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미숙한 사람이 잘난 체하다가 일을 그르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필자는 지난 1999년 12월 24일에 있었던,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위헌판결을 보면서 그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선무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재는 이 시대 최상의 권위와 명예를 보장받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기관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일단 판결을 내리면, 그들의 임명권자인 대통령까지도 그 판결을 번복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전지전능한 사람들인가?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한 위헌판결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의 법리 적용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기회의 평등에 대한 헌재 재판관들의 옹졸한 해석

헌재 재판관들은 ‘군필자에게만 유리하게 책정되어 있는 가산점 비율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달라’는 어느 여대생의 헌법소원에 대해, 가산점제도 자체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군필자에 대한 편파적 보상이 자칫 헌법이 보장한 기회의 평등, 즉 여성과 장애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만 공평하게 제공해주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헌재 재판관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군필자 가산점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원천적으로 군복무의 기회가 봉쇄된 사람들에게 군필자 가산점과 동등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현행 병무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라”고 판결했다면 우리 사회가 그렇게까지 시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헌재 재판관들의 판결에서는 그런 고뇌와 고민들을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헌재의 위헌판결이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그동안 말을 아끼며 침묵하고 있던 수많은 군필자들이 성난 얼굴로 벌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헌재, 국방부, 행정자치부, 병무청 등의 홈페이지가 무차별적으로 해킹당하고, 헌재 재판관의 판결에 대한 규탄대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자들을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사자후獅子吼처럼 토해내는 ‘남성협의회’까지 구성되었을 정도다.

필자는 헌재 재판관들에게 ‘공직자의 절대덕목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고 싶다. 만약 그들이 공직자의 절대덕목으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꼽는다면, 그들의 판결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를 위해서 온갖 모욕적 대우, 구타, 기합, 의문사의 위험 속에서 24개월의 청춘을 희생하고 봉사한 사람들에게 소정의 가산점을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헌법 39조 제2항에서도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게다가 모병제募兵制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군필자가 공직에 지원할 때, 가산점을 부여해 준다.

그들 역시 공직자의 절대덕목이 ‘국가와 국민에 대한 희생과 봉사’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판례判例를 수시로 커닝해가면서 판결을 내렸을 헌재 재판관들이, 이번에는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군필자가 가산점을 받을 경우, 원천적으로 군복무의 기회가 차단된 사람(예: 여성과 장애인들)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기존의 국방 개념을 확대 적용하면, 아주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총 들고 나라 지키는 것만이 국방은 아니다!

그와 관련하여 필자는 헌재 재판관들에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국방의 개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만약 그들이 “군인의 신분으로 전․후방 고지를 지키는 것만을 국방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인식수준이 함량미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헌법이 제시하는 국방의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에 있다. 따라서 국민의 생명 및 재산권 보호와 관련된 일련의 행동을 광의의 국방 개념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가령, 교통질서의 확립, 불우시설에 대한 자원봉사, 산불예방 감시, 환경오염 감시도 광의의 국방이다.

일례로 지난 2006년 한 해 동안 약 9,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인원은 대략 육군 보병 1개 사단의 병력 수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것은 교통질서의 확립이 곧 국방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공직을 희망하는 여성이나 장애인들이 그와 같은 분야에서 일정시간 봉사하게 한 다음, 그 결과에 따라 군필자 가산점과 동등한 점수를 준다면 그들 역시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해서 시비를 붙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의 엉터리 논리

헌재의 위헌 판결에 대한 세간世間의 비난여론에 밀려 궁색한 처지에 놓여 있던 헌재 재판관들에게 최고의 권위가 있음을 주지시키며 난데없이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속담도 바로 그런 사람(필자는 그들을 싸잡아서 ‘사이비 페미니스트’로 정의한다)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그들은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한 헌재의 위헌판결로 기세등등해진 여성들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 주었지만, 실제로는 공직 진출과 무관한 여성들을 불안에 떨게 만든 장본인이다.

진의眞意야 어찌되었든 여성들에게 심리적 부담이나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이 없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얼치기 인간들이 더 이상 날뛰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들의 주장에 내재된 두 가지 문제만 지적하고자 한다.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은 이구동성으로 “군필자 가산점 제도는 시대논리에 역행하는 악습이기 때문에 폐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호봉과 경력 산정, 수당 및 연급지급, 응시연한 연장 등으로 군필자들을 대우해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말미에다 “사실은 나도 예비역 병장 출신이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것은 “군필자인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당신들도 내 주장에 동의해 달라”는 일종의 읍소성격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보자. 21세기를 헤쳐 나갈 민간기업의 절대덕목이 과연 무엇인지 말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민간기업의 절대덕목은 ‘기술혁신을 통한 고부가가치의 창출, 시스템 경영, 투명한 기업윤리의 확립’이다.

