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8년(1418년) 6월 3일은 충녕대군에게 있어서 가장 긴 하루였다. 그러나 이날 태종이 행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 평소 그의 성격답게 과감하고 기민했다.

그는 세자 이제를 폐하고, 차기 세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양녕의 아들과 현명한 사람(충녕대군 지칭) 사이에서 잠시 방황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곧바로 평정을 되찾고 충녕대군 이도를 세자로 결정하는 과단성을 발휘했다.

그리고는 세자 책봉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밀어붙였다. ‘세자 교체와 같이 중차대한 일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된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파천황破天荒의 사건: 하루아침에 조선의 세자가 뒤바뀌다!

태종은 장천군 이종무를 부른 후, “너는 지금 곧 종묘로 달려가서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 이도를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 사실을 고하라”고 지시했다.

또 상호군 문귀를 이제에게 보내서 그가 폐위된 사실을 통보하게 했다. 그리고 세자 책봉의 의례를 준비할 봉숭도감封崇都監의 설치를 명하고, 찬성 최이와 참판 이적을 제조提調로 임명했다.

이 모든 것이 1418년 6월 3일 하루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2주일이 흐른 태종 18년(1418년) 6월 17일, 세자 이도에 대한 봉숭행사가 열렸다.

이로써 충녕대군 이도는 태종의 공식적인 세자로서 조선 역사의 전면에 급부상했다. 이날 태종은 세자 이도에게 책문冊文을 내렸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세자와 경빈에게 책보冊寶를 내려주고 경내境內를 사유赦宥하였다. 세자에게 내려준 책문은 이러하였다. ...<중략>... 너 충녕대군은 관홍寬弘 장중莊重하고 효제孝悌 겸공謙恭하여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도道를 지켜 공경하고 삼가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하니, 나라 일을 부탁함이 마땅하고, 신민들이 촉망하므로 이 때문에 너를 책봉冊封하여 왕세자로 삼노라. 아아! 하늘은 밝은 덕이 있는 자에게 복을 주고 신神은 지극한 정성을 흠향하니, 제사를 주장하고 종사를 계승하되, 오히려 지워진 짐이 어렵고도 큰 것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임臨하여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 길이 복록福祿의 평안을 누릴지어다.” ...<중략>...』

◇ 출처 : 태종실록 18년(1418년)/6월/17일

세자 이도 또한 전箋을 올려 부왕께 사례했다. 그런데 이도가 태종에게 올린 사례의 글을 보면, 폐세자가 된 맏형 이제에 대한 미안함이나 세자 자리를 진심으로 사양하는 대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도는 자신이 세자로 선택 받은데 대해 감격하고, 향후 부왕의 은덕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다.

이것을 보면, ‘이도가 세자 이제의 잇따른 비행非行과 실책을 보면서 나름대로 차기 세자의 꿈을 키워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실제로 태종 즉위 초, 시독侍讀 김과가 태종에게 ≪대학연의≫를 강론하던 도중, 충녕대군과 효령대군을 가리키며 “두 왕자도 장長을 다투는 마음이 있다”는 말을 했다가 심한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이도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는 세자 이제의 행동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면서 까칠하게 대했다. 그러나 정작 세자 책봉과 군왕이 된 이후에는 이제의 온갖 추문과 비행을 감싸고 보호해주었다. 이러한 이도의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태도 역시 그가 군왕 자리를 놓고 세자 이제와 치열하게 경쟁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된다.


『“남면(南面; ‘임금이 자리에 앉음’이라는 뜻)이라는 뜻하여 정좌正坐하시고 이에 책명을 반포하여 세자를 세워서 근본을 바로잡는데, 어명이 신의 몸에 그릇되게 미치니 진실로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여 더욱 감격함이 깊습니다. ...<중략>... 이 용렬한 사람에게 명하여 높은 지위를 책임지게 하시니, 심은 삼가 마땅히 부탁하신 책임이 가볍지 않은 것을 생각하여, 싫어함이 없이 또한 이를 보전하겠으며, 지극히 간절한 훈계를 받들어 길이 잊지 않기를 맹세합니다.”』

◇ 출처 : 태종실록 18년(1418년)/6월/17일

한편, 이도를 차기 세자로 지목한 태종은 6월 4일, 폐 세자 이제의 서연을 맡았던 보덕 이하의 관직에 대한 파면조치를 단행했다. 그것은 폐 세자 이제의 서연 교육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대신들에게 일종의 연대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6월 5일, 태종은 이도에게 세자 임명장을 수여하고, 내관 이촌에게 명하여 양녕대군과 부인 김씨의 관교官敎를 광주로 보냈다. 또 같은 날, 세자 이도에게 제왕학을 가르칠 새로운 서연관(예: 세자좌빈객 유관, 세자우빈객 맹사성, 좌부빈객 이지강, 우부빈객 권우, 보덕 김익정, 필선 정초, 문학 이수 등)들을 임명했다. 그만큼 태종에게는 이도에 대한 왕세자 교육이 시급한 문제였다.

세자 이도에 대한 첫 번째 서연이자 마지막 서연은 봉숭 행사를 치른 지 3일이 지난 6월 20일에 열렸다. 그러나 ≪실록≫에는 “왕세자가 처음으로 서연을 열었다”는 기록(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6월/20일)만 있을 뿐, 서연에 참여했던 인물과 서연에 쓰였던 교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새로 임명된 서연관들이 대거 참여했을 것이고, 교재로는 사서四書가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다.

