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하 이순신)을 무척 좋아했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집권 초기부터 ‘이순신의 성웅화聖雄化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그 과정에서 출간된 책들을 통해 이순신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순신의 본관이 ‘덕수’ 이씨라는 점과 숙종 임금 때 영의정을 역임했고, 그의 신도비 비문을 쓴 김육 대감이 우리 집안의 선대 어른이라는 것도 그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였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내가 ‘이순신의 성웅화 작업’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했던 것은 지난 1995년이다. 나는 그때 도쿄東京의 심바시 지역에 머물면서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던 ‘21세기 뉴-프론티어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조사와 기술정보를 얻기 위해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 친한파親韓派인 일본인 지기知己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것은 일본인들 가운데 이순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소 모임들이 꽤 있다는 것이었다.

도쿄대 출신인 그는 고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을 만큼, 한국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자기 조상들의 원수였을 적장敵將 이순신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고 그의 장점을 벤치마킹해서 자신들의 삶에 활용하려는 것을 보고 나는 한국인으로서 매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가짜 총통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현역 해군 대령이 가짜 총통을 만들어 바다에 빠트린 다음, 그것을 건져 올려 진짜 총통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이순신의 사상과 전략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의 다짐이 오늘날의 이순신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순신의 충효 사상을 철저하게 왜곡시켰던 박정희


박정희는 이순신의 숭고한 충효忠孝사상을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 아무리 바쁜 청와대의 스케줄이 있더라도 매년마다 4월 28일만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현충사로 달려가 이순신의 영정에 참배한 후, 흰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가 즐겨 쓰던 휘호에도 이순신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담은 것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이순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순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애정 공세는 결국 자신만의 초라한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박정희가 이순신의 충효사상을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박정희가 생각했던 충효사상과 이순신의 충효사상을 비교하면 금방 드러난다.

이순신이 목숨을 바쳐 실천한 ‘충’은 국가와 백성을 향한 조건 없는 자기희생이었다. 그에 반해 박정희가 생각한 ‘충’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절대 복종의 요구였다.

즉 나약한 장면 정권을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시킨 것은 자기 한사람으로 족하며, 더 이상 자신의 정권에 대한 군사적 도전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박정희가 구상한 ‘충’사상이다.

실제로 그는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의 전역식’에서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박정희가 강조한 ‘효’의 논리 또한 왜곡된 ‘충’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순신의 애틋한 ‘효’사상은 ‘난중일기’에 집약되어 있다.

“종일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 앞에 이르니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몇 날을 더 보전하시기가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 난중일기(1596년 윤8월 12일자)에서 -

위의 글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순신의 ‘효’사상은 한마디로 부모님에 대한 가없는 연민의 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내세웠던 ‘효’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가정에서 가장家長인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라야만 효자가 될 수 있듯이, 국부國父인 대통령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고 간주하는 것이 박정희 버전의 ‘효’사상이었다.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서 비민주적인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긴급조치권의 발동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마저 철저하게 짓밟았던 것도 그의 잘못된 ‘효’사상에 기초한다.

즉 가장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대해줘도 괜찮지만, 자식들은 제 아무리 고약한 아버지라도 그것에 불만을 갖지 말고 깍듯하게 모셔야 한다는 왜곡된 동양적 윤리가 다름 아닌 박정희 표 ‘효’사상이었다.

나는 박정희가 주도했던 이순신의 성웅화 작업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잘못 제정된 ‘이순신의 탄신일’

첫째는, ‘이순신의 탄신일’이 잘못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진짜 생일은 음력으로 1545년 3월 8일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우리들은 4월 28일을 ‘이순신의 탄신일’로 제정하는 어리석음(‘이순신의 탄신일’을 양력으로 정한 이유는, 매년마다 같은 날짜에 기념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만약 탄신일을 음력으로 정해 놓으면, 매년마다 기념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의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바꿔서 시행하는 것은 파렴치한 행정편의주의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을 범하고 있다.

