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주 박사
이길주 박사

어릴 적 가장 기다렸던 날이 설날이다. 아마도 한 달 전부터 설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기다리는 설날은 왜 그리 더디게 오던지….

설날이 오기 직전의 장날을 ‘대목장’이라고 했는데, 이날이 기다려진 이유는 설빔 때문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복주머니가 달린 한복을 얻어 입지는 못했고, 바지나 양말 정도만 받았다.

당시에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큰형님이 혼인하여 조카가 태어나 걸음마를 하게 될 즈음에 어머니가 때때옷을 해 입히셨다.

6형제만 있던 집안에 예쁜 손주를 보셨으니 뭘 해서 입힌들 아까우셨을까, 색동저고리를 입은 조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공주에 가면 ‘색동’이라는 카페가 있다. 오방색을 세로로 긋고 ‘색동 cafe’라고 간판을 걸었는데 그 운치 때문에 가끔 들른다.

설날에는 차례를 아침 일찍 지내고 아버지 어머니께 세배를 올렸다. 절을 하고 일어나면서 큰형님이 “아버지, 어머니 새해에도 건강하세요.”라고 말하면, 동생들도 모두 따라서 새해 인사말을 올렸다.

이때 아버지 어머니도 큰형부터 동생까지 6형제에게 덕담을 해 주셨다.

그런데 솔직히 동생과 나는 덕담보다는 세뱃돈에 관심이 더 컸다. ‘얼마를 주시려나’하고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보면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점 세뱃돈 액수가 적어진다. 초등학교 때는 종이돈 10환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점심에는 떡국을 먹고 동네 어르신들께 세배를 올리려 집집이 다녔다. 세배를 하고 나면 세뱃돈을 주셨는데, 적은 액수지만 매우 기분이 좋았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는 세뱃돈 대신 갱엿(검붉은 빛깔의 엿, 갱엿을 늘이어 여러 번 켜면 흰엿이 된다.)을 주셨는데, 세뱃돈만은 못했다.

지금은 가옥의 구조가 아파트로 바뀌면서 이런 풍속이 다 없어졌지만, 그 시절에는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날 임박해서는 동요 ‘설날’을 많이 불렀다. 윤극영 선생이 1924년 작사 작곡한 동요로, 누구한테 특별히 배우지도 않았는데 모두 잘들 불렀다.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배운 기억은 없지만, 동요 제목을 ‘설날’이 아닌, ‘까치 까치설날은’으로 알고 잘도 부르고 다녔다.

아마도 이 동요가 4절까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1절은 설날에 대한 기다림, 2절은 설빔과 세배, 3절은 잣과 호두를 까먹으며 널뛰고, 4절은 부모님의 자애로움과 윷놀이 장면으로 노랫말이 되어 있다.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에서 까치가 설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마고 윤극영 선생이 ‘작은 설’을 나타내는 우리 고유어인 ‘아치설’을 아이들에게 노랫말이 친근하게 와 닿게 하도록 ‘까치 까치’로 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설날에는 가족들이 모여 널뛰기도 했고, 윷놀이도 많이 했다.

윷놀이는 여자와 아이들은 주로 방에서 달력 뒷면에 말판을 그려놓고 윷을 던졌고, 동네 어른들은 동네 공터에서 둥근 원을 그려놓고 윷을 던졌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 일부 어른들은 골방에서 ‘담배 내기’ 화투를 치셨다. 선조들은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외에도 방에서 ‘승경도(陞卿圖, 또는 종경도라고도 함) 놀이를 즐겼다.

승경도 놀이는 조선 시대 양반 자녀가 등급과 호칭이 복잡한 관직 제도를 체계적으로 익히기 위해 행했던 놀이를 말한다.

세종시에 있는 연기향토박물관에서 승경도 놀이 보급에 노력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줄 수 있는 놀이다. 이번 설에는 우리 전통 놀이를 찾아 가족들에 즐기는 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쇠다’라는 말이 있다. ‘명절, 생일, 기념일을 맞이하여 잘 지낸다’라는 뜻이다. 우리 고유의 설 명절 편히 쇠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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