그 이유는 민간 기업이 부실경영으로 망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IMF 구제 금융위기 이후, 부실 재벌과 부실 금융기관들에게 투입된 천문학적 숫자의 공적 자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민간 기업에게 군필자에 대한 호봉 및 경력 산정, 수당과 연금지급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전가시키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민간기업과 국민들을 또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는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군필자가 민간 기업에 응시할 수 있는 연한을 2~3년 동안 연장시켜주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요즘 민간 기업들이 응시연한에 대한 규정 자체를 없애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

또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도 군대에 보내라!”고 주장하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을 미친 소리로 폄훼貶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헌법 제39조 제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제 그 조항을 근거로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에게 묻는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인가, 아닌가?

만약 여성들이 우리 국민이라면, 정의를 부르짖고 나서기 좋아하는 너희들이 앞장서서 여성들에게 병역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주무부처인 병무청으로 하여금 징집명령서를 발부하도록 조언하라.

또 여성들이 우리 국민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부여된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예: 참정권 등)를 박탈하는데 적극 나서라.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이여!
앞으로 그대들이 고민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헌재 재판관들이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릴 때처럼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여성들도 헌법 제39조 제1항에 근거하여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라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감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금기사항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군필자 가산점 제도’를 단칼에 베어버린 헌재 재판관들의 배짱대로라면, 그러한 판결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여성들의 군복무도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뜻있는 여성들이 적극 나서야 할 때

그렇게 되면, 향후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여성 가운데 공직을 희망하는 사람은 전체 여성의 20%도 채 안 된다.

80%이상의 여성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개척하거나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병무청으로부터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고, 24개월 동안 힘겨운 병영생활을 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때, 입영통지서를 받아든 80% 이상의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군복무를 하게 만든 예비역 남성(특히 ‘남성협의회’ 사람들)들을 상대로 싸우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비역 남성들과 싸울 명분도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군필자 가산점 제도’에 대한 위헌신청을 냈던 여성을 찾아가 “평범한 여자로 살고자 했던 내가 잘난 척했던 네 X 때문에 유격훈련까지 받게 되었다”며 머리채를 잡고 한바탕 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지혜가 실종된 헌재 재판관들과 세상의 이치도 모르면서 유식한 체했던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이 공모共謀하여 빚어낸 엉터리 판결이 재현되기만 한다면, 그런 싸움을 종종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바로 판결의 부실 유무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헌재 재판관들에게 최상의 권위와 명예만을 부여하는, 그 잘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비극이다.

이제 헌재 재판관들도 외국에서 수입하자!

몇 년 전, 우리는 히딩크를 수입해서 월드컵 축구대표 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또 그를 통해 월드컵 4강 신화라는 짜릿한 즐거움을 경험한 바 있다.

사법부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사법부가 계속해서 함량미달의 판결만을 양산할 경우, 국민들은 사법부의 무능한 재판관들을 해고시켜야 마땅하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히딩크처럼 시스템적 사고思考를 하는 선진국의 일류 재판관들을 대거 수입해서 그들에게 우리나라 사법부를 통째로 맡겨보면 어떨까? 자고로, 치열한 경쟁은 부실의 천적天敵이다. 그래서 경쟁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헌재 재판관들이 앉는 의자의 엄청난 크기와 높이(?)에 대해서도 불만이다. 재판관으로서의 뚜렷한 소신과 출중한 판단능력은 결여된 채, 청와대와 정치권 그리고 세간 여론의 향방에만 자신들의 풍향계를 맞추면서 국론분열을 초래하는 부실판결만을 양산量産하는 그들에게 왜 그리 크고 높은 의자를 제공해야만 하는가?

오만불손한 자세로 높은 의자에 앉아 국민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들에게 우리가 언제까지 그렇게 높은 사회적 대우를 해주어야만 하는가?

우리 사회와 시민단체들은 왜 그런 측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가? 그러고도 우리들이 민주시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가당치도 않은 권위주의로 일관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보노라면, 필자에게는 동물원의 철창 속에 갇혀 있음을 망각한 채, 온갖 똥 폼을 잡고 앉아있는 일본 원숭이 두목의 음흉한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바로 이런 나라가 살맛나지 않는 세상의 대표적인 전형이다.

김덕수 교수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 , , , , ,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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