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금 차등지급 문제로 촉발된 현대차 분규사태가 타결됐다.

최근 불거진 모종의 상황들이 노사 모두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빗발치는 비난여론때문에 안그래도 위기의식을 느껴오던 노조가 이헌구 전 위원장의 배임수재혐의가 알려지자 더이상의 투쟁력을 상실했다.

강변일변도로 치닫던 회사측도 정몽구회장의 비자금사건 중형구형과 검은 뒷거래로 도덕성에 치 명상을 입자 사태를 조기 수습국면으로 이끈게아닌가 싶다. 노사 모두 치부만 드러내고 만 꼴이다. 이번사태를 계기로 현대차 노사는 겸허한 자세로 창업시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대자동차는 평소 자동차제조업이 꿈이었던 현대 창업주 정주영에 의해 1967년 처음 설립됐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부터 자동차 정비업을 해왔던 정회장은 미래 수출전략산업으로 자체 브랜드의 승용차 제조를 일찌감치 꼽아두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제조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이 크게 부족했던 터라, 정회장은 현대건설의 현장인력을 활용했다. 동시에 공장 입지를 울산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건설에 착수했다.

정회장이 울산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게 된 것은 정부의 권유도 있었지만 1966년에 이미 울산은 '특정공업지역' 으로 확정 고시돼 공업도시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수출이 목적이였던 현대로서는 해상운송이 가능한 바다를 끼고 있는데다 도로와 항만. 비행장등 사회간접시설이 활발이 추진되고 있는 울산이 최적지라는 판단에서다. 물론 창업주 정주영의 입김이 절대적인 것이었음은 그후 조선업인 현대조선소의 울산진출과 함께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가 울산을 자동차 생산기지로 정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기까지에는 혹독하리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현재 울산시 북구 양정동 700번지로 돼있는 공장부지는 당시는 염포만 또는 염포지구로 불리는 매립지역이었다. 자동차공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에 주변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일부 토착민들은 고가(高價)의 토지매수협의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잦은 집중호우와 빗발치는 민원때문에 당시 현장에 나와있던 회사 관계자들은 죽을 지경이였다. 가까스로 공장을 세운 현대자동차는 1969년 9월 때늦은 집중호우로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울산지역에서 처음있는 폭우로 공장내부가 물에 잠기고 각종 부품과 자재는 개펄에 파묻히는 피해를 입었다. 공장의 초토화는 물론 회사의 대외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었다. 실제로 그 당시 울산시민중 상당수가 현대자동차의 회생불능을 예상했고, 회사측으로부터도 '공장포기설' 까지 유포됐다.

현대자동차는 이같은 천재지변뿐아니라 생산과정에서도 성능시비와 차종선택 오류, 부품부족등의 시행착오를 겪기도했다. 이밖에 자동차 판매방식으로 도입했던 은행할부제도가 부실채권과 악성채권을 발생시켜 경영부실의 원인이 됐고, 대외 공신력도 동반추락하는 사태도 빚어졎다. 

1970년대에 들어서 현대자동차는 '포니'라는 고유모델을 개발해 독자노선을 걷게됐으며, 비로소 국내 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됐다. '포니의 신화' 를 창조해 내기까지 현대자동차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했으며, 그 과정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유.무형의 공로와 희생이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오늘에는 무엇보다 창업주의 탁월한 창업정신과 막후 경영진의 지도력이 뒷받침됐다. 창업주 특유의 뚝심과 창업을 도운 당시 경영진의 기업정신이 없었다면 삭막한 갯벌 속의 '현대신화' 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정부의 각종 지원과 지역사회의 협조없이 현대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울산을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만들수 없었다. 더불어 창업초기 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 내려온 현장 근로자들의 우수한 노동력과 협력업체들의 도움때문에 '세계속의 현대차' 가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자동차는 창업주와 경영진만의 것이 아니고, 더욱이 노동조합이나 노조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의 사태를 놓고 정치권과 재계가 목소리를 내고, 협력업체와 상공인, 지역 시민사회가 언성을 높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현대자동차의 무능한 경영진과 배부른 노동자는 지금이라도 40년전 그 시대의 창업정신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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