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8년(1418년) 5월 30일에 있었던 세자의 편지파동은 조선 조정에 거대한 회오리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6월 1일, 태종은 좌의정 박은, 옥천 부원군 유창, 찬성 이원, 예조 판서 김여지, 서연관들에게 세자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또 6월 2일에는 의정부, 삼공신三功臣, 육조,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각사各司의 신료들이 태종에게 ‘세자 이제를 폐廢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6월 3일, 태종은 “내가 백관百官들의 소장疏狀을 읽어 보니, 두렵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는 천명天命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내가 너희들의 주청을 따르겠다”면서 폐세자를 기정사실화했다.

‘어느 누구를 세자로 책봉할 것인가?’라는 문제만 남겨져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태종실록(1418년/6월/3일)≫을 참고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료가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공의公議과정을 통해 충녕대군 이도李祹를 세자로 책봉하다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면서 신하들에게 “양녕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은 다섯 살이고, 둘째 아들은 세 살이다. 나는 양녕의 큰 아들을 세자로 삼고자 한다. 큰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을 것이다.

그러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해야 할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해야 할지, 옛 제도를 상고하고 의논해서 아뢰어라”라고 주문했다.

태종의 말은 곧 성리학의 종법宗法인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우의정 한상경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태종의 뜻에 지지표명을 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朴訔은 “어진 사람을 골라서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택현론擇賢論을 주장했다.

한평군 조연, 공조판서 심온, 형조판서 김구덕 등 15명의 신하들이 유정현과 박은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조판서 이원이 나서서 새로운 제안을 했다. “거북점龜占과 시초점筮占을 쳐서 세자를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원의 제안은 생뚱맞은 것으로서 실소失笑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점占을 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원의 얘기를 현대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폄훼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태종 때의 일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게 옳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튼 태종의 당초 생각은 신하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바뀌게 되었고, 결국 어진 사람을 골라서 세자로 책봉하자는 택현론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을 향해 “나는 이제의 큰 아들을 세자에 앉히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불가하다’라고 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눈여겨봐 둔 셋째아들 이도를 지명하면 될 터인데도 불구하고, 정치 9단의 노련한 군왕답게 어진 사람을 고르는 택현의 미션을 신하들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유정현과 박은을 비롯한 신하들은 태종을 향해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분이 없습니다.”라며 ‘임금 스스로 자신의 후계자를 직접 고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와 같이 태종과 신하들은 서로에게 세자의 선택을 미루며 공의公議라는 핑퐁게임을 벌였던 것은, 그들 나름대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태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에 입각해서 세자 이제를 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또 신하들은 혹시라도 양녕이 부활해서 세자 자리를 되찾거나 군왕으로 등극할 경우, 자신들에게 날아올지도 모르는 복수의 칼날을 대비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세자 선택의 직접적인 책임을 태종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태종과 신하들의 공의公議를 통해 이도를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훗날 이제가 세자나 군왕으로 부활할 수 있는 대의명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세종실록≫의 총서叢書편에 나오는 ‘이도가 세자로 선택된 3가지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중략>...태종이 말하기를,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하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聖心에 달렸사옵니다.”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大體를 알아, 매양 국가에 큰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의견을 냈는데, 그것이 모두 범상한 소견이었으며,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지금부터 충녕으로써 세자로 삼고자 하노라.”...<중략>...』

◇ 출처 : 세종실록 1418년 <총서>

아무튼 태종이 충녕대군 이도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지목하자, 유정현과 박은을 비롯한 신하들은 일제히 “저희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다름 아닌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며 화답했다.

냉혹한 정치현장에서 동물적 감각과 냉혈인冷血人의 자세로 권좌를 지키며 풍운아風雲兒의 삶을 살아온 태종도 자기 손으로 맏아들 이제를 내리쳐야 하는 서글픈 현실 앞에서 목 놓아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도 자기 자식들에게는 지극히 따뜻했던 아버지였던 것이다.

태종이 충녕대군 이도를 세자로 선택한 3가지 이유

태종이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이보李補를 제쳐두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이도를 세자로 선택한 데는 나름대로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세종실록(총서)≫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그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도가 세자로 선택된 첫 번째 이유는, 태종이 학문연마에 대한 이도의 성실한 자세를 매우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태종에게 있어, 세자로 책봉받기 전前의 이도는 그저 여러 대군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맏형 이제처럼 당대의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실 수도 없었다.

