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달이나 되는 듯, 길고 힘든 한 달이 지나갔다. 올해로 100세가 되신 친정아버지께서 침대에서 내려오다 넘어지시는 바람에 고관절 대퇴골이 골절되어 우리 형제자매들은 정신없이 바쁜 한 달을 보내야 했다.

새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아버님은 자식들을 불편케 안 하시려고 실버타운에 들어가 지내셨다.

주말이면 특별한 볼일이 없는 자식들은 모두 모여 아버님을 모시고 외식을 하기도 하고 춥거나 덥지 않은 계절에는 우리 농장에 모여 아버님과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몇 달 못 모시고 지내던 차 사고가 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도 응급차 안에서 서너 시간을 대기하다 간신히 격리 병실로 들어가고 PCR 결과가 나온 후에라야 정밀검사와 함께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긴 시간 고통스럽게 지내시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이 졸아든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것일까?

고통 때문에 수술을 안 할 수도 없고 연세가 있으시니 불안한 마음으로 수술실 앞에서 대기했는데 연세에 비해 수술 결과가 좋다고 걸으실 수 있겠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수술실에서 입원실로 모시고 와 신음하는 아버지를 곁에서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하루를 지냈다. 응급차에서부터 격리 음압 병실을 거쳐 1인실에 대기하다 수술하시는 3~4일 동안 녹초가 된 내 몸도 추슬러야 하겠기에 간병사를 구해 아버지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검사를 24시간 안에 해서 음성이 나와야만 간병도 교대할 수 있으니 자식들이 서로 교대할 입장도 못 되어 아버지께는 죄송스럽지만, 붙박이 간병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매일 전화와 영상통화로 아버지 회복 상태를 체크해 보며 자칭 간병 달인이라는 분에게 일당도 정해진 가격보다 더 주며 부탁했건만 10여 일이 지나 퇴원한 후 확인해 보니 수술 부위보다도 더 아파하시는 곳이 기저귀 때문에 아래에 생긴 습진이었다.

“기저귀를 막 잡아 빼, 인정사정 없이.”

“잠깐 나갔다 온다더니 다섯 시간은 걸렸나벼.”

설마 돈 받고 일하는 분이 그리 오래 비웠으랴만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으면 그리 길게 느끼셨을까. 말씀 하나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부분 퇴원하시게 되면 재활병원으로 모시게 되건만 막내딸이 절대로 병원으로는 못 모신다고 자기 집으로 당분간 모실 테니 언니들이 도와 달라고 한다. 노인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가면 대부분 못 일어나시고 고통스럽게 지내시다 돌아가시는 분이 많더라고.

그러나 아버지께서 100세가 되시니 이젠 자식들도 노인이다. 막냇동생도 70이 다 돼가니 자매들 모두가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겨 겨우 자기 몸 추스르는 정도인데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냇동생의 마음 씀씀이 고맙기도 하고 모두 마지막 효도려니 생각하며 간병에 나섰다.

작은언니는 한 달 휴가를 받아 와 있고 큰언니는 출퇴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며 숙박을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대소변을 치우려면 두세 명이 대들어 아버지를 추스르고 씻기고 약 바르고 방안 환기를 시키고 야단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아프다” 하시면 수시로 주물러 드리고 잡수실 것 준비하랴 서너 명이 해도 힘들었다.

낮에는 그나마 좀 대화도 하고 점점 좋아지시는 것이 보여 힘든 딸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주시는데 밤만 되면 딴사람이 되셨다.

5분 10분 간격으로 아프다 소리를 지르시고 잠을 못 주무셨다. 수면 유도제도, 진통제도 다 소용없었다. 그게 바로 ‘섬망증’이라는 거였다.

딸들은 피로가 쌓이고 잠이 모자라니 비몽사몽 힘이 들었다. 낮에 좀 자보려면 밝아서인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하는 수 없이 아버님에게 신경과 약 처방을 받아 드시게 했다. 그러나 그 약을 드신 후로는 밤이면 축 늘어져서 안 아픈 다리조차 디딜 수가 없으니 변기에 앉히기가 더욱 고역이었다.

그제야 노인병원에서 기저귀를 채우고 변을 보게 한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주물러 드릴 수도 없고 한 명이 여러 명을 돌봐야 할 테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심장판막 수술을 한 둘째 언니가 아버지 식사 당번으로 전복을 삶아 그 물로 죽을 끓여 수시로 드시게 하고, 부지런한 막내딸의 정성으로 아버지는 딸 집에서 한 달을 채우고서야 고통과 섬망을 이겨내셨다.

그렇게 늙은 딸들의 간호를 받으며 많이 회복되셔서 실버타운의 아버지 방으로 돌아오실 수가 있었다.

하나 아직 걷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큰 불만 껐을 뿐이다. 휠체어로 방에서는 잘 다니시지만, 아직 혼자 계실 만큼은 안 되어 간병사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간병사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복지가 아주 잘 되어있어서 힘든 일은 모두 기피한다고 한다. 수소문해서 야간 간병사만 간신히 구했다.

다행스럽게도 실버타운 안에 주간보호센터가 있어서 좀 회복되실 때까지 낮 시간에는 그곳에 가 계시도록 하고 야간에만 간병사가 간병을 해드리게 했다. 아버지가 잘 견디어 주실지….호출하면 달려가야 할 대기조로 딸들은 우선 물러났다.

한 달 동안 녹초가 된 실버 딸들은 다가올 자신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해 보며 각자의 노후를 더 걱정하고 있다.

아버지는 7남매나 두셨으니 가능한 일인데 자식을 하나, 둘을 둔 우리는 이다음 어쩌나 걱정이다.

그나저나 효도하기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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