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한.중 수교 초기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만리장성? 자금성? 황허, 많은 인구? 전부 아니다. 상하이 시내의 한 공원에서 석양이 깔리는 무렵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러시아 민요의 선율에 맞춰 사교춤을 추고 있는 한 무리의 시민들을 발견했을 때다. 그때의 놀라움과 감흥을 지금도 기억한다.

오늘도 중국에는 도시의 공원이나, 광장 등에서 성대한 대중 무도회가 아침, 저녁으로 열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유교적 역사를 전통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로서, 더구나 사회주의 혁명을 거친 나라에,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로 치부될 법한 사교춤이 사회 저변에 폭넓게 보급되어 있다는 점은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국민당의 공세에 쫓겨 2만리 대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이 옌안에 둥지를 틀고 있던 시절, 문예 활동의 하나로 자주 무도회를 열었던 일은 오늘날 중국에 사교춤이 성행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당원들을 쉬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예안을 취재차 방문한 서양 기자들이 촉매제가 된 이 무도회는 프랑스나 러시아 유학생 출신이 적지 않았던 혁명 지도자들의 호응을 얻어 자연스럽게 옌안 해방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전투의 해방감을 해소하고 황량한 황토고원 벽지 생활의 고통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 무도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지도층 인시들이 애호하는 오락과 사교 수단이 되었다.

사교춤이 처음 중국에 소개 된 것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중국을 방문한 서양 서커스단, 선원 그리고 상하이와 광저우의 외국 상인들에 의해 왈츠, 탱고 등과 같은 사교춤이 중국 상류계층에 전해졌다.

남녀가 서로 몸을 밀착시키고 돌아가는 서양의 사교춤은 봉건사회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중국인들에게 충격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 새로운 사교 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봉건 체제가 무너지고 수립된 민국 시절에는 정부가 춤을 장려하여 한때 학교의 정식 교과목으로 편성되기까지 했다.

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 혁명과 전란의 시대가 역사가 된 지금 중국의 각급 학교들은 다시 사교댄스를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국제화 시대에 청소년들을 세계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교댄스가 하나의 교양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수시로 개최되는 사교댄스 경연대회, 곳곳에 문을 여는 라틴 댄스 강습소 등과 같이 이제 중국에서 사교춤은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 장르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원에서 사교춤 교습을 받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중국에서 사교춤 보급과정은 전 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민의 평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특히 남녀평등의 실현과 여성 지위 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은 대중문화 장르라 하겠다.

석양을 뒤로한 채 넘실대는 황포강의 물결과 함께 중국의 친구들과 멋진 사교댄스를 그려보자. 곰팡이 냄새 나는 지하 카바레의 한국의 제비족은 잊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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