태종은 생원시에 갓 합격한 이수(李隨; 훗날 문과에 급제하고 황해도 관찰사, 중군도총제,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병조판서로 재임하던 중, 취중 낙마 사고로 죽었다)를 이도의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게다가 태종은 이도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를 주문도 하지 않았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할 뿐이다”(출처; 태종실록 13년(1413년)/12월/30일)라는 절망적인(?) 얘기만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도는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았다. 오로지 학문연마에 진력했다. 밥 먹을 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몸이 아픈 경우에도 책읽기를 그치지 않아서 태종이 환관을 시켜서 서책書冊들을 감추게 할 정도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도는 중국의 경전經典과 역사는 물론 사대문적(事大文籍; 중국과의 역대 외교문서를 의미함)까지 통달했으며, 중국어 공부에도 열정을 기울이는 호학好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연마된 이도의 지식과 교양은 태종의 재임기간 내내 부왕과 조정의 신료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부지불식간에 미래의 왕재王才감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에 관한 일화들이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두 가지 일화만 소개하고자 한다.


 『임금이 “집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만나면 반드시 길 떠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할 것이다”하니,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말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황새가 언덕에서 우니, 부인이 집에서 탄식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기뻐하여, “세자가 따를 바가 아니다.”하였는데, 세자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사람의 문무文武를 논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疑; 크게 의심나는 일)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대에 그와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 출처 :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9일

『경복궁에 거둥하여 상왕을 봉영奉迎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와 종친이 시연侍宴하였다. ...<중략>... 이어서 재보宰輔 여러 신하에게 잔치하니, 다투어 연귀聯句를 바치어 심히 즐기었다. ‘노성老成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데에 말이 미치자, 충녕대군이 “《서경》에 이르기를 ‘기수준(耆壽俊;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궐복(厥服; 해당 직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학문이 방향을 통한 것을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너는 학문이 어째서 이만 못하냐?”하였다.』
 
◇ 출처 : 태종실록 16년(1416년)/7월/18일

  성리학적 지식과 교양수준이 곧 권력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군왕의 아들 중에서 가장 높은 학문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자식들에 비해 많은 정치적 자원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도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입함으로써 부왕과 조정신료들의 인정을 받았고, 마침내 맏형 이제를 제치고 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도가 세자로 선택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정치의 대체大體를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태종이 필요로 할 때마다 수준 높은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박사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세종의 수성 리더십≫에서 ‘정치의 대체’라는 의미를 ‘창의적인 대안제시 능력’, ‘정치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 ‘태종이 추구했던 대외정책노선의 계승’이란 관점에서 설명했다.

즉 태종이 국정운영상의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이도는 고전古典의 문헌적 근거와 역사적 사례를 인용해 가며 범상치 않는 난국 타개방안을 제시했다.

이도는 태종이 공신과 외척들, 심지어 자신의 처가妻家에게 멸문지화를 명할 때에도 부왕에게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상적인 일에 전념했다.

그것은 이도가 무능하거나 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의 생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왕권과 신권이 자웅雌雄을 겨루는 정치세계에서 태종이 던지는 칼날이 갖는 ‘잔혹함의 미덕’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또 그는 태종이 추구해온 ‘강대국과의 동맹노선’을 계승할 수 있는 적격자였다. 그는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함으로써 조선을 ‘작지만 강한 나라彊小國’로 리모델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이도의 아들이 이제나 이보의 아들보다 출중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태종은 30년 앞을 내다보면서 이도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삼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제, 이보, 이도의 자식들까지 눈여겨보면서 차차기次次期의 군왕 재목이 어느 누구인지를 일일이 체크하는 치밀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런 태종에게 이도의 큰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였던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적어도 태종의 눈에 비친 손자 이향은 ‘장래에 크게 될 녀석’이라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태종이 이도를 세자로 선택한 이면에는 이도가 대를 이어가면서 자신이 창업한 조선을 더욱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적격자適格者라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충녕대군 이도가 현대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  

냉혹한 정치세계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종과 조정 신료들의 공의公議를 거쳐 세자의 자리를 거머쥔 충녕대군 이도!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내 가슴이 불타고 있지 않는 한, 결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불같은 열정 하나로 별 볼일 없던 자신을 일으켜 세운 후, 조선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뜨거운 열정으로 모든 것을 일궈낸 이도를 보노라면, 갑자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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