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내가 남을 기다리기도 하고, 또 남이 나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느 대상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짜증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물론 사랑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연예기간에는, 애인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기다림에 대한 태도가 180도로 돌변한다.

만약 아내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을 못 참고 날벼락을 내리는 게 우리 남편들의 기본적인 태도다.

그것을 보면, 기다림은 누가 뭐라 해도 고통이 수반되는 고해苦海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기다림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남이 나를 기다리는 경우보다 내가 남을 기다릴 때 더 크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자기본위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들은 남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사람이다.

앞의 제3장에서 얘기한 ‘서恕’의 정신이 기다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내가 기다림을 싫어하듯이 남도 그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싫어하는 기다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의미이다. 특히 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조직구성원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리더의 1분 가치와 민초들의 1분 가치는 똑같다!

그 이유는 리더의 착각과 오만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의 시간가치가 조직구성원들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시간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남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리더의 권위나 체면을 살리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가령, 청와대에서 100여명의 내외빈 인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좌장은 대통령이 맡는다고 가정하자.

이런 회의를 추적해보면, 가장 늦게 회의장에 나타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대통령 자신이다. 제대로 인격을 갖추고, 남들과 휴먼-네트워크를 잘하는 대통령이라면 자기가 회의장 입구에 먼저 도착해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내외빈을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라도 청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대통령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매일 TV를 통해서 접하는 것은 참석인원 전원이 회의장에 모두 집결해서 로봇처럼 좌정坐定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참모들에 둘러싸인 채 거만하게 나타나는 대통령의 모습뿐이다.

이때, 100명의 참석인원이 1분만 기다려도 전체가 낭비한 시간은 100분이다. 만약 대통령이 입장하기까지 약 15분을 기다렸다면 1,500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담배연기처럼 공중으로 날아간 셈이다.

대통령이 내외빈을 15분씩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1분가치가 민초民草들의 1,500분과 동일하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이런 현상은 비단 대통령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공적 조직의 리더(예: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등)들은 물론 민간기업의 총수나 전문경영인 같은 사적 조직의 리더들도 남을 기다리도록 하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민초들의 힘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에, 남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무시하는 리더들은 조만간 ‘공공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지나간 역사를 반추해보면 남에게 기다림의 고통을 안겨주지 않도록 노력했던 훌륭한 리더들도 이따금씩 만날 수 있다.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었던 주공周公 단旦이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마라’는 철학으로 정사政事를 보면서 무왕의 명보좌관으로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는 평생 동안 ‘일목삼악발 일반삼토포(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사람이 찾아오면 머리를 감고 있는 중일지라도 감다 만 머릿단을 움켜쥐고 나와서 접대했고, 손님이 식사 중에 찾아오면 먹던 밥을 뱉어내고 나와서 응접했다’는 뜻이다.)‘를 실천했다고 한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겸손함을 강조하는 토포악발吐哺握髮이라는 고사성어도 주공 단의 훌륭한 처세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Mohand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역시 남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인도의 독립을 목전에 두고 중요한 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몰지각한 몇몇 사람들의 지각으로 인해 회의가 30분이나 지연되자 그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개회를 선언하기 전에, 단호한 어조로 “몇몇 사람들의 몰상식한 게으름으로 인해 우리 인도의 독립이 30분이나 늦어졌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고, 늦게 도착했던 유력인사들은 창피함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삼성그룹의 고故 이병철 회장도 남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엄격했던 분으로 전해진다. 골프광이었던 그는 골프 모임이 있는 날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고, 라운드에 들어가면 연습 스윙을 하지 않고 곧바로 샷을 했다고 한다. 이는 남을 기다리도록 하는 행위가 가장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말 속에 숨겨져 있는 시간의 비밀

우리들이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어투는 크게 존대 말과 반말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윗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낯선 분에게는 존대 말을 쓴다.

