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건국초기부터 원로원이 존재했다. 왕정시대는 씨족의 장로가 구성원이었고, 공화정 시기에는 의원제도 운영했다. 정원이 3백명에서 9백명에 이르렀고, 임기는 종신이였다.

 

처음에는 귀족만으로 구성됐으나 나중에는 평민도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원의 역할은 입법. 행정은 물론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으로, 원로원의 결의는 법률 그 자체였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권력과 권위. 명예의 상징 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공화국제도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상원을 원로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대로마의 노회한 정치세력으로 불리웠던 원로가 이제는 어떤 분야에서건 경험과 공로를 많이 쌓은 사람을 일컫게 됐다.

 

일본은 국가에 공로가 많은 각료 출신을 원로대신(元老大臣)으로 칭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정치원로. 문단원로. 지역원로등 각계각층의 원로가 있음직 한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온 나라가 한미 FTA 협상 문제로 들끓어도 최선과 차선을 대비해줄, 그리고 조율해줄 원로가 없다.

 

정부의 강력한 안정대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도 이 역시 해법을 내놓는 원로가 없다. 어디 이뿐인가. 북핵문제, 환율문제, 사학법 및 연금제도 개정문제, 노사문제등 사회 곳곳이 반목과 불신.대안 부재로 충돌하고 있는데도 이를 다듬어줄 원로가 없다.

 

국가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근로자와 농민은 또 그들대로 주장은 있어돼, 그 주장들이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분명 지도자는 있는데 지도력이 없고, 정치가는 많은데 정치력이 없으며 개인과 집단의 독자성은 만발한데 사회성이 없다. 오직‘나만의'‘우리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이다.

 

지난달 식민사회를 극복하고 독재부패정권을 타도한, 그리고 기형적인 군사정권을 헤쳐 나와 문민시대를 연 국민치고는 지나치게 ‘나’와 ‘우리’ 에 함몰돼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 뒤에는 우리 사회가 ‘원로’를 너무 잊고 살아왔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선과 차선을 제시해줄, 그리고 그것을 조율해줄 원로가 없다. 저마다의 주장과 나름의 지도자는 있으되, 그것을 보듬고 다듬어줄 원로가 없다.

 

국가는 국가대로, 지역은 지역대로 이같은 ‘원로의 빈곤’을 겪고있다. 다른 도시보다 거주민의 평균연령은 낮고 소득은 높은 울산은 그 어느 영역 어느 분야에서도 원로를 찾기 힘들다.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독점과 독단의 시비가 그칠 줄 모르고 산업현장과 이익집단은 자기 목소리 내기에만 열중이다. 나아가 지역 문화, 예술, 체육계조차도 자리다툼과 기득권 사수에만 혈안이 돼있다. 학계는 몇몇 정치교수들이 지식인과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언론계는 자기성찰도 안된 인물들이 ‘저널리스트’로 행세하고 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원로의 길과는 먼 행보를 하고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모두 우두머리만 되겠다는 욕심과 지도자로 자처하고 자만하는, ‘가치의 혼돈’ 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원로란 결코 지도자가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힘이 아니라 사리를 분별해주는 사회적 규범이며 철학이다.

 

우월하거나 독점하려는 이해가 아니라 겸손하면서도 깨우침을 주는 권위도 경험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원로를 찾아야 한다. 없다면, 왜 원로가 없는가를 생각하고 깊이 반성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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