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인재경영의 시대다. 어느 기업이, 어느 CEO가 좋은 인재를 더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기업의 운명과 CEO의 미래가 판가름 나는 시대다.

그래서 각 기업들은 CEO를 중심으로 인재 사냥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들어 일자리를 구하려는 핵심 인재들과 그들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을 연결해주고, 고액의 중개수수료를 받는 헤드헌터head hunter 산업이 급성장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재 경영’의 시조始祖는 세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그룹이 인재 스카웃과 인재 활용을 가장 잘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이건희 회장의 지론인 ‘천재경영’에 기인한다. ‘1인의 천재가 수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로 ‘천재경영’을 역설하고 있는 그는 천재급 인재(삼성그룹은 이들을 ‘S급 인재’라고 부름)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2003년도 신년사≫를 보면, 그가 천재경영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한 생각의 편린片鱗을 발견할 수 있다.

『...<중략>...20세기까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제품을 만들었지만 21세기는 천재급 인재 한 명이 제조 공정 전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라인 1개를 만들려면 최소 30억 달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인재 한 사람이 회로선 폭을 절반만 줄이면, 기업은 30억 달러에 해당하는 비용절감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1인의 천재가 수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얘기도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략>...』
 
◇ 출처 : 이건희 회장의 ≪2003년도 신년사≫

  요즘 식자들은 이건희 회장이 ‘천재경영’의 주창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15세기의 조선 조정에 ‘천재경영’을 이식해서 대성공을 거둔 세종이란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건희 회장은 역사박물관에서 휴면상태에 있던 세종의 ‘천재경영’ 코드를 발굴해서 현대화시키는데 성공한 CEO라고 보는 게 옳다.

  역사는 수학에서 말하는 연속함수continuous function의 속성을 갖는다. 현재는 과거의 내일이었고, 과거는 현재의 어제였으며, 미래는 오늘의 내일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해야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세종의 ‘천재경영’도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고 조명해야 한다. 세종은 인재를 아끼고 사랑했던 군주였다.

또 자신이 필요한 인재를 직접 양성해서 쓰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의 씽크 탱크인 집현전集賢殿을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동서양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세종처럼 인재를 키우고 사랑하며 무한신뢰를 보냈던 군주가 과연 또 있었을까?

  인재의 중용重用여부는 전적으로 임금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역사 속의 세종은 매우 재미있는 인물이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지식의 지평을 넓혔던 박학다식博學多識의 세종도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경연, 정례 조회, 집현전 학사들과의 비정기적인 집중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러고도 풀지 못한 난제는 과거시험科擧試驗문제로 출제해서 젊은 선비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 또한 세종 특유의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일례로, 세종 29년(1447년)에 치러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세종 자신이 직접 출제했던 과거시험문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이 말하노라. 인재는 천하국가의 지극한 보배다. 세상에 인재를 쓰고 싶지 않은 임금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러나 임금이 인재를 쓰지 못하는 경우는 세 가지다. 첫째는 누가 인재인지를 임금이 잘 모르는 경우(不知)이고, 둘째는 임금이 인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不切)이고, 셋째는 임금이 자신과 정치적 코드가 맞지 않는 신하를 중용하지 않는 경우(不合)가 그것이다. 또 뛰어난 인재가 현명한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세 가지다. 첫째는 군신 간에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不通)이고, 둘째는 비록 군신 간에 뜻이 통했다 해도 신하가 임금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경우(不敬)이고, 셋째는 임금과 뜻이 합치되지 않는 신하가 스스로 관직을 포기하는 경우(不合)가 그것이다. 임금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하가 임금과 통하지 않는 것은 두 맹인이 만나는 것과 똑같다. 어찌하면 임금이 인재임을 알아보고 중용할 수 있는지, 그 최적의 방법론에 대해 각자 생각하는 바를 적도록 하라.』
 
◇ 출처 : 강희맹 저, ≪사숙재집(권6)≫의 내용을 필자가 일부 각색함

  위의 과거시험문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유능한 인재의 중용 여부는 전적으로 임금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가 훌륭한 인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임금의 학문수준이 인재들보다 훨씬 앞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바둑 9급이 바둑 9단의 실력을 알아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시 재위 29년째를 맞고 있던 세종의 학문 수준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정치경험마저 풍부한 상태였다. 세종이 ‘부지不知’의 문제를 자신 있게 거론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인재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이 ‘부절不切’의 문제를 언급한 데는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태조, 정종, 태종은 극심한 인재난을 경험해야만 했다.