『서연관 등이 사서四書를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조계朝啓하던 신료들에게 이르기를, “세자의 유모가 일찍이 궁중에 들어와서 정비(靜妃; 원경왕후 지칭)에서 사뢰기를, ‘보통 때에 독서하여 밤 2경更에 이르러서야 파罷합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는 줄 알고 내가 학문을 권장하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하니, 좌우에서 모두 탄복하였다.』

◇ 출처 : 태종실록 18년(1418년)/6월/10일

또 이도는 6월 21일부터 정식 세자로서 조계朝啓에 참여했다. 이때 이도는 대전大殿과 보평청報平廳의 동벽東壁에 설치된 세자 자리에 앉은 다음, 태종과 조정 신료들이 국사를 논하는 모습을 경청하고 지켜보면서 세자 수업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에 대한 근거 또한 ≪실록(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6월/27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종의 전격적인 양위讓位 과정을 논하다!

7월 4일, 태종은 세자 이도에게 명하여 한양에 가서 종묘宗廟에 배알하게 하였다. 또 이날 육대언들에게 전위할 의사를 내비쳤다. 육대언들이 울면서 “무슨 말이십니까? 그것은 신료들의 소망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태종은 “너희들은 내가 오늘 한 말을 폭로하지 말라”(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7월/4일)고 엄명했다.

7월 6일, 태종은 육대언을 다시 부른 다음, 7월 4일에 행했던 발언보다 한층 강한 어조로 자신의 내선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세자 이도는 성품이 순직純直하고 정통精通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나라를 맡길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7월/6일)

그러자 육대언들은 이구동성으로 “춘추(春秋; 나이)가 바야흐로 한창이시고 옥체玉體에 병환이 없으시니, 마땅히 세자에게 위정爲政의 체體를 정히 보일 때인데, 어찌하여 ‘시기를 잃을 수 없다’고 하십니까?”라며 전위 의사를 철회할 것을 간청했다.

이에 대해서 태종은 “세자가 조현朝見하고 돌아온 뒤에 곧 대사大事를 정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 말을 드러내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리고 한달이라는 기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세자 이도가 봉숭행사를 치른 지, 약 한달 보름 만인 태종 18년(1418년) 8월 8일, 태종이 세자 이도에게 옥새玉璽를 물려주고,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궁世子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또 이날 저녁, 정비(靜妃; 원경왕후 민씨)도 태종의 뒤를 따랐다.

이에 앞서 태종은 지신사 이명덕, 좌부대언 원숙, 우부대언 성엄 등을 부른 다음,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임을 천명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가 군왕이 된 지 18년이 되었다. 내가 비록 덕망은 없었지만 불의不義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번 수재水災, 한재旱災, 충황(蟲蝗; 벼메뚜기)의 재앙이 발생했고, 또 묵은 병환이 깊어지는 까닭에 더 이상 정무를 보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중략>...』

◇ 출처 : 태종실록 18년(1418년)/8월/8일

그 자리에 있었던 대언들이 반대의견을 제시했지만, 태종의 결심은 한마디로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지신사 이명덕은 눈물을 흘리며 정부와 육조의 신료들에게 태종의 전위 사실을 통보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그리고 육조 판서와 참판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태종의 전위 반대를 눈물로써 호소했다. 그러나 태종은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 천하고금天下古今의 떳떳한 일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의논하여 간쟁諫諍해서는 안 된다”며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내시 최한을 승정원에 보내서 “오늘 개인(開印; 인궤를 열고 도장을 찍음)할 일이 있으니 대보(大寶; 옥새)를 속히 바치라.”고 지시했다.

대언들은 울면서 옥새를 가져왔고 영돈녕 유정현을 비롯한 의정부, 육조, 공신, 삼군도총제, 육대언이 보평전의 문밖에서눈물로 전위 의사의 철회를 요구하며 옥새를 부여잡고 태종께 바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태종은 “신하가 어명御命을 듣지 않는 것이 의리인가?”라고 호통 쳤다.

지신사 이명덕은 어쩔 수 없이 임금께 옥새를 바쳤다. 그때까지 세자 이도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도가 ‘부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보평전 문 앞에 도착해보니 조정 신료들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이도가 허둥지둥 서쪽의 지게문으로 들어가서 부왕께 인사를 하니, 태종은 이도를 향해 “애야! 이제 옥새를 주겠으니 이것을 받아라”라고 말했다. 이도는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이도의 소매를 잡아 일으킨 다음, 옥새를 주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도는 어쩔 줄 모르다가 옥새를 책상案 위에다 놓고 태종이 있는 내전으로 들어가 지성至誠으로 왕위를 사양했다.

그러나 태종은 군왕만이 쓸 수 있는 홍양산紅陽傘을 이도에게 내려주고 자신은 하인 10여명만 이끌고 경복궁을 떠나 옛 세자궁으로 옮겨갔다.

이도와 조정 신료들은 다시 세자궁으로 찾아가서 옥새를 받들고 복위復位할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밤이 되었지만, 태종의 결심은 번복되지 않았다.

태종은 “나의 뜻을 유시諭示한 것이 이미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臣僚들의 청을 들어 복위하려 한다면, 나는 장차 그 죽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절대로 복위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태종의 말에 황공함과 두려움을 느낀 이도가 이명덕을 돌아보면서 “어찌할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명덕은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효도를 다하심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도는 이명덕으로 하여금 옥새를 받들게 하고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언 김효손에게 “옥새를 지키면서 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간臺諫에서 상소하여 전위를 정지하도록 청했으나 태종은 그 상소를 곧바로 물리쳤다. 이렇게 해서 나라의 주인이 태종에서 이도로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군왕 이도에게 남겨진 정치적 과제들

이도의 왕위계승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도의 앞날에 영광과 환희를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적장자도 아니었고, 세자 수업을 충실하게 받지도 못했다.

정치적 명분이 취약했던 왕위계승, 군왕으로서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이도에게 조선의 4대 임금 자리는 새로운 시련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 이도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의 대표 브랜드로 크게 성공했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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