하고 식사 준비까지 해놓으셨다. 엄마가 다녀가신 날에는 주렁주렁 매달렸던 집안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은 엄마가 해놓은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어 깨끗하게 닦아라, 물건들 제자리에 잘 놓아라, 세탁물 함부로 세탁기에 돌리지 말아라, 하며 내천(川)자 그려진 이마로 엄마에게 싫은 소리도 해댔지만, 엄마는 항상 아무렇지 않게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엄마는 내게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런 엄마를 물과 공기인 듯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부분 엄마가 그러했을 텐데 지금 내 친구들은 딸들의 지나친 엄마 기회를 제어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딸들로서도 예전의 우리처럼 친정엄마에게 마구 의존하지는 않는다. 지나치다 보면 서로 간의 관심과 간섭이 타인과 결이 다른 불편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손잡으려 애쓰지 말자며 마음 다독이던 중 딸이“코로나에 걸렸다”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진심으로 친정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하며 부리나케 딸에게로 향했다. 힘드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딸은 날 보자마자 젖병 기구 사용법부터 이유식 데우는 법, 우유 먹이는 시간 등등 끝도 없이 알려주었다.

그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누워있으라고 하곤 손주를 업고 거실에서 주방으로 분주히 오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척척 해나갔다.

집에서는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싫은 적도 많았는데 딸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힘이 절로 솟는 듯했다.

손주에게 이유식 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지 딸은 눕지도 못하고 방문을 열어놓고 내 행동하나 하나에 잠긴 목소리로 또 다시 잔소리를 해댔다.

이유식은 전자레인지가 아니라 찜기에 데워라, 흐름이 끊기지 않게 먹여라, 아기 그릇은 따로 분리해서 닦아라! 세제도 수세미도 아기 것은 따로 써야 한다는 등등. 딸과 나는 마치 주인마님과 무수리 같았다.

스멀스멀 불편한 심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유식을 먹이고 나니 손주가 뱉어놓은 잔여물들이 식탁, 의자, 바닥 여기저기 흩어졌기에 옆에 있는 물휴지로 닦아냈다.

그걸 보던 딸은 곱지 않은 톤으로 “엄마, 그건 소독용이지? 막 쓰는 물휴지는 옆에 있잖아!”라고 잔소리를 했다. 순간 참았던 속내가 얼굴에 붉게 올라왔지만, 꾹 누르며 애써 안 그런 척했다.

우리 엄마도 지금 내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텐데, 아니 오히려 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가 된 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철없는 어린아이 투정으로 치부했는지 모른다.

딸이 불편하지 않게 그저 묵묵히 돕기만 했던 엄마의 그 시간이 떠올라 이제야 미안하고 죄송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우리 엄마 마음을 가져보려 애를 써보는데 “엄마! 엄마! 엄마…!” 또다시 딸의 잔소리가 따발총처럼 쏟아졌다. “어이구, 그냥….” 목까지 올라온 불평을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켜버렸다.

꼭“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 보라”는 엄마의 말은 맞았다.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 딸이 그 시절 나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쏘아붙였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시각만큼은 엄마처럼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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