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중회[백제궁중기악 상설공연단 총연출]

3 가지 백제궁중기악 가운데 마지막으로 궁중기악 3 가지를 설정하여 선보이고자 한다. 다만 왜 이러한 설정이 가능한 것이지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이 글의 소임이다.

백제기악은 당대 중국에 유행하던 ‘문화상품’이라는 점과 중국의 주변국의 기악 소위 4방악[동이, 북적, 서융, 남만]의 연악으로 흥성하여 백제기악의 궁중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제기악은 당나라 중종[683~684와 705~710]에 이르러 음악 연주자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개원[713~741] 연간에 기왕범岐王範이 태상경이 되어 다시 아뢰어서 설치하였다. 이것은 음기音伎가 많이 빠졌다.

이상은 《삼국사기》‘백제악’조에는 실린 글인데 당 나라 두우[735~812]가 801년에《통전》의 기록을 옮겨온 것이다. 여기서 태상경은 당나라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태상시의 우두머리이다.

피리笛                                                         완함阮咸

그런데 이상의 인용문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내용이다. 당나라의 중종시대라면 백제가 멸망하지 20여년이 지난 뒤이므로 그때까지도 백제에서 끌려간 예인들이 아닐까? 왜냐면, 소정방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때 백제기악[노래 5종과 2인용 춤]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영공 설인귀[소정방의 잘못]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기악을 얻어서 나라[당]에 바쳤다. 노래가 5종이 있었다. 그 무용에는 2명이 춤을 추었다.

왜 당나라 사람들은 백제기악을 가져다가 20여년이나 보존하면서 연주하였을까. 더구나 백제 예인들이 도망하여 흩어진 지 3~5년이 지났는데 기왕범이라는 태상경이 다시 살려낸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가《삼국사기》‘백제악’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북송[960~1126] 때 진양이 지은 《악서》와 원[1271~1368] 초에 마단임이 지은《문헌통고》에 이르면 오늘날 상식을 깨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1) 유송[420~479] 초기에 고구려기악과 백제기악을 얻었다. 2) 북위[386~534]가 북연[409~436]을 평정[436]했을 때 역시 백제기악을 얻었는데 다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3) 북주[556~581]의 무제[560~578]가 북제[550~577]를 멸망시키니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그 기악을 보내왔다.

그래서 북주에서는 이를 국기國伎로 삼았다. 4) 수[581~619]가 진陳[557~589]을 멸망시키면서 문강기를 얻으면서 그때까지 악부에 있던 백제기악을 없애버렸다. 등등인데, 백제기악이 북연, 유송, 진陳, 북주, 수 등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백제기악은 백제에서 직접 보내기도 하였으나 보통 유입해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백제기악은 중국의 ‘인기 품목’이었던 셈이다.

백제기악이 특히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무대에서 ‘인기품목’이듯이 서역의 기악들이 너무 많아서 혼잡할 정도였다. 수[581~618] 문제[재위 581~604]가 나라를 통일한 뒤 기악도 정리하였는데 이것이 7부악이다.

7부악은 청상기[이는 중국기로 계산에서 빠짐], 국기, 구자기, 소륵기, 안국기, 천축기, 고[구]려기, 문강기[원래 이 자리가 백제기의 위치] 등이 그것이다. 이후 2 종류의 9부악이 있는데, 처음이 강국기와 청상기까지 포함한 것이고 다음으로 연악이 들어가고 문강기 즉 예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필이 빠진 것이 아니라 연후宴後의 행사로 독립했다는 것이다. 당[618~907] 이후는 후자의 9부악에 고창기가 포함되어 10부악이 되었다. 특히 연후의 기악들은 특별하게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중국문화에서 이와 같이 외국의 기악들이 성행하였다면, ‘기악’이라는 인기품목을 가진 백제궁중은 조용하였겠는가? 이것이 백제궁중기악의 설정이다.

1) 22개 담로[출전:《양서梁書》]들이 궁중에 와서 놀이를 헌정하는 축제, 2) 수양제[604~618] 기념식에서 백제의 춤꾼이 호선무를 추었는데 이러한 춤의 흐름은 정읍사의 북춤舞鼓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전제로 구성한 ‘호선무와 정읍사의 북춤’, 3) 중국의 남북조 시대 서역에서는 당시 집시 예인인 건달바Gandharva[향가 ‘혜성가’에도 나오는데, 원래 인도에서 천상계Indra의 가수라는 단어이다.

압사라Apsara가 무용수이고 긴나라Kinnara가 악사로 이들이 한 조라고 할 수 있다]가 유행하였다. 이들은 직위도 없고 나라도 없으며 거주지도 정해지지 않은 떠돌이 예인이었다. 그만큼 예인들의 활동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백제의 미마지味摩之도 이러한 것처럼 ‘전문예인’이되 그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치윤[1765~1814]의《해동역사》에 의하면, 612년 味摩之만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已中芳과 加多義가 함께 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마지는 이들의 우두머리 예인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마지의 중국유학과 산유화가’를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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