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올까? 세계화 탓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예: 세종대왕, 이순신)보다는 외국인(예: 링컨, 간디, 케네디)이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가방 끈이 긴 사람일수록 그럴 개연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배우는 정치사상(서유럽 사상이 주류를 이룬다.)과 정치이론(미국 이론이 지배적이다.)의 국적이 대부분 서양이기 때문이다.

또 ”특정 인물을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그가 남긴 ○○업적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동서양의 역사 기술記述이 왕을 비롯한 특정 인물의 업적 중심으로 이루어진데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통치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민중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역사가 진보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그런 시각에서 역사교육을 시도하는 분들도 꽤 많다.

필자는 그와 같은 역사학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역사의 기술 방식도 정(正; 왕 중심의 기술)반(反; 민중 중심의 기술)합合의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새롭게 변화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다만 리더십 연구자로서 필자가 기대하는 ‘합合’의 방향은 ‘한 사회를 이끌었던 리더들이 어떤 자세로 일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제기된 각종 문제와 장애요소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중심으로 역사가 기술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화석처럼 굳어진 고리타분한 역사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역사를 배우면서 선인들의 지혜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교육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무언가 2% 부족한 한국인들의 어두운 자화상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행된 1962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그때 한국은 세계 최 빈곤 국가군에 속했다. 그러나 일의 요체要諦가 무엇이고, 일 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덕분에 한국은 중진국의 선두그룹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최적의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한국은 이미 수년 전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더 이상의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제 여러분은 한국처럼 반세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고도압축 성장을 통해 가난의 질곡을 극복하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둔 나라가 있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Made in Korea’의 라벨을 붙인 국산 명품들이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D램, LNG 선박, TFT LCD, CDMA 단말기, 냉연강판, 폴리에스터를 비롯한 71개 품목이 세계랭킹 1위를 달리며 한국의 국격國格을 드높이고 있다.

게다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국제적 위상과 한류열풍은 한국인의 잠재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무언가 부족한 2% 때문에 서양 사람과 서양의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지탱해온 전제 군주제, 일제 식민통치, 남북분단, 군사독재정권, 극심한 지역감정과 빈부격차 등이 그 주된 이유다.

그러나 세종은 자기 모멸감으로 한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우리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비상飛上을 주문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세종의 리더십

세종은 세계의 어떤 지도자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32년이라는 재위기간 동안 조선을 조선답게 만들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짰고 그것을 완벽하게 완성시킨 CEO 군주였다.

그의 손을 빌어 재탄생한 조선의 언어(자기 백성을 위해 언어를 창제한 임금은 전 지구상에서 세종 밖에 없다), 역사, 법제, 예악禮樂, 과학, 농업, 국방, 의학제도는 중국의 그것과 철저하게 차별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세종 혼자서 한 게 아니다. 그는 단지 이들 업무를 총체적으로 기획, 총괄, 조정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을 뿐이고, 나머지 모든 일들은 그의 신하들이 해냈다.

일례로 훈민정음 창제는 성삼문과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역사는 정인지와 김종서, 법제는 황희와 허조, 예악은 맹사성과 박연, 과학은 장영실과 이천, 농업은 정초와 변효문, 국방은 김종서와 최윤덕, 의학은 진순의와 권채가 그 대임을 맡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 모두가 ‘국가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좌의정 허조가 졸(卒; 죽음)하였다. ...<중략>...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히 하고,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 출처 : 세종실록 21년(1439년)/12/28

이처럼 세종의 신하들이 국가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세종이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세종의 신하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公보다 사私를 우선시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오늘날의 기업 오너(예: 기관투자자, 소액주주들)들이 스톡옵션stock option이란 제도를 창안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월급쟁이 CEO(일명, 전문 CEO)는 일을 대충대충 해도 월급이 보장된다. 따라서 월급제에는 CEO가 열심히 일하게 할 만한 유인이 없다.

그러나 스톡옵션이 제공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문 CEO의 노력으로 기업이윤이 커지면 주가가 상승하게 되고, 그때 스톡옵션을 행사하면 앉은 자리에서 수십억을 벌 수 있다.

그 때문에 전문 CEO는 오너들이 지켜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하는 것이다.

세종 시대에는 스톡옵션제도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종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최선을 다했다. 지식의 보고寶庫인 ‘세종실록’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준다.

“...<중략>...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허조를 지칭)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 정승)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 세종을 지칭)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 출처 : 세종실록 21년(1439년)/12/28

위 글에 나타나 있듯이 죽음을 눈앞에 둔 좌의정 허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간언대로 행하시고, 자신의 말을 기꺼이 수용해준 세종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즉 허조가 국사國事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은, 세종의 경청敬聽과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때문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허조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종의 신하들은 우리들에게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士爲知己者死 女爲設己者容(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치장한다)’가 빈말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다.

부하로부터 세종과 같은 극찬을 받을 수 있는 지도자가 또 존재할 수 있을까? 링컨, 케네디, 간디, 처칠, 마오쩌뚱이 과연 세종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이제 세종의 리더십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숙의熟議와 공론公論으로 난제難題를 정면 돌파하라!

세종시대에도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과의 숙의熟議와 공론公論과정을 통해 수많은 난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했고, 마침내 조선 제일의 성군聖君이 되었다.

세종은 전제군주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고, 권력에 기초한 독단적 국정운영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신하들과 폭넓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결집했고,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국사를 물 흐르듯이 처리했다.

또 복잡한 사안事案일수록 공론과정을 거쳐 일처리의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그에 따라 엄정하고 간단명료하게 해결해 나갔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좌의정 허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는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만큼이나 깐깐하고 철저하게 어느 정책의 그늘, 즉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점들과 최악의 경우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박현모 저, ≪세종처럼≫, 2008, p.220)

세종이 그런 허조를 마냥 좋아한 것은 아니다. 세종도 임금이기에 앞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지신사(현, 대통령 비서실장)였던 안숭선에게 “조(허조를 지칭함)는 고집불통이야!”라고 흉보는 장면이 나온다.(세종실록 15년(1433년)/10/23일자)

그것을 보면, 세종도 자신에게 사사건건 비판만 해대는 허조가 때때로 얄미웠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세종은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마다 허조를 반드시 참석시킨 다음, 그의 비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로서 세종이 지닌 포용력의 크기와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조부 이성계처럼 그릇이 큰 임금이자 리더였다.

아무튼 세종은 허조가 지적하고 비판한 사항을 국정 운영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정책의 부실을 막고 효율성을 제고시켰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여 ‘끼리끼리의 횡포’를 일삼는 코드정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6세기 전의 세종이 보여준 통합의 정치, 구심력이 작동하는 상생의 정치는 새로운 한국적 리더십의 원형prototype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일 잘하고 세상 밖의 복잡한 난제들을 안으로 끌어들여 슬기롭게 풀어나갔던 세종의 위대한 리더십을 진지하게 학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의 본질이란, 6세기 전의 세종 때와 지금이 똑같다고 판단되기에.....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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