이순신이 생존해 있었던 그 시기에, 조선에서는 양력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양력이 있었다고 해도 조선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농경사회에서 농사일을 관장했던 것은, 달의 운행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음력이었기 때문이다.

엉터리로 제작된 이순신의 동상

둘째는,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의 동상이 엉터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본래 동상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아니다. 우리의 전통 사회가 정치 리더들의 선정善政이나 무장武將의 무덕武德을 기리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은 당사자의 묘소를 쓴 후, 신도비와 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양의 동상 문화가 일본에 유입되었고, 그것이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동상문화가 급속도로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유럽의 동상 형태와 일본의 동상 형태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상은 말을 탄 장군이나 정치 리더들의 동상인데 반해, 일본의 동상들은 대부분 검도복 같은 차림에 칼만 들고 서 있다(말을 탄 장군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동상에는 많은 말이 등장한다. 일본의 동상을 베꼈으면서도 유럽풍의 동상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는 이순신의 동상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이하 JP)가 위원장을 맡았던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가 기획하고, 박정희가 건립비용을 전액 부담했으며, 김세중(당시, 그는 서울대 미대 교수였다.)에 의해 1968년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순신의 모습이 현충사에 모셔진 영정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

동상에 조각된 이순신의 모습은 전형적인 용장勇將의 모습인데 반해, 현충사에 모셔진 영정은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기술(유성룡은 그 책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해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다”고 기술했다)한 바와 같이 매우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돌아가신 지, 400여년 밖에 안 되는 인물을 어떻게 전혀 다른 두 가지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순신의 동상에 내재된 또 다른 문제는, 그가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고 서 있다는 점이다.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고 있다는 것은, 이순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고 있기 때문에, 왼손으로 칼을 뽑은 다음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99.9%가 오른손잡이들이다. 이는 집안어른들이 어릴 때부터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이다.

또 이순신의 집안은 ‘덕수 이씨’로서 양반 가문(조선이 인정하는 3대 천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율곡도 덕수 이씨 출신이다)에 속하는데, 옛날 양반들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한다’는 처세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왼손잡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객劍客의 세계에서도 ‘오른손잡이 검객이 칼집을 오른손으로 잡는 것은 항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순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장검이 아니라 지휘봉이었다. 지금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두 자루의 장검은, 평소에 이순신이 지니고 다녔던 전투용 칼이 아니다.

그것은 이순신이 자신의 집무실에 진열해 놓고 장군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는데 활용했던 권위의 상징물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의 동상에 등장하는 칼은 현충사에 보관 중인 장검의 크기와 비슷하다. 그것 또한 이순신의 동상이 잘못 만들어졌음을 시사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가지고 다녔던 지휘봉은 눈에 잘 띄는 흰색과 주홍색만을 칠한 나무 막대기였다.

이순신은 언제나 지휘봉을 공중에서 천천히 젓다가 아래로 내렸다. 그러면 그의 곁에 있던 군관이나 병사가 이순신의 지휘 내용을 큰북, 나팔, 독전기督戰旗, 영기令旗를 이용하여 전군全軍에 알렸다(이것은 일본의 가다노 쯔기오片野次雄가 쓴 책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23전 23승 23KO승으로 조선을 얕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인의 매운 맛을 보여준 이순신을 항복한 장군으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일본인보다 열악한 상황이니, 이 잘못을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우리가 일제에게 34년 11개월 28일 동안 식민통치를 당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 대한 것은 물론 이웃나라 일본에 대한 연구마저 게을리 했으니, 그들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지사.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가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을 다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이라는 말을 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로 손무가 했던 말은 ‘지피지기 백전백승’이 아니라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이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이다)’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오해 없기를 기대한다.


이순신의 국민대통합 정신을 철저하게 훼손시킨 박정희


셋째는, 박정희가 이순신의 위대한 국민대통합 정신을 심하게 훼손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가 국내 최초로 제기한 문제다.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현재의 중구 인현동에 해당된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부였던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한 후, 그의 집안은 한동안 역적의 가문으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그의 부친인 이정李貞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집안의 가세家勢는 곤궁해졌다. 그러자 이순신의 가족은 외가外家가 있는 충남 아산의 배암리로 이사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순신은 1576년에 32세의 늦깎이 나이로 식년무과(그는 28명을 뽑는 시험에서 12등으로 합격하여 종 9품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종 9품은 오늘날 중사 계급에 해당된다)에 합격한 후,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 약 15년간을 변방과 오지에서 갖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수군을 이끌고 23번의 해전海戰가운데 약 80% 이상을 경상도 바다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충청도에서 자란 다음, 전라도에서 해군 제독으로 성공을 거두고 경상도의 바다를 수호하셨던 분이다.

그에게는 그 어떠한 지역차별도, 지역이기주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조국’과 ‘내 백성’만이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했다면, 그가 죽음으로 실천했던 국민대통합의 정신부터 본받았어야 옳았다.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경상도와 경상도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던 이순신의 뜨거운 마음을 읽었어야 했는데, 박정희는 그것을 철저하게 외면(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 사감私感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했다.

그리고는 ‘자기 고향 챙겨주기(하나회, 정부 내 요직, 경부선, 경부고속도로, TK 패권주의, 경부고속터미널, 경상도 지역에 중화학공업 및 섬유공업단지의 집중 배치 등)’에만 열중했다.

만약 박정희가 경상도보다 전라도를 먼저 챙겨주고, 전라도의 지역발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주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지역갈등의 문제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그런 나쁜 정신은 그의 양아들을 자처했던 전두환에게 곧바로 계승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양부養父였던 박정희의 모반謀反을 흉내 낸 12.12 군사쿠데타로 군대 내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한 후, 5.17 계엄확대를 통해 정권을 찬탈했다.

또 그것에 항의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본보기로 전라도 시민을 지목하여 광주민중학살을 자행한 것은, 평소 전라도에 대한 박정희의 증오심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박정희가 고도의 정치적 술수 차원에서 고안했던 삼류 코미디 쇼가 ‘이순신의 전쟁영웅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자체의 그릇 크기나 내면의 사상 내지 철학적인 측면에서 박정희는 이순신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를 읽다보면 ‘연작안지홍곡지지재(燕雀安知鴻鵠之志哉; 이는 ‘작은 참새는 기러기나 고니와 같은 큰 새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참새 수준인 박정희가 어떻게 기러기나 고니 수준인 이순신의 깊고 높은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흉내 낼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의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의 화폐

넷째, 우리 국민들은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와 정반대이다. 이순신은 지금도 우리 후손들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돈을 보자. 이순신은 모습은 100원짜리 동전에, 23전 23승의 불패신화를 창조했던 거북선은 5원짜리 동전에 들어가 있다.

대체로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대상물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일맥상통한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거북선의 역사적 가치는 통일벼(그것은 50원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다.)의 1/10에 해당하며, 이순신의 가치 또한 학(화투 삥광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500원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다)의 1/5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고도 이순신이 성웅 대접을 받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특히 대한민국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이씨(氏)들 뿐이다.

대한민국에는 이순신, 이황(진성 이씨 출신이다), 이율곡, 세종대왕(그 양반도 전주이씨 출신이다) 이외에도 훌륭한 인물들이 많으며, 성씨도 매우 다양한데, 어째서 이런 일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가?

이제는 의구심을 넘어 명문대학 출신들의 집합체라는 한국은행에 대해 연민의 정이 느껴질 정도다. 도대체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월급을 받고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지? 한번 그들에게 따져 묻고 싶다.

나는 최소한 500원짜리 동전에는 거북선이, 5,000원권 이상의 지폐에는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지길 강력하게 희망한다.

적어도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이순신을 제대로 평가하고 대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정치 리더들의 인식전환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이순신의 묘소를 둘러보고, 그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김덕수 교수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 , , , , ,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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