낯선 분에게 존대 말을 쓰는 배경에는 한국인 특유의 ‘우환의식憂患意識’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반말을 했다가는 예기치 않은 봉변이나 해코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손님’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원래 ‘손’에는 날짜와 시간에 따라 사람을 쫓아다니며 방해를 한다는 귀신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일례로, 부모님들이 이사를 준비하는 자식들에게 “손 없는 날을 골라서 이사하도록 해라.”고 말씀하실 때의 ‘손’이 다름 아닌 귀신이다. 그런 의미의 ‘손’에다

‘님’자를 덧붙여준 이유는, 귀신인 ‘손’을 잘 대접함으로써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는 우환의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느 집을 방문할 때, 그 집 아이가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자기 부모한테 “아빠 손님 왔어!”라고 외칠 때면, “아니, 내가 혹시 귀신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씁쓸한 마음이 든다.

최근에는 어떤 유머집을 보니까, ‘연인과 말투’에 대한 재미있는 유머가 실려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이라 해도 연하의 여자가 남자에게 존대 말을 하면, 그들은 아직 키스 단계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띠 동갑의 연인이라 해도 하룻밤만 함께 보내고 나면 서로가 친근한 반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존대 말을 사용하는 연인은, 반말을 사용하는 연인들에 비해 사랑의 깊이가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이 그 유머집이 내린 결론이었다.

연애의 기억이 빛바랜 사진첩으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필자로서도 그 결론에 대해 100% 지지한다.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반말은 손아랫사람이나 아주 친밀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리더들이 부하직원이나 민초들에게 사용하는 반말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연인들 간에 주고받는 반말처럼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친밀한 개념인가, 아니면 명령과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권위주의적인 개념인가?

오랫동안 리더들의 행태를 연구해온 필자로서는 후자의 견해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리더가 하는 반말에는 부하직원이나 민초들을 얕보는 태도 이외에도 고약한 시간관이 숨겨져 있다. 우선 존대 말은 반말에 비해서 길게 해야 한다.

반말 투의 “자네 어제 저녁에 잘 잤나?”보다는 “어르신, 어제 저녁에 잘 주무셨습니까?”라는 존대 말이 훨씬 더 길다.

게다가 말을 할 때도 반말은 뻣뻣이 선 채로 할 수 있지만, 존대 말을 할 경우에는 인사나 웃음까지 곁들이면서 상냥한 태도로 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리더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리더라는 사람들은 단지 자기가 회전의자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 짧은 어투의 반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이봐, 나는 매우 바쁘고 연봉이 많은 리더요! 그러니까 당신 같은 아래 사람들에게 길게 말할 시간적 여유가 없소. 그런 이유로 시간이 절약되는 반말을 하니까, 괜한 생트집을 잡지 말고 이해를 해 주시오!”라고 말이다.

따라서 리더들의 오만한 시간관만 일부 수정해도 오만무례한 반말은 크게 줄어들 것으로 확신한다.

시간은 왕후장상의 씨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 배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간과 죽음일 것이다. 대통령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일반인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다.

또 천수天壽를 다하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한 줌의 흙이 되고, 일반인들 역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서 자연의 일부로 귀속된다. 이처럼 시간과 죽음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다만,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이나 요령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도 판이하게 달라진다.

자신의 시간을 아껴가며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은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만나게 되고, 방탕과 허송세월로 시간을 죽인 사람들은 ‘패배’와 ‘낙오자’라는 굴레를 짊어져야 한다.

시간은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가지만,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화살처럼 손살 같이 흘러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남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지 말고, 자신의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의 사닥다리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자신의 책 ≪팡세(Penses)≫에서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한다.”라고 일갈했다.

‘인간은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에 지배받기 쉬우며, 그것은 마침내 타고난 좋은 천성마저 파괴해 버린다.’는 파스칼의 주장은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자신의 시간을 죽이는 태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이제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만이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아까운 시간을 짓밟고 무례한 반말로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 사이비 리더들이 많으니,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참으로 안타깝고 야속할 따름이다.

김덕수 교수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 , , , , 등 다수가 있다. 조만간 출간 예정.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