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法治란, 한마디로 ‘법에 의한 지배’를 말한다. 또 법치는 인치人治나 행치行治와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치는 독재자 1인에 의한 철권통치를 말하고, 행치는 행정 관료들에 의한 규제 중심의 국가경영을 뜻한다.

그런데 21세기는 시장경제시스템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가 인치나 행치를 KO패시키는 시대다.

그런데도 지금의 한국은 전형적인 행치 국가로서, 법치 수준은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법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법에 대한 한국인들의 심사가 다분히 이중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인들은 자기자식이나 사위가 판사나 검사(이들은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데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감’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다.

경험도 없는 젊은 애들이 영감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는 우리 사회야말로 정말로 웃기는 세상이 아닐 수 없다.)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사회과학분야에서 법대 경쟁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그를 입증한다.)한다.

그러면서도 법 자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를 옭아매는 거추장스런 존재로 인식한다.

이처럼 법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타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은 갖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법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이기심에 연유한다.

물론 거기에는 한국인들의 두뇌에 내장되어 오토매틱으로 작동하고 있는 불량 소프트웨어, 즉 천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法’자에 숨겨져 있는 황당한 비밀

법法자에 대한 은나라 갑골문자의 형태
사실, 법法자에는 ‘흑염소 마음대로’라는 황당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法’자에 대한 은나라 갑골문자는 ‘물 수(氵) + 사슴류 동물 천(薦) + 갈 거(去)’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의 ‘法’자는 원래의 ‘물 수(氵) + 사슴류 동물 천(薦) + 갈 거(去)’에서 ‘사슴류 동물 천薦자’가 제거된 형태이다.

또 갈 거去는 사람을 의미하는 글자(왼쪽의 글자 참조)와 판결이 재판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시사하는 ‘ㅂ’자가 합쳐진 모양이다.

이것은 고대古代의 법 집행이 오늘날과 비교하여 매우 황당했음을 보여준다. 제정祭政 분리 이전의 고대에서 무당은 곧 종교인, 정치인, 제사장祭司長, 재판관이었다.

요즘 특정 신앙을 믿는 일부 인사들이 파당을 지어 무당을 제멋대로 폄훼하는데, 이는 종교에 대한 공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형편없기 때문에 진리의 다양성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아집만을 주장한다. ‘무식할수록 용감하다.’는 말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무당巫堂이란 한자에서 ‘巫’자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위의 가로획은 하늘이요, 아래의 가로획은 땅이다.

그리고 세로획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이고, 세로획 좌우에 있는 두 명의 사람人은 작두를 타며 춤을 추는 무당과 그녀 앞에 돈과 물건을 갖다 놓고 무언가를 애타게 기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당이 인간들에게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는 중개자였음을 시사한다. 즉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무당은 오늘날의 예수님과 같이 성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당은 재판을 거행할 때, 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물가에 나란히 세워놓고 각자 변론을 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뿔이 달린 사슴류 동물(예: 흑염소)로 하여금 그들의 등을 뒤에서 들이박게 했다.

이때 무당은 흑염소의 뿔에 찔려 물에 빠진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죄로 방면放免했다고 한다.

졸지에 흑염소의 뿔에 찔려 가해자로 몰린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황당 사건 이상의 변고變故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도발적인 책으로 ‘유교 죽이기’를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던 상명대 김경일 교수가 쓴 ≪제대로 배우는 한자교실≫의 내용과 일본에서 문화인류학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지기知己의 얘기를 참고하여 필자가 새롭게 각색해 본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법 적용의 형평성은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그다지 높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의사, 약사, 한의사, 교사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검찰과 경찰이, 빽 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농민들의 데모에 대해서는 강경진압을 하는 게 바로 엿가락 같은 한국 사회다.

한국 사회에서 용감무쌍한 투캅스 아저씨(?)들의 곤봉세례를 받지 않으려면, 적어도 끝에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예: 판사, 검사, 의사, 약사, 교사 등)을 가져야 한다. 참으로 서글픈 사회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문화는 5,000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중국의 고대 문화와 마치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지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혹시 한국 법에 중국 은나라 흑염소의 황당무계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것은 아닌지?

또 중국 은나라의 변종 바이러스가 한국인들의 가치관에 전염해서 법에 대한 보편적 사고체계를 교란시킨 것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법 전문가들의 치밀한 내적 성찰과 깊이 있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한편, 요즘에는 거꾸로 데모진압을 하는 경찰들의 인권이 새로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물론 노동자나 농민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들에게 쇠파이프나 몽둥이, 더 나아가 화염병까지 던지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임에 틀림없다.

또 몇 일 전에는 판결에 불만을 품은 전직 대학교수가 담당판사에게 석궁을 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범법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과연 공정하게 법을 집행했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먼저 제기하고 싶다.

누구든 공권력이 법 집행에 공정하면, 그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거의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법 집행에 편파적인 대우나 봐주기가 개입되면, 그때부터 공권력은 더 이상의 권위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오늘날 노동자와 농민, 판결에 의혹을 품은 사람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몽둥이, 화염병과 석궁 속에는 그들의 울분과 분노가 깃들어 있음을 법원, 검찰, 경찰청 관계자들은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법치가 실현되지 않는 3가지 진짜 이유

이 정도면, 한국 사회에서 법치가 실현되지 않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석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은 그런대로 갖춘 셈이다. 이제 그 이유를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그 동안 한국에는 법(law)만 있었을 뿐, 법의 규칙(the rule of law)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의 규칙이란, 한마디로 법이 만인 앞에서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백악관의 인턴사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 양과의 섹스 스캔들을 조사하기 위해 당시 미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클린턴 대통령을 청문회에 출석시킬 수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법의 규칙이다.

만일 이와 같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다면, 과연 그를 청문회에 내세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도청을 통한 상대방의 약점 잡기, 돈을 통한 물 밑 회유, ‘남자의 아랫도리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통해 청문회를 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제3공화국 시절의 최대 섹스 스캔들이었던 ‘정인숙 사건’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나라 법은 몇몇 정치적 끗발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는 ‘고무줄 법’이었다.

그런데 ‘법이 권력 앞에 무력하다’는 인식이 만연되면, 국민들은 더 이상 그 법을 준수하지 않고 별도의 ‘떼 법’으로 저항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이나 “너나 잘하세요!”, “내 걱정하지 마!”와 같은 비아냥조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풍미되는 이유 또한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정치적 끗발들이 앞장서서 탈법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검찰의 출석요구에 순순히 따랐던 국회의원들을 본 적이 있는가? 법을 만드는 사람들부터 국법을 무시하는데, 어느 누가 그런 엿가락 같은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는가?

둘째, 법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준법 행위가 공익 증진은 물론 사익 추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회적 신뢰관계가 깨져 버린 것도 법치가 안 되는 주요 요인이다.

법치는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이 위법사실을 눈감아주거나 감시활동을 게을리 해서 위법사실을 적발하지 못할 때, 또는 범법행위를 한 이웃이 정당하지 못한 부를 축적할 때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

법치는 ‘내가 법을 지키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법을 잘 지킬 것이다.’라는 국민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전제될 때에 한해 실현될 수 있는 개념이다. ‘법이란 지키면 지킬수록 손해다’, ‘법을 지켜가며 기업 활동을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계속되는 한, 법치에 대한 기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셋째, 맹자의 성선설에 집착하는 한국인 특유의 온고지신溫故知新적 근성도 큰 문제다. 맹자의 성선설적 관점에서는 법이나 사회적 룰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에게 ‘융통성이 없는 사람’, 또는 ‘앞뒤가 꽉 틀어 막힌 꽁생원’ 정도로 무시하는 게 한국인들의 기본정서다.

그러다보니, 한국 사회에서 ‘법대로 하자!’는 얘기는 ‘막가파식으로 한번 싸워보자!’는 의미의 선전포고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반면, 법이나 사회적 룰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에게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도덕군자’, ‘선비같이 얌전한 사람’이라는 호평과 함께 칭송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심은 ‘낮 양심’과 ‘밤 양심’이 전혀 다르다는 게 문제다. 남들이 지켜보는 벌건 대낮에는 양심적으로 행동을 하다가도 남이 볼 수 없는 밤이 되면 양심불량의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점에 관한 한, 필자도 자신이 없다.

IMF 금융위기를 불러온 원흉 중의 하나로 세인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는 모럴 헤저드(moral hazard)도, 따지고 보면 ‘도덕(moral)은 언제나 그 자체로 위험(hazard)스러울 수밖에 없는 가치기준이다.’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21세기 한국 사회 발전의 대안은 법치에서 찾아야 할 때

결론적으로 도덕성 회복운동으로 21세기의 민주시민사회를 열려고 하는 일부 도덕론자들의 어설픈 주장은 이제 중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 대안을 시장경제시스템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에서 찾고, 시장경제시스템의 확고한 정립에 사활死活을 걸어야 한다.

그 전제조건은, 맹자의 성선설이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우리 사회의 기본인식론으로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미 오래 전에 맹자와의 의미 없는 사랑을 정리했다. 지금은 순자와의 달콤한 지적 연예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냉철한 관조觀照를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는 논리를 도출하고, 그런 인간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회적 대안으로서 ‘법치’와 ‘시스템적 사고’를 제안했던 순자의 정신세계를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오늘의 필자에게는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 , , , , 등 다수가 있다. 조만간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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