고려 말의 유능한 인재들이 ‘두문동 72현’의 이름으로 불에 타 죽었거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조선 조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1,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던 상당수의 인재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인재난은 더욱 더 극심했다. 그런 와중에 세종이 약 2개월 정도의 세자 수습기간을 거친 후, 조선의 4대 임금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왕의 준비기간이 아주 짧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 손발을 맞출만한 인재를 발굴할 수도 없었고 그들과의 인맥 형성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는 부왕 태종의 노회老獪한 신하들을 껴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종의 일 욕심이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세종이 한가하게 시간만 때우며 소일하는 임금노릇에 만족했다면, 인재에 대한 욕심 또한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국정운영의 마스터플랜을 짜고 그것을 자신의 재위기간 내에 마무리하고자 하는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시켜줄만한 유능한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부절不切’이란 용어는 그 당시 절박했던 세종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부합不合은 코드정치를 배격했던 세종의 인재활용술을 나타내주는 핵심키워드다. 불합과 관련하여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세종 29년(1447년)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장원급제를 했던 강희맹의 답안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서 인재로 키워야 합니다. 그것이 위재爲才입니다. 또 전지전능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위능爲能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결점과 허물만 지적해서 드러낸다면 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단녹장棄短錄長입니다. 그렇게 하면 탐욕스런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가 있습니다.』
 
◇ 출처 : 강희맹 저, ≪사숙재집(권6)≫의 내용을 필자가 일부 각색함

  왜 세종은 강희맹의 답안지에 최고 점수를 주었을까? 그 이유는 강희맹이 세종의  질문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한 후, 세종이 일관되게 추진해 온 인재활용술을 아주 세련된 내용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강희맹의 답안지는 지금 읽어보아도 ‘문리文理의 우장優長’이란 평가를 받기에 하등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명문이다.

  세종이 즐겨 사용했던 세 가지의 인재활용술

  세종이 즐겨 사용했던 인재활용술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세종은 신하의 공적(功績; 세종이 중시했던 것은 단순한 공적이 아니라 능력이 겸비된 공적이었음)이 허물을 능가하는 한, 그들을 함부로 내치지 않고 끝까지 중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서자庶子 출신의 황희(그의 부친은 판 강릉부사 황군서였고, 모친이 노비 출신임) 정승이다. 황희는 양녕대군의 왕위 등극을 적극 지지했던 인물로서 세종의 정적政敵이었다.

또 그는 땅 투기 혐의, 공문서 위조죄(자신의 사위였던 서달이 살인사건을 저지르자 맹사성과 짜고 살인범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를 했다가 세종에게 들통이 남), 간통죄(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의 편에 섰던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음)로 사헌부의 탄핵과 정적(예: 하륜, 조말생 등)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공적이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판단에서 그를 지켜주었고, 무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다.

황희는 인재를 발굴(그가 발굴했던 인재로는 허조, 최윤덕, 안숭선, 장영실 등이 있음)하여 조정에 천거하는데 능했고, 정사를 논의함에 있어 계교(計較; 견주어 따짐)하고 멀리 보는 안목까지 있었다.

또 그는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도 핵심을 파악해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혜안慧眼이 뛰어났다. 이 모든 것은 ≪세종실록≫이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둘째로 세종은 신하들에게 일에 대한 열정과 당당한 일처리를 주문하면서 남에 대한 비방과 아첨을 경계하도록 했다. 이는 세종 자신부터 신하들을 공명정대하게 평가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억지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정치를 하는 체통이 아니다.(세종실록 15년(1433년)/2월/29일)”, “대체로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질박하고 정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지금 진립(眞立; 명나라 선덕제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서 중국 사신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건대, 사람됨이 순박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황제가 그를 친애親愛하는 것이다.

나는 신하로서 아첨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그러니 경들은 아첨하는 것을 경계하라(세종실록 12년(1430년)/2월/2일)”는 그의 엄명에서 우리는 세종의 또 다른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공정하고 투명한 인재평가방식을 고수했던 세종의 인재활용술이 빛을 발했기 때문에, 그의 신하들은 농땡이를 부리지 않고 나랏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셋째로, 세종은 관직官職과 관작官爵을 철저하게 구분했던 임금이었다. 업무수행능력과 공적을 겸비한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어 중용했고, 공적만 있는 자에게는 관작을 주어 명예로운 삶을 살도록 배려했다.

국정을 수행하는 조정의 대소신료大小臣僚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세종의 일관된 공직관公職觀이었다.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때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요.(세종실록 15년(1433년)/5월/16일)”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각종 선거에서 표 몰이꾼의 역할을 담당했던 함량미달의 충견忠犬들에게 마치 전리품을 나눠주듯이 보직을 배분함으로써 조직을 망가뜨리고 있는 사이비 리더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다.

그들은 세종이 가장 싫어했던 부류에 속하는 인간쓰레기들이다. 아무쪼록 세종의 탁월한 인재활용술이 국가 경영, 기업 경영, 지방자치단체 경영, 대학 경영에 널리 확산되어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인재강국으로 급부상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는 세종에 대한 학습을 가일층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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