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 위치한 신현국 화백의 화실을 찾았다. 길치라서 그랬을까? 전에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맨 탓에 신 화백께서 비를 맞으면서 대문까지 나와 맞이해 주셨다.

▲신현국 화백
▲신현국 화백

신 화백은 1938년생으로 우리나이로 82세이다. 하지만 맑은 눈빛과 멋진 수염, 부드러운 인상으로 멋진 예술가의 풍모를 과시해 나이에 대한 통상의 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아주 건강하고, 편안해 보였다. 나도 노후에는 예술을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고개를 삐죽 들었다.

충남 예산이 고향인 신 화백은 2002년 이곳 계룡산 밑에 터를 잡았다. 신 화백이 계룡산에 터를 잡게 된 이유는 예산농고 시절의 스승인 이종건 교장 때문이다. 이종건 교장은 그가 지금의 위치에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이끌어 준 참 스승으로, 그를 홍대, 계룡산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이종건 교장은 신 화백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홍익대 미술대학 입학을 권유했으며, 가정교사를 할 수 있도록 해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사였다.

그런 이종건 교장은 어느 날 오산에서 미술교사를 하고 있는 신 화백을 호출했다. 인생의 은인인 이종건 교장의 호출은 지상명령과도 같았다. 이종건 교장은 이날 신 화백을 계룡산으로 이끌어 계룡산의 첫 만남을 주선했다.

계룡산과 첫선을 본 신 화백은 계룡산이 너무 좋아 그만 한 눈에 뿅 갔다. 계룡산의 계곡과 물, 능선을 접하면서 계룡산이 너무 좋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종건 교장은 이에 “아름다움에서 훌륭한 그림이 나오는데, 왜 삭막한 서울에서 사느냐?”며 신 화백을 꼬드겨 계룡산과의 동거를 부추겼다. 결국 그는 도시에서의 생활을 접고 그토록 사랑한 계룡산의 품에 안겼다.

과연 무엇이 신현국 화백을 계룡산으로 이끌었을까? 계룡산이 영산(靈山)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신현국 화백의 전생에 계룡산과 인연이 많아서 그랬을까?

필자가 보기엔 계룡산은 그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를 계룡산으로 이끌었고, 그리도록 했으며, 그 품에서 놀도록(?)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다시 계룡산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계룡산 예찬론’자이다. 국내의 어느 산에 가 봐도, 외국의 어떤 산과 비교해 봐도 계룡산만큼 멋지고, 매력 있는 산은 없다고 한다.

신 화백은 홍대에서 구상화는 그림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비구상 그림을 강조하는 김한기, 남관선생에게 그림을 배웠다.

구상화가 눈으로 보는 그림이라면, 비구상화는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다. 작가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압축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야 하고, 그 그림을 보는 이는 그 그림을 보고 이심전심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니 보는 이도, 그리는 이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김한기, 남관선생은 색을 마음으로 볼 것과 시, 철학, 명상,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신 화백도 대학시절 시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홍대에 다니던 신 화백은 동국대에서 강의하던 미당 서정주 시인의 수업을 들었는데, 서정주 시인은 이런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신 화백이 자기 제자인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이 그러한 착각(?)의 늪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신 화백의 결혼 때문이었다. 신화백은 대전에서 알게 된 장인이 자신의 딸을 소개해 늦은 나이인 38세에 결혼을 하게 됐다. 이때 신 화백은 결혼식 주례를 서정주 시인에게 부탁했고, 서정주 시인은 기꺼이 주례를 승낙했다.

서정주 시인은 신 화백의 화실에 와서야 그가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림만큼이나 좋은 그림이 펼쳐졌을 것으로 상상됐다. 그림들이 걸린 화실에서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시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림만큼 좋은 그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림에 취해 춤을 추는 시인과,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화가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그는 이근배, 조정래 등의 문인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신현국 화백의 화실
▲신현국 화백의 화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 화백이 그린 계룡산 그림에서 계룡산을 만나기 어렵다. 계룡산 밑에서 태어나 늘 계룡산을 보면서 자랐던 필자도 그의 그림에서 늘 보았던 계룡산은 보지 못했다.

▲산의 울림
▲산의 울림

 

계룡산은 닭의 벼슬모양을 한 삼불봉과 연천봉, 상봉이 상징이다. 삼각형 세 개만 붙여 놔도 계룡산이 상상될 정도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는 그런 계룡산이 없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계룡산 그림을 보면서 계룡산을 보지 못하다니…. 구상그림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의 그림은 구상이 아닌, 비구상그림이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다”라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필자는 아직 마음의 눈(혜안)은 뜨지 못하고, 육안만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는 중생(衆生)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강조한다. “그림을 마음으로 보라”고. 참으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문(?)이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어려운(?) 정답이다. 그렇지만 비구상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신현국 화백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신현국 화백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신 화백에게 필자와 같이 비구상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 비구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법을 물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구상 그림이고,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는 것은 비구상그림입니다. 물은 그릴 수 있지만, 물소리는 그릴 수 없지요. 이토록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야하고, 인생을 알아야 하며, 마음의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또한 색을 마음으로 봐야 하고, 느낌으로 많은 스케치를 해야 합니다. 사색의 시간, 많은 고민의 시간이 좋은 비구상 그림을 만듭니다. 비구상에는 선과 면의 작업이 있습니다. 칸딘스키는 물감을 뿌려가면서 그리기도 했지요. 지금의 넥타이디자인도 비구상그림에서 나왔습니다.  어려운 만큼 사색도 많이 해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배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림은 마음으로 그려야 합니다.”
결국 비구상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그 그림을 보는 관객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신현국 화백은 그림을 두껍게 그린다. 이봉상, 남관선생도 두껍게 그렸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화가 자신도 모르게 그림에 능선이 생겼는데, 능선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스위스 바젤 아트 페어와 같은 외국 전시에 나가 계룡산만 그렸는데, 다들 놀랐다고 한다. “자연 속에 인간이 있고, 자연을 알게 될수록 신에 가까워집니다. 저에게는 그림이 종교입니다. 좋아하고, 따라하는 것이 종교 아닙니까? 저는 계룡산을 잊지 못하고, 생각하면 흥겹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이 종교였다. 아! 이 조용한 가르침. 나의 종교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내 눈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신현국 화백의 집 정원
▲신현국 화백의 집 정원

 

신 화백은 지금 2,0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주택과 미술관을 짓고 살고 있다. 동네 이장으로부터 통으로 마을을 사들여 집을 짓고, 작은 미술관을 세운 것이다. 운동장처럼 넓은 대지에서 자연과 접하며 예술을 만끽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하지만, 신 화백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는 보문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 엄청난 생활고를 겪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막걸리로 때운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고생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신 화백은 이러한 고난에 대해 감사해 하고 있다. 그러한 고난이 그림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고, 그렇게 눈물 나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작은 글씨로 6쪽을 꽉 채울 정도이다.

▲신현국 화백의 갤러리
▲신현국 화백의 갤러리

신 화백은 고향인 예산에서 2014년 9월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술관건립 제안과 함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고향에서도 신 화백님을 기다리고 있고, 모시고 싶어 하지요?” 혹시라도 공주를 떠나게 될까봐 우려돼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많이 오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훌륭한 분을 계속 공주에 모시고자 하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대답을 들으니 내심 기뻤다.

신현국 화백은 예산에서 태어나 예산농고,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심사위원장, 대전시립미술관 작품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 거주하며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전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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