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뭘 집으려면 손을 펼쳐야 한다. 손으로 뭘 가지려 하면 손에 이미 든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 손에 뭘 들거나 집고 있으면서 그 손에 다른 것을 집거나 가질 수 없다.

어떤 사람 셋이서 여행을 시작했다. 무엇이든 귀중한 것을 보면 그것을 먼저 갖고 알려 주기로.

세 사람은 오래지 않아 철로 된 보배를 얻고 기뻐하며 그 주인이 되었다. 세 사람은 거기 만족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중간에 은으로 만든 보물을 발견하였다.

한사람은 손에 든 철제품을 내려놓기 아까워 그냥 가고 두 사람은 철제품을 내려놓고 은제품을 손에 넣었다.

다시 길을 가다가 금제품을 만나서도 처음 사람은 여전히 철제품을 고집하고 두 사람 중 하나는 은제품을 내려놓고 금제품을 지녔다. 하나는 철. 하나는 은. 하나는 금.

다시 여행을 이어 가다가 다이아몬드를 만나자 금제품을 든 사람은 아낌없이 금을 내려놓고 다이아몬드를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여정에서 세 사람은 영원불멸의 진리를 만나는데 철과 은을 소지한 사람은 여전히 손을 놓지 못하여 잡지 못한 대신 다이아몬드를 손에 든 사람은 아낌없이 내던지고 진리를 선택했다. 비유로 만들어 본 이야기지만 어딘가에서 본듯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굳이 이것을 불교 수행의 내용으로 나누어 말하자면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법과 일불승의 비유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있을 49재를 준비하다가 문득 무엇을 집으려 손을 뻗었는데 그만 손에 쥔 것을 내려 놓지 않은 상태의 손 모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는 법. 손에 든 것을 먼저 놓고 손을 펴지도 않은 채 다른 물건을 잡으려 하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나서 피식 웃음이 솟는다.

사람들 마음이 다 그런가 싶다. 이 아파트도 내 것이니 내가 갖고 또 다른 아파트 한 채도 더 갖고 싶어 한다.

지금 가진 아파트를 처분하여 다른 더 나은 아파트를 사는 사람보다 기왕이면 은마도 갖고 금성도 갖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할지 모르지만, 둘 다 가질 수 없는 상황일 때는 과감히 하나를 정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수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계 단계 올라가면서 체험을 하면 강을 건넌 뗏목을 놓아두고 가듯 그 체험을 내려놓고 다음 길로 가야 한다. 강을 건너고서 뗏목의 고마움에 뗏목을 짊어지고 가지는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의 조그만 체험이나 행복에 함몰되어 향상의 길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같이 공부했던 몇몇 분들을 오랜만에 돌아보게 되었을 때 보니 정진제일이라 불리던 수좌는 이름 짓는 작명가로 유명해 져 있고, 또 등신불의 수준을 넘었다 하던 이는 무슨 국책사업에 빠져 정신이 없으며, 신통을 조금 얻었던 누군가는 지금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점을 보는 점쟁이 신세가 되어 있다.

다 나름 열심히 살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결국은 정법의 하늘 아래서 벗어 나 외도의 길로 접어든 경우다.

차라리 인물이 못났으면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 아직 부처님 탁자 밥을 내려 먹는 청복이라도 누리련만 그들은 손을 놓아도 잘 못 놓고 잡아도 잘 못 잡은 케이스 아닐까 싶다.

성문 연각 보살의 길에서 일불승의 길로 접어드느라 이전 것을 놓아 버려야 할텐데 우리는 놓아 버린 썩은 사과를 다시 주우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다.

처자식에 대한 미련이나, 세상 온갖 욕심마저 다 던지고 할애사친 출가의 길로 들어 선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오히려 세속인보다 더 심하게 재물과 권력과 이성과 명예에 빠져서 감투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속인들과 선거도 치른다.

"내려가야 할 때를 알아서 내려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하고, 내려놓을 때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만큼 이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며 불자들 앞에서 고고하게 설법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아래도 내려 가야하는 것을 모르고 오르려고만 하고 있으니 문제다.

세속이 싫어서 염리심을 일으켜 포고발심하고 세간을 떠나면 그것을 '출세간'이라 하고 출세간의 수행을 잘 하여 공부가 익으면 세간을 정화하기 위하여 세간과 출세간을 자유로이 들고 나는 것을 '출출세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무애도인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막행 막식의 좋지 않은 모습만 배워서 음주 식육이 ‘무방반야’라 하면서 반야차 부월채를 마구 주워 먹는 무애도인 운운하는 칠푼이 도인들 덕분에 우리 부처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아닌가.

참 수행자들은 저자거리에 숨고, 거짓 승려 벙어리 박쥐 아양승들이 불교를 대표하고 앉았으니 그게 문제다.

부처님은 고루거각으로 지어진 대웅보전에 계신 것이 아니고, 중생들의 살림살이 속에 그대로 현신하여 희로애락애오욕 속에서 제도중생 하심을 정녕 모르는 처사란 말인가.

어느 스님은 명함을 주기에 받으니' 법왕'이니 '법황'이니 '종정'이니'원장'이니 하여 무슨 무슨 감투가 십여 개인 사람, '주지'며 '회주'라 하여 절이 여러 개가 인쇄된 사람도 있다.

얼마나 훌륭하기에 그리 명상이 많은 것인지. 금강경 오가해는 한번 읽어나 보았는가. “함허 득통선사는 유일물어차하니 절명상 호대 관고금 하고 처일진 호대 위육합 한다” 하였다.

"명과 상을 끊어야 고금을 통하고, 한조각 티끌에 처해서도 육방을 감싼다"하는 말이니 십 여개 명상은 어디 쓸 것이며 하나의 티끌도 아닌 여러 개의 절을 소유함은 무슨 필요인가.

"버려라, 비워라" 말로만 하지 말고 당장 방하착 하라 이 사람들아. 그러지 못하겠거든 바리바리 짊어지고 가거라. 세상에 다시